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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하는 재벌/한진그룹 |
1997년07월31일 제 16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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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중훈(77) 한진그룹 회장은 요즘도 매일 아침 서울 소공동 해운센터빌딩 사옥에 있는 사무실로 출근한다. 팔십을 눈앞에 두고 있지만 거의 빠짐이 없다. 전과 달라진 게 있다면 출근시간이 종전의 오전 8시께에서 30분∼1 시간 정도 늦어졌다는 점이다. 한동안 건강이 안 좋다는 얘기도 있었지만 요즘에는 많이 호전됐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이미 4명의 2세들이 계열사 경영 전면에 배치돼 있고, 지난해 초에는 장남인 조양호(48) 대한항공 사 장이 그룹 부회장에 임명돼 그룹 경영을 실무적으로 총괄하고 있다. 그러 나 한진호(號) ‘조타수’로서 조 회장 역할에는 변함이 없다. 그는 그룹 내 주요 임원회의를 직접 주관하고 굵직한 현안에 대해서는 계열사 사장 들을 손수 불러 지시를 내린다. 그룹의 한 관계자는 “일상적인 것이야 각 계열사 사장들이 알아서 하지만 대규모 투자나 신규 항로 취항, 비행 기 도입 등 주요 사안에 대해서는 조 회장이 결재를 한다”고 말했다.
50년 외길, 수송사업에 대한 집념
조 회장은 평소 “창업자에게 은퇴란 없다”는 지론을 펴왔다. 지난해 발 간된 회고록 <내가 걸어온 길>에서는 “금전적인 수입이나 훈장보다 더욱 값진 소득은 어려운 일에 도전하여 성공을 거둔데 따르는 자신감과 성취 감”이라며 노익장을 과시했다. 대다수 그룹들의 창업주가 명예회장으로 물러나고 2, 3세 체제로 넘어가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지난 45년 중 고트럭 한대로 인천에서 사업을 시작한 조 회장은 지난 95년 말 창립 50 주년을 계기로 ‘수송보국’(輸送報國) 반세기를 달려온 감회를 피력하기 도 했다.
한진은 국내 재계순위 7위(자산규모 기준)로 21개의 계열사를 거느리고 있다. 계열사 대부분은 육·해·공을 망라한 수송물류사업에 집중돼 있다 . 육상운수는 좀 처지지만 항공과 해운은 부동의 국내정상의 자리를 지키 고 있다. 10조원에 가까운 그룹 매출의 70% 이상을 사람이나 화물을 실어 나르는 수송사업에서 벌어 들인다. 건설, 중공업, 금융, 정보통신 등 나 머지도 도로 건설이나 선박·철도차량 건조, 수송물류사업에 필요한 돈과 정보 제공 등 관련사업들이다.
“낚싯대를 여러 개 걸쳐 놓는다고 해서 고기가 다 물리는 것은 아니다. ” 조 회장의 낚싯대 경영철학은 한진이 반세기 동안 수송 외길을 달려올 수 있었던 밑바탕이다. “외식산업의 시장규모가 커지고 다른 대기업들이 너도나도 뛰어든다고 하니까 한 임원이 대한항공의 기내식 사업을 토대로 외식사업을 해보는 것이 어떠냐는 의견을 내놓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조 회장은 ‘내 사업은 수송물류’라며 간단히 말을 잘랐다.” 한 임원이 들 려주는 이 일화는 수송물류사업에 대한 조 회장의 집념을 잘 보여준다. 한진에는 ‘부실기업 인수의 명수’라는 달갑지 않은 지적도 따라다닌다. 대한항공공사(현 대한항공), 대한선주(현 한진해운), 대한조선공사(현 한 진중공업), 코리아타코마조선공업, 거양해운, 대한준설공사(현 한진종합 건설) 등 그룹의 주력사들이 모두 인수업체들인 데서 나온 말이다. 그러 나 모두 수송물류사업이라는 큰 테두리 안에 있고 상당수는 정부의 민영 화 방침에 따라 인수한 것이어서 문어발식 확장과는 성격이 다르다는 게 한진의 설명이다.
