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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
1997년07월31일 제 16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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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부도유예협약 대상기업 선정 이후 휴일에도 정상근무를 하며 자력갱생 의지를 보이는 기아자동차. 3자인수보다는 진정한 전문경영인체제가 바로 서도록 도와야 한다는 주장이 많다.)
기아의 실패는 전문경영인체제의 한계를 의미하는가? 그렇다면 소유분산 과 전문경영인체제, 업종전문화 등 정부의 대기업정책은 이제 휴지통으로 들어가야 하는가? 기아가 부도유예협약 대상기업으로 선정된 뒤 쏟아지는 질문들이다.
재계 일각에서는 벌써 기아의 실패를 ‘오너없는 기업의 운명’ 탓으로 돌리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기아사태의 당면과제는 9조5천억원의 거액을 빌려준 금융기관과 5천개를 넘는 협력업체의 연쇄도산을 막는 것이다. 그 러나 기아가 30대그룹 중 정부의 대기업정책 방향에 가장 근접했던 모범 생이라는 점에서 기아사태를 바라보는 시각은 향후 우리 경제에 적지 않 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또 기아를 자력갱생시켜 제2의 봉고신화 를 탄생시킬 것인지 아니면 제3자에게 넘길 것인지를 결정하는 데 중요한 판단근거가 될 수밖에 없다.
김선홍 회장은 ‘오너’에 가까운 경영인
결론부터 말하면 기아사태를 ‘전문경영인체제 실패=오너경영체제 승리’ 로 단정짓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것이다. 기아는 형식상 전문경영인체제를 갖추고 있지만 김선홍 그룹회장은 81년 창업2세인 김상문 회장이 경영부 실의 책임을 지고 물러난 것을 계기로 경영대권을 맡은 뒤 지난 17년 동 안 다른 재벌그룹의 오너와 같은 지위를 누려왔다. 김 회장이 봉고신화로 기아의 위기를 타개하고 오늘날 재계 8위의 대기업으로 키우는 데 공헌한 것은 부인할 수 없지만, 전문경영인체제의 핵심인 책임경영 원칙을 정착 시키는 데는 실패했다. 전경련의 이재우 산업연구실장은 “사내의 주총과 이사회, 사외의 적대적 기업인수와 채권 금융기관 등을 통한 견제장치가 제대로 작동해 책임경영이 구현될 때만 전문경영인체제의 장점을 살릴 수 있다”고 말한다. 책임경영이 확립되지 않는 한 오너의 전문지식 부족으 로 인한 기업성장 저해, 기업자금의 유용 가능성, 독선적 경영방식에 따 른 경영효율의 감소와 같은 약점을 지닌 오너체제에 비해 나을 것이 없다 는 것이다.
전문경영인이 기업을 사물(私物)화하는 것은 전문경영인체제가 일반화된 미국 등에서도 나타나는 문제다. 기아의 최고경영진은 새차개발에 과도한 투자비를 쓰고 전망도 불투명한 기아특수강에 1조원을 쏟아부어 그룹 전 체를 부실화시키고, 최근에는 내수시장에서 대우에 2위 자리마저 뺏겼음 에도 아무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었다. 지배권을 행사하는 대주주가 없다 는 점이 오히려 기아의 최고경영진이 반영구적으로 자리를 유지하는 수단 으로 악용된 셈이다. 따라서 기아의 경우만으로 전문경영인체제를 평가하 는 것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포철이 한때 기아에 철강공급을 중단 한 것도 “김 회장을 포함한 현 경영진이 그대로 있는 한 정상화는 어렵 다”는 정부의 강력한 경고라는 해석이 나오는 것도 이런 맥락 때문이다. 기아가 전 계열사 임원의 30%를 감축하는 강도높은 자구책을 내놓자 포철 은 즉각 공급을 재개했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의 유승민 박사는 “소유 지배권이 없는 전문경영인 이 경영부진 속에서도 살아남으려면 필연적으로 사내에 ‘정치’ 요소가 자라게 된다”고 지적한다. 능력과 실적보다는 줄서기에 의해 인사가 이 뤄지는가 하면 자리보전용 임원이 다른 기업보다 훨씬 많고, 노조의 요구 에 수세적으로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 모두 ‘정치’의 부산물이다.
