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미래의 꿈이 송송, 현장실습 나간 실업고생들의 여름

(사진/대진전자공예고 디자인과 3학년생인 구미경양이 현장실습업체 선배직원의 지도를 받으며 만화원본 수정작업을 하고 있다.)

‘윙윙∼ 철커덕 철커덕….’

푹푹 찌는 무더위가 며칠째 기승을 부리던 지난 7월31일 오전 서울 숙대 입구 근처에 위치한 인쇄업체 로얄프로세스.

공장 안은 연신 돌아가는 대형 인쇄기가 내뿜는 열까지 가세해 수은주를 40도 가까이로 밀어올리고 있었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온몸이 땀에 흠뻑 젖을 만한 열기다. 요란한 소음과 함께 인쇄기는 쉴새없이 인쇄물을 토해낸다.

불황 여파, 현장실습 요청도 부쩍 줄어

인쇄기를 조작하고 종이를 나르는 최용환(18)군의 몸에는 이마와 목 할 것 없이 굵은 땀방울이 송송 맺힌다. ‘안전제일’ 마크가 새겨진 그의 푸른 작업복도 어느새 땀으로 범벅이 된다. 웃통을 벗어젖히면 러닝셔츠 는 물수건이나 마찬가지다.

그는 학생 신분이다. 서울공고 인쇄사진과 3학년생인 현장실습생이다. 올 해는 경기불황과 사상 유례없는 취업난 여파로 실업계 고교에 대한 업체 의 현장실습 요청마저 부쩍 줄었다. 용환군이 다니는 서울공고의 경우 학 기 초부터 시작된 선생님들의 노력으로 대부분 학생들이 현장실습에 나가 고 있다. 조기취업 형태로 이뤄지는 현장실습은 실업고생이 예비 사회인 으로서 첫발을 내딛는 과정이다. 학생이 원할 경우 졸업 뒤 정식사원으로 취업할 수도 있다.

용환군은 지난 7월23일부터 같은 과 친구인 최도현(18)군과 함께 이곳에 서 일하고 있다. 종업원 26명을 거느린 중소업체인 이 회사의 이헌양 사 장도 역시 서울공고 출신으로 몇년째 모교 후배들을 현장실습생으로 받아 형이나 아버지처럼 보살피고 가르치고 있다.

(사진/인쇄업체인 로얄프로세스에 현장실습을 나온 서울공고 3학년 최용환(오른쪽)군이 인쇄기에서 나온 인쇄물을 검토하고 있다. )

이곳은 아침 8시30분부터 오후 5시30분까지 일한다. 용환군은 오늘도 독 산동 집에서 6시30분에 나와 버스를 타고 오전 8시 무렵 회사에 도착했다 . 작업복으로 갈아입은 뒤 바로 기계 앞에 섰다. 인쇄판을 인쇄기에 걸고 돌리면 기업 사보나 각종 카탈로그 등이 쏟아진다. 선배 직원들의 작업을 돕고 인쇄물을 나르다 보면 ‘이열치열’이란 말이 절로 실감난다. 이처 럼 땀을 쭉 빼고 난 뒤 근처 식당에서 직원들과 함께 먹는 점심은 그래서 꿀맛 같다. 하루 일이 모두 끝나면 공장 청소도 자청한다. 이렇게 하고 받는 보수는 월 65만원. 실습생 신분이라 많은 돈은 아니다.

용환군은 “학교에서는 식자기 같은 오래된 장비로 기본과정만 배웠는데 이곳에서는 매킨토시와 같은 첨단장비로 일해 조금은 손이 설다”면서 “ 하지만 이곳 직원 형님들이 친절히 가르쳐주고 새 장비도 배울 수 있어 좋다”고 말한다. “찜통 같은 열기만 빼고는” 말이다. 때문에 살을 좀 빼려고 동네 체육관에서 하던 권투연습도 거를 때가 많다.