새 항공기 도입, 기종 현대화 나서
한진은 지난 95년 창립 50주년을 맞아 2005년에는 세계 10위권 안에 드는 초일류 수송물류그룹으로 발돋움한다는 10년 청사진을 제시했다. 비행기 보유대수는 2백50대, 선박은 3백척, 화물차량은 6천대로 각각 늘려 매출 액 60조원(지난해 10조원)을 달성한다는 야심찬 목표다. 한진은 올해 기 령이 오래된 비행기 8대를 퇴역시키는 대신 보잉777, 에어버스330 등 신 형 항공기 7대를 도입해 기종 현대화에 적극 나설 계획이다. 해운 분야에 서도 지난 2월 독일의 컨테이너 선사인 DSR-세나토사를 인수해 전세계를 포괄하는 글로벌 네트워크 구축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주)한진의 택배 사업과 정부가 곧 입찰에 붙일 LNG선의 한진중공업 수주 여부도 당면 현 안이다.
조 회장은 지난 5월28일 서울 공항동 대한항공 사옥(복합항공기지)이 준 공된 뒤 이곳을 1주일에 두번씩 정기적으로 들러 사업본부별 임원보고회 의를 직접 주재한다. 그룹 주변에서는 이를 두고 조 회장의 움직임이 최 근 들어 더욱 활발해졌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진짜 배경은 한진 이 당면한 어려움에서 찾는 것이 좀더 정확하다고 지적하는 이들이 많다. “아무래도 내가 직접 챙겨야겠다.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는 조 회장의 걱정이 바탕에 깔려 있다는 것이다. 한진은 지난해 그룹 전체로 1천9백여 억원의 적자를 기록했다. 그룹 경영조정실 임원은 “한진의 경우 육해공 수송분야가 차지하는 비중이 절대적이기 때문에 지난해처럼 수출부진으로 물동량이 줄어들면 바로 타격을 입게 된다”고 말했다.
지난해 한진이 부진을 보인 결정적 원인은 2천1백여억원의 적자를 낸 대 한항공 때문이었다. 경기불황으로 고통을 겪지 않은 기업들이 없었지만 대한항공은 바로 전년도에 1천억원의 흑자를 기록한 데다 우리나라를 대 표하는 항공사라는 점에서 충격은 더욱 컸다. 대한항공을 제외한 나머지 20개 계열사의 이익을 모두 합해봐야 2백억원에 불과하다는 점도 우려스 런 대목이다.
‘비행기표 청탁’도 요샌 별로 없다
대한항공이 한진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다. 매출 비중은 42%에 이 르고 전체 그룹 인력의 1/3인 1만5천5백명이 일하고 있다. 지난 69년 인 수 당시 프로펠러기를 중심으로 8대에 불과했던 보유 항공기는 이제 보잉 747 등 최신 항공기를 주축으로 1백14대(비운송용 제외)로 늘어났다. 여 객수송실적을 기준으로 세계 13위, 화물로 세계 3위인 세계적인 항공사다 .