기아가 오너를 총수로 하는 재벌그룹들에 포위돼 있었다는 점도 중요한 대목이다. 기아의 전문경영인체제는 진공 속에 존재한 것이 아니라 평균 27.3개의 계열사에 19개에 가까운 업종을 영위하고 있는 오너그룹들에 의 해 끊임없이 시달려 온 것이다. 재벌그룹 소속 자동차회사들이 일상적으 로 계열사들의 지원을 받고 있고 일시적인 어려움을 겪더라도 다른 계열 사로부터 직·간접적 도움을 받아 회생해 온 반면 기아는 이런 혜택을 전 혀 받지 못했다. 일부에서는 계열사가 28개에 이르는 기아가 다른 재벌처 럼 선단식 경영을 한 것 아니냐는 지적도 있지만 자동차 관련부분이 전체 그룹 매출액의 90%를 넘는다는 점에서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이종 대 기아경제연구소장은 “제조 건설 금융 유통에 이르는 수십개의 계열사 끼리 상부상조하는 다른 그룹들과 경쟁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고 말한 다. 검찰 조사 결과 삼성자동차 보고서 파문이 삼성쪽의 잘못이 아닌 것 으로 결론이 났지만 결과적으로 기아가 흔들리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됐다 는 점에서 기아의 어려운 처지는 쉽게 이해된다. 재벌그룹들이 보유하고 있는 금융기관을 통해 자금조달에서 엄청난 혜택을 누리고 있는 것이 엄 연한 현실이다. 기아의 한 임원은 “4∼5월 두달간 제2금융권의 요구로 상환한 돈만 5천억원에 달한다”면서 “다른 그룹처럼 금융기관 하나만 갖고 있었더라도 이런 비극은 없었을 것”이라고 한탄했다. 삼성차가 자 동차 한대 만들지 못하고 있는 처지에 2조원 이상의 투자를 하고서도 버 티고 있는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경영구조보다 과잉투자가 실패 원인
전문가들은 이런 점에서 기아사태를 전문경영인체제의 패배 또는 오너체 제의 승리로 단정짓는 것은 아전인수라는 지적이 지배적이다. 한보와 삼 미, 진로가 부도로 쓰러지거나 부도유예협약 대상으로 선정된 이유가 바 로 외부빚에 의존해 과잉투자를 한 ‘오너의 실패’에 있기 때문이다. 정 부도 기아사태의 직접적인 원인을 경영구조나 소유구조상의 문제보다는 차입금에 의존한 과다투자와 자동차산업의 경기부진에서 찾고 있다.
기아사태를 계기로 일각에서는 정부가 앞으로 기존 대기업정책을 인위적 으로 강요하기가 힘들어진 것 아니냐는 지적도 있다. KDI의 유 박사는 “ 전문경영인체제와 오너체제 모두 장단점이 있는 만큼 선택은 기업에 맡기 는 것이 바람직하다”면서 “정부로서는 금융개혁, 규제완화, 경쟁촉진, 기업퇴출제도 개선 등 제도적 인프라 마련에 중점을 둬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뒷짐진 정부, 자력갱생 적극 지원해야
물론 정부의 인위적 강요에 반대하는 이들도 기업들이 창업주시대에서 2 ∼3세 체제로 넘어가고 경쟁압력이 가중되면서 경영효율을 높이기 의해 장기적으로 전문경영인체제를 택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데는 대부분 동 의한다. 그러나 정부가 기아사태에 뒷짐을 지고 있는 듯한 태도를 보이고 ,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기아의 대주주인 포드와 접촉했다는 설이 나오 면서 재계 일각에서는 삼성으로의 인수 시나리오가 이미 세워진 것 아니 냐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정부나 채권단으로서는 기아의 3자인수를 서두 르기보다는 대대적인 경영진 물갈이와 좀더 강도높은 자구노력을 통한 자 력갱생을 유도해 진정한 전문경영인체제의 모델이 되도록 하는 것이 순서 일 듯싶다.
곽정수 기자
© 한겨레신문사 1997년07월3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