“삐끼 일 하면 돈 더 벌지만…”

용환군은 “어려운 집안사정에 중학교 성적도 신통찮아” 일찌감치 공고 진학을 결심했다. 용환군의 아버지는 그가 초등학교 5학년 때 돌아가셨다 . 생계에 나선 어머니는 삼촌이 운영하는 공장에서 사무일을 보시다가 지 금은 쉬고 계신다. 용환군의 형은 상고와 직업학교를 나와 가리봉동의 한 방위산업체에서 일하고 있다.

애초 공고 입학 당시 건축과를 지망했으나 2지망으로 인쇄사진과에 들어 갔다. 착실하고 마음씨 착한 용환군은 반에서 10등 정도하는 모범생이다. 그는 지난 6월에는 평판제판 기능사 2급 자격증을 땄다. 내신성적에 자신 있는 그는 이번에 전문대 입시에 도전해볼 생각이다. 인쇄에 대해 더 공 부하고 싶기 때문이다. 전문대 주간학과에 합격하면 일을 그만두고 공부 에만 몰두할 생각이다.

용환군은 인문고에 다니는 친구들을 볼 때 “나도 공부를 좀더 열심히 해 서 인문고에 갔으면 좋은 대학도 갈 수 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고 털어놨다. 그는 그러나 자신의 선택에 만족한다. “실업고에 진학 해서도 열심히 하면 성적도 오르고 대학도 갈 수 있어요. 또 기술 하나는 확실히 배우니까 대학 안 들어가도 생계 걱정은 없지요. 기술만 있으면 어디 가든 먹고 살잖아요.”

용환군과 함께 현장실습을 하고 있는 도현군은 “인문고 갈 성적은 됐는 데 인문고 가서 밑에서 놀 바에야 기술을 배우기 위해” 공고에 진학했다 . 지금 일하고 있는 이 회사는 지난해 10월 학교 친구 10여명과 함께 아 르바이트를 한 인연이 있기도 하다.

검도와 수영, 헬스로 단련된 탄탄한 몸매에 무스를 살짝 발라 넘긴 도현 군은 모델 뺨치는 용모를 갖고 있다. 실제로 그는 연예인이나 모델이 되 는 꿈을 안고 잡지사나 광고사에 자신의 사진을 돌리기도 했으나 답신은 받지 못했단다. 광고모델 기획사에서 자신을 소개하는 카탈로그를 찍어야 하는데 돈이 만만치 않아 찍지 못한 게 아쉽기도 하다. 그는 스스로 “허 황된 꿈”이라고 말하지만 이 꿈을 완전히 포기하기에는 아직 미련이 남 아 있는 듯하다.

그래도 도현군은 자신의 선택에 “후회는 없다”고 단호히 말한다. “다 른 친구들이 그래요. 삐끼일도 잘하면 1백만∼2백만원은 벌고, 하다 못해 중국집 짜장면 배달도 한달에 1백만원은 버는데 왜 그런 힘든 일을 하느 냐고요. 하지만 걔들은 지금 당장만 바라보고 미래는 보지 못하는 거예요 . 한평생 삐끼나 짜장면 배달만 할 수는 없잖아요. 미래를 대비해야지요. ”

보충수업 받는 친구들 생각하면 답답

(사진/구미경양과 함께 실습을 나온 대진전자공예고 3학년 홍순포군이 한달간 익힌 솜씨로 혼자 컴퓨터 작업을 해내고 있다. )

공장장 김삼호(38)씨는 “비행이나 탈선이다 해서 요즘 청소년들이 말썽 만 일으키는 것으로 비쳐지지만 이들처럼 미래를 설계하며 땀의 의미를 배우려는 청소년들이 많다”고 말하고 “학생들이 찜통더위에 고생하는 것을 보면 안타깝기도 하지만 애들이 착하고 기특해 기술 하나라도 더 가 르치고 싶다”며 이들의 어깨를 다독였다.

지난 8월1일 서울 역삼동 SVAC코리아 사무실. 외국만화를 번역출판하는 업체다. 구미경(18)양은 사무실 안의 귀염둥이다. 1백71㎝의 훤칠한 키에 파마머리로 제법 예비직장인다운 멋을 낸 구양은 성격이 활달하고 붙임성 이 있어 함께 일하는 사무실 언니들의 귀여움을 받고 있다.