대한항공의 실적은 곧 한진그룹 전체에 영향을 끼친다. 지난해 대한항공 이 큰 적자를 낸 것은 몇가지 요인이 겹쳤기 때문이다. 김영호 경영기획 실 이사는 “유가 급등으로 인한 비용 상승, 원화 약세에 따른 대규모 환 차손 발생, 자산재평가에 의한 감가상각비 초과 발생으로 수익성이 떨어 졌다”는 설명이다. 환차손만 1천2백98억원이 발생했다. 비행기 도입 등 으로 54억달러를 넘는 외화빚을 지고 있는 대한항공으로서 환율변동에 따 른 환차 발생은 불가항력적이지만 부채를 달러 이외의 다른 외국통화로 분산해 위험성을 줄이는 사전대응이 부족했다는 지적도 있다. 자산재평가 는 오래된 비행기를 팔 때 세금을 적게 내기 위한 절세 차원에서 이루어 졌지만 결과적으로 시기를 잘못 잡은 셈이 됐다. 자산재평가에 따른 추가 감가상각(1천4백억원)만 없었다 하더라도 적자는 7백억원 선으로 줄었을 것이다. 더 큰 문제는 대한항공의 경영이 올해도 크게 나아질 기미를 보 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대한항공은 올해 흑자전환을 목표로 하고 있지만 이미 상반기에만 2천억원 정도의 적자를 냈고 매출도 지난해 수준에 머물 러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예년 같으면 상반기 매출이 어느 정도 부진해 도 성수기인 7∼8월에 장사가 잘돼 큰 걱정을 안 했지만 올해는 사정이 다르다. 대한항공의 한 임원은 “예년의 경우 요즘 때면 비행기표를 구해 달라는 청탁이 쇄도해 괴로웠는데 올해는 부탁 자체가 별로 없다”면서 “경기침체의 영향이 큰 것 같다”고 말했다. 환차손은 하반기에 다소 개 선될 것으로 보이지만 상반기 수준으로만 잡아도 연간 1천억원을 넘을 전 망이다.
지난 6월에는 서울국제여객지점장과 국내여객지점장이 모두 자리를 바꾸 는 임원 인사가 단행됐다. 영업 부진에 따른 문책성이다. 또 서울∼나가 사키, 오이타, 구마모토 노선 등 적자를 보이고 있는 3개 일본노선도 잠 정폐쇄됐다. 항공사로서 노선폐쇄는 제조업으로 치면 생산품목을 없애는 것과 마찬가지다. 서울∼괌 노선도 주 13회에서 10회로 축소했다. 수익성 이 낮거나 적자를 내고 있는 일부 다른 노선들도 잠정폐쇄하거나 운항횟 수를 줄이는 방안이 검토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앞서 5월에는 직원임금 동결, 임원 5% 삭감 결정이 났다. 국내선 운임을 오는 8월11일 부터 평균 19% 인상하기로 한 것도 어려운 결정이었다. 대한항공은 아시 아나항공보다 20%나 쌌다는 점을 들어 운임 현실화라고 표현하지만 아시 아나와의 가격 차별화를 강조해 온 처지에서는 궁색해 보인다.
독점체제 때의 사고를 버려라
한진은 올 사업계획에서 지난해보다 20% 많은 12조원의 매출액과 항공· 해운·육상 등 주력업종을 중심으로 한 2조원의 투자 목표를 제시하고 내 실경영을 최우선 경영방침으로 천명했다. 또 순이익 1천5백억원 달성을 위해 △무리한 사업확장은 삼가고 △기존 사업의 내실과 안정을 기하며 △튼튼한 재무구조를 만들기로 했다. 그룹의 한 임원은 “지난해를 계기 로 경영방침을 성장위주에서 내실로 전환했다”면서 “수송물류와 밀접한 관련이 없는 부문의 투자는 가급적 억제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모든 비 용을 10% 줄이고 개인 회사별로 모두 생산성을 10% 높이는 데도 총력전을 펴고 있다. 그러나 그룹 내부에서는 아직도 위기의식을 절감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지적이 들린다. 대한항공의 한 임원은 “솔직히 과 거 20년 이상 누려온 독점체제 때의 사고나 행동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 하는 것 같다”고 말한다. 미국이 밀어붙이고 있는 오픈 스카이정책이 상 징하는 대로 더욱 개방된 세계무대에서 세계정상의 운송업체들과 생존경 쟁을 벌여야 하는 한진으로서는 21세기 수송물류 1백년을 성공적으로 열 어갈 수 있느냐 없느냐를 가름하는 전환기에 서 있는 셈이다.
곽정수 기자
© 한겨레신문사 1997년07월3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