만리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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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가지 질문을 하고 싶다. 아주 쉬운 그리고 의도가 분명한 문제다.
첫째. 거대한 여객선이 표류하고 있다. 기관 고장과 항로 이탈 때문인 것 으로 확인되고 있다. 남쪽에서는 빠른 속도로 태풍이 몰려온다. 해안경비 대로 구조요청을 날렸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경비대쪽에서는 표류의 책임을 물어 먼저 여객선의 선장과 기관사 항해사 등에게 하선할 것을 요 구했다. 그래야 구조대를 보내겠다는 것이다. 당신이 승객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둘째. 작전중인 고성능 전함이 어디로부턴가 날아온 어뢰에 맞아 이물이 부서졌다. 기관엔 이상이 없지만 바닥에 구멍이 뚫려 물이 들어오고 있다 . 구조요청을 날렸다. 인근에서 작전을 벌이다 현지로 출동한 함대가 다 음과 같이 요청했다. 함장 등 지휘관을 처벌하고 사병들은 전함과 함께 투항하라는 것이었다. 이 함대는 적인가 아군일까. 함대 뒤편 멀리에는 어뢰를 발사한 듯한 잠수함이 한가롭게 떠 있다.
기아사태가 파국으로 치닫고 있다. 기아 경영진과 채권단 사이의 거듭된 논의에도 접점을 찾지 못하고 있다. 김선홍 기아그룹 회장 등 경영진의 퇴진을 둘러싼 이견 때문이다. 아시아자동차 매각이나 인원감축 따위도 거론되고 있지만 양념인 것 같다.
왜 김 회장일까. 그는 한때 우리의 재계에서 군계일학으로 꼽히는 전문경 영인이었다. 정부는 한때 그를 한계점에 도달한 재벌경제를 한 단계 도약 시킬 수 있는 모델로 삼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 80년 신군부의 산업합리화 조치에 따라 동아그룹에 합병될 위기에 몰렸을 때 기아산업( 기아그룹의 전신)의 전권을 맡아 오늘날 세계 자동차업계 랭킹 23위로 도 약하는 기관사 노릇을 해왔다. 당시 기아산업은 누적 적자가 5백3억원에 달해 부도 위기에 직면해 있었고 이는 합리화 대상의 빌미가 되었다. 그 는 이른바 ‘봉고신화’를 빚어내 3년 만인 84년 5백64억원의 흑자로 반 전시켰다.
지난 94년 초 <한겨레>가 실·국장급 이상 경제관료들을 대상으로 실 시한 설문조사에서 그는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에 이어 두번째의 최고경영 인으로 꼽히기도 했다. 당시 김영삼 대통령은 ‘가장 존경하는’ 경영인 으로 주저없이 김 회장을 거론하기도 했다.
그런 정부가 이제 채권단과 마찬가지로 “김 회장 퇴진 없이는 정상화 없 다”는 말을 주문처럼 외고 다닌다. 사실 김 회장도 ‘경영정상화 후 퇴 진’ 약속을 분명히 했다. 최근 임원회의에서는 “앞으로 2개월 동안 정 상화를 위해 노력한 뒤 결과에 관계없이 퇴진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런 데 채권단은 왜 그럴까. 김 회장 퇴진은 정상화 포기와 3자인수에 맞닿아 있다는 게 일반론이다.
문제는 채권단보다 정부에 있어 보인다. 채권단의 주장 뒤에는 항상 정부 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중립을 표방한 겉모습과 달리 정부는 그동안 뒤 에서 김 회장의 비리의혹을 언론에 흘리는 등 김 회장 퇴진을 압박하고 있다. 여자 문제나 치부 따위와 관련된 의혹들이 그것이다. 역대 정부가 정적과 고위공직자를 길들이는 데 이용하던 정보정치의 전형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정부는 기아와 마찬가지의 입장에 있는 진로그룹이나 대농그 룹의 최고경영진에게는 매우 관대하다. 주식포기각서 제출을 그렇게 압박 하지는 않는다.
정부는 이제 경영정상화 방안을 둘러싸고 논란을 벌이는 듯한 흉내를 포 기할 때도 된 것 같다. 속내인 3자인수 방침을 공론에 부치는 게 차라리 떳떳할 것 같다. 이미 정부 뒤에는 정체를 알 수 없었던 문제의 ‘잠수함 ’이 떠올라 있다. 시장논리에 맡기겠다면서 개입하는 게 찝찝하다면 현 대그룹에 제철소를 불허하는 논리로 밀어붙이면 되지 않겠는가.
<한겨레21> 편집장 곽병찬
© 한겨레신문사 1997년08월14일 제 170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