대진전자공예고 디자인과 졸업반인 구양이 이곳에서 일한 것은 지난 7월5 일부터다. 벌써 한달째 일을 하다 보니 이제는 현장실습생보다는 어엿한 직장인으로서의 모습이 더 눈에 띈다. 그가 하는 일은 만화원본을 스캐너 를 이용해 모니터에 띄운 뒤 대사와 의성어 등을 우리말로 바꿔넣는 것이 다. 학교에서 매킨토시 컴퓨터를 이용해 컴퓨터그래픽 등을 공부했지만 여기서는 단축키사용법 등 기초부터 시작해 실무를 차근차근 익혀나가고 있다.

구양은 애초 “숫자계산은 머리가 아파” 상고 대신 공고에 진학했다. 공 고 진학 뒤에 점차 디자인에 관심을 갖게 돼 열심히 공부했다. 그러다가 3학년 올라와서는 대학진학을 위해 공부하는 친구들이 부럽게 보이기 시 작했다. 구양은 이 회사의 면접을 보기 일주일 전까지도 전문대 미대 진 학을 목표로 입시준비를 했다. 산업디자인과에 진학하기 위해 미술학원에 도 열심히 다녔다. 그러나 수능모의고사 점수가 기대보다 신통치 않았다. 이러던 차에 평소 관심을 많이 기울여 주시던 담임선생님이 이 회사를 소 개해줬다.

“학교 다닐 때도 만화는 보지 않았지만 여기서 일하는 게 재미있어요.” 졸업한 뒤에도 계속 일할 생각이라는 구양은 내년쯤 전문대 특별전형을 통해 산업디자인과에 들어갈 생각이다. 그렇지만 지금도 무더운 여름날 콩나물 교실에서 보충수업을 받아야 하는 인문고 친구들을 생각하면 안타 까움이 앞선다.

“틀에 박혀 온종일 공부밖에 할 게 없잖아요. 게다가 그 학생들 모두 대 학에 들어갈 수 없는데도 모두 나와 머리를 싸매는 것을 생각하면 답답해 요.”

그래서 학창시절의 긴 여름방학보다는 직장에서의 짧은 휴가가 더 달콤하 게 느껴진다. 구양은 최근 4박5일의 휴가를 얻었다. 그나마 2박3일은 가 평에서 열리는 교회 수련회에 다녀왔다.

“내가 선택한 인생, 최선 다할래요”

구양과 함께 현장실습을 나온 홍순포(18)군은 와이셔츠에 넥타이 차림, 무스도 발랐다. ‘디자이너’라는 직함이 찍힌 명함을 내미는 홍군은 어 느 모로 보나 깔끔한 신세대 회사원이다. 날염기능사 2급 자격증을 가진 홍군도 이 일이 적성에 맞고 재미있어 졸업 뒤 여기서 계속 일할 생각이 다. 산업체 특별전형에 필요한 경력이 쌓이면 전문대에 들어가 멀티미디 어와 애니메이션을 공부할 생각이다. 하루 일과가 끝나면 가끔 남아 못다 한 작업도 하고 스스로 공부도 하는 열성파다. 여상에 다니는 홍군의 여 자친구는 대학진학을 목표로 입시학원에 나가 공부에 매달리고 있다. 이 때문에 일주일에 한두번 정도밖에 만나지 못하는 것이 아쉽기도 하다.

“대학진학을 위해 공부하는 친구들을 만나더라도 기죽는다는 생각은 전 혀 없어요. 자신이 선택한 인생에서 최선을 다한다면 누구나 동등하다고 생각해요.”

한여름 불볕더위 속에서 이들이 흘리는 땀은 시원한 소낙비처럼 느껴진다 . 뙤약볕을 받으며 속살을 채워가는 과실들처럼 이들의 꿈도 영글어가고 있다.

지창은 기자 한겨레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