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점
1997년07월31일 제 168호 한겨레21

<한겨레21>은 국가기밀?

(사진/국가기밀이 된 <한겨레21> 창간호 기사. 지난 7월17일 대법원의 판결에 따라 국가보안법상의 국가기밀에 대해 엄밀한 개념 규정과 엄격한 법 적용이 이뤄져야 한다는 법조계의 여론이 높다.)

당신은 <한겨레21>을 열심히 읽는 독자인가. 그렇다면 당신은 국가보안법 상의 국가기밀을 열심히 수집·탐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겨레21> 기사가 국가기밀인가’에 대한 재판이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재 판은 지난 7월17일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이돈희 대법관)가 “국가보안 법상 ‘국가기밀’은 일반인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은 사실로 국가안전에 위험을 초래할 만한 실질적인 가치가 있는 것으로 제한해야 한다”는 내 용의 판결을 내린 직후에 이뤄지는 것이라 더욱 주목을 끌고 있다.


창간호 일부 기사가 국가기밀로 둔갑

지난 90년 독일로 유학간 박아무개(35)씨 부부는 현지에서 알게 된 독일 교포 김아무개씨가 가끔씩 집으로 놀러와 정기구독하고 있는 <한겨레21> 을 함께 본 적이 있다. 수사당국은 지난해 일시귀국한 박씨 부부를 구속 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했다. 수사당국은 김씨가 간첩이며 따라 서 보안법 위반 혐의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김씨가 간첩이라는 수사 당국의 주장은 박홍 전 서강대 총장을 제발로 찾아간 자칭 ‘자수간첩’ 한병훈씨 부부의 진술에 따른 것이었다.

박씨 부부의 혐의는 국가보안법상 간첩, 금품수수, 잠입, 찬양·고무, 회 합 등이었다. 1심 결과 부인 이아무개씨는 집행유예로 풀려났으나, 같은 혐의였던 박씨는 ‘징역 3년6월 및 자격정지 3년’의 실형을 선고받아 현 재 서울고등법원에서 2심재판이 진행중이다. 박씨의 혐의 가운데 눈에 띄 는 것은, 박씨가 독일에서 김씨에게 ‘제공’했다는 <한겨레21> 창간호 기사가 국가기밀이라는 점이다. 1심 재판부는 <한겨레21> 창간호 가운데 “북에 협상용인가, 한국압박용인가”와 “당신도 상도동인가” 등 2개의 기사에 대해 국가기밀성을 인정했다. 전자의 기사는 94년 북-미 핵협상 미국쪽 대표인 미국무부 동아시아 태평양 담당 차관보 토머스 허바드가 국가보안법 철폐를 희망하는 연설을 한 진의는 무엇인가에 관한 것이고, 후자는 청와대 비서실 직원의 신분사항을 정리한 내용이다.


같은 내용 언급한 다른 잡지는 문제 없어

이 기사들은 이미 일간지 등에 대부분 나온 기사를 정리한 것으로, 언론 에 민감한 대한민국 국민이면 다 알 수 있는 내용들이다. 국가기밀이라고 불리기에는 내용이 너무나 상식적이다. 또하나 이해하기 힘든 부분은, 박 씨가 김씨에게 수집해 줬다는 <신동아>나 <월간조선> 등 다른 시사잡지에 대해서는 문제삼지 않고 <한겨레21>과 <말>만을 거론한 점이다. 부인 이 씨도 “한국의 신문과 잡지를 모아 파는 독일 합동보급소 등에서 쉽게 구 할 수 있는 시사주간지인 <한겨레21>의 내용을 굳이 수집·탐지할 이유가 있는가”라고 말했다.

한편 박씨 부부 사건에 대한 선고공판은 7월31일 열린다. 이번 판결은 과 연 대중적인 시사주간지에 실린 기사가 국가기밀에 해당하는 것인지에 대 한 판단과 함께 17일의 대법원 판례가 앞으로 하급법원의 판결에 어떤 영 향을 미칠지 가늠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의 대법원 판례는 국가기밀에 대해 “반국가단체에 대하여 비밀 로 하거나 확인되지 아니함이 대한민국의 이익을 위하여 필요한 모든 정 보자료로서, 순전한 의미에서의 국가기밀에 한하지 아니하고 정치·경제 ·문화·사회 등 각 방면에 관한 국가의 모든 기밀사항이 포함되며, 그것 이 국내에서의 적법한 절차 등을 거쳐 널리 알려진 공지의 사항이라도 반 국가단체인 북한에게는 유리한 자료가 되고 대한민국에게 불이익을 초래 할 수 있는 것”이라고 규정했다. 이에 따라 지금까지의 국가보안법 사건 에서는 국가기밀을 무리하게 확대해석한 이 판례에 따라 △당연한 경제질 서의 기본원칙에 관한 사실 △국내 상식에 속하는 사실 △이미 보도된 사 실이라도 우리나라에 군사상 불이익이 될 수 있는 일체의 사실들을 모두 기밀이라고 인정해왔다.

그로 인해 과거에는 웃지 못할 국가기밀과 군사기밀 사건이 수시로 발생 했다. 1967년 한 사건에서는 “남한에서는 쌀값이 수시로 변하고 농촌에 서는 돈만 있으면 물건은 얼마든지 살 수 있고, 돈 있는 사람은 잘살고 돈 없는 사람은 못산다”는 말이 군사상 기밀 누설로 인정됐다. 1977년에 는 “여수호남공장은 밤에도 불꽃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야간에도 가동하 고 있다”거나 “일반 민원창구는 급행료라는 것이 있어 급행료만 주면 민원사무가 빨리 처리되고 급행료를 주지 않으면 잘 처리되지 않는다”는 말도 기밀로 둔갑했다.

한편 대법원은 올 들어 국가기밀에 대한 국가보안법의 규정이 현실을 제 대로 반영하지 못했다는 사법부 안팎의 비판이 거세지고 하급법원에서도 대법원의 판례를 뒤집는 판결이 잇따르자, 17일의 판결에서 기밀의 범위 를 일정 수준 제한했던 것으로 보인다.


국가기밀 누설죄 적용 엄격해야

헌법재판소는 이미 지난 1월 이 조항에 대해 “군사상 기밀 또는 국가기 밀을, 일반인에게 알려지지 않은 것으로 내용이 누설될 경우 국가안전에 명백한 위험을 초래한다고 볼 만큼의 실질적 가치를 지닌 사실, 물건 또 는 지식이라고 해석하는 한 헌법에 위배되지 아니한다”는 한정합헌 결정 을 내린 적이 있다.

전문가들은 이와 관련해 “대법원 판결과 이번 사건을 계기로 국가기밀에 대한 엄밀한 개념규정이 이뤄져 이 조항의 자의적인 적용이 사라져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법조계에서는 국가기밀의 요건을 △국가기관 또는 이와 관련 있는 단체나 기관에 관한 것 △언론매체 등에 의해 이미 일반인에게 알려지지 않은 것 △기밀을 보유한 주체가 외부에 노출하지 않도록 상당한 노력을 기울여 일반인의 일상적인 접근방법으로는 탐지될 수 없는 비밀성이 있는 것 등으로 구체화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김창석 기자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07월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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