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이야기
1997년07월31일 제 168호 한겨레21

행복은 성적 바깥에도 있다

(사진/연기학원에서 담을 흘리는 10대들. 이들이 흘리는 땀은 단지 화려함만을 쫓는다는 편견과 손가락질을 거부한다.)

7월18일 오후 8시30분, 서울 여의도 백상빌딩 5층 MTM 강의실은 시끄럽다 . 방송연기자를 꿈꾸는 학생들로 가득 찬 교실은 쉴새없는 재잘거림으로 가득했다. 지도교사의 “Q”사인이 떨어지자 학생들은 각 조별로 자신들 이 직접 작성한 시나리오에 따라 전철 안에서 벌어지는 상황들을 연기한 다. 아직은 설익은 몸짓, 입으로 웅얼거리는 불분명한 대사였지만 ‘정말 열심이구나’라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다들 신이 나 있었다. 교실 위 쪽 벽에는 김소연, 정준, 김정현 등 이 교실을 거쳐간 이들의 사진이 쪼 르르 걸려 있었다.


꿈을 찾는 길 이루지 못해도 보람

성진(17·ㅎ고 2)이는 “어렸을 때부터 연기자의 꿈을 키웠다”고 했다. 진영(17·여·ㅅ여실 2)이는 “여러 가지 인생을 경험할 수 있다는 점이 마음에 끌려 연기자를 지망한다”고 했다. 익건(17·ㅇ고 2)이는 집이 수 원이다. 오후 7시30분부터 시작하는 학원수업(2시간)을 받기 위해 서울에 왔다 집에 돌아가면 밤 12시다. 그래도 “지금 너무 행복하다”고 말했다 .

서점에서 시나리오 대본을 사서 혼자 연습도 하고, 거울을 보고 표정연기 도 해보고, 드라마를 보다 마음에 드는 배역이 있으면 그대로 따라하기도 한다. 성진이는 멜 깁슨을, 익건이는 커트 러셀을, 진영이는 고소영과 최 진실을 좋아한다. 고소영을 닮았다는 말에 진영이는 배시시 웃었다. 살짝 보조개가 들어가는 것까지 고소영을 닮긴 닮았다. 하지만 이들도 걱정은 많다. 스타를 꿈꾸지만, ‘이러다 마는 건 아닌지’ 하고 생각하면 가슴 이 답답하다. 이들은 입을 모았다. “내가 원해서 택한 것이고, 비록 원 하는 연기자가 되지 못하더라도 절대 후회는 없을 것”이라고. MTM 수강 생 3백50여명 중 중고생은 1백80여명(6개반). 이런 연기학원이 서울에만 약 10곳 정도 있다.

백댄서팀 ‘신세대’에서 활동하고 있는 재현(18·ㄷ공고 3)이는 프로다. 지난해 8월23일(날짜까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 들어왔다. 재현이의 하루 일과는 아침에 학교에 잠시 들렀다가 오전 10시 연습실로 나와 오후 7시까지 연습, 연습, 연습. 그리고 그 이후에 또 혼자서 개인연습. 그것 이 밤 10시까지 이어진다. 텔레비전 무대는 한달에 20번 가량 선다. 거울 에 비쳐지는 자신의 춤추는 모습을 보면서 스스로 너무 멋있다고 생각할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재현이의 꿈은 유명 백댄서를 거쳐 뮤지컬 배우를 하고, 나이가 들면 무용단(백댄서팀)을 직접 만들어 운영하는 거다. 지금 어려운 점. 너무나 많다. 학교에서 매번 조퇴허락을 맞는 것도 쉽진 않다 . 외아들에 넉넉지 않은 가정형편도 가끔 마음을 무겁게 한다. ‘내가 이 러다 나중에 아무 것도 안 되면 어떡하나’ 같은 걱정이 새록새록 피어날 때도 적지 않다. 그래서인지 올봄 전자기기 기능사 2급도 따뒀다. 1학년 땐 전자과(電子科) 1등을 하기도 한 그였지만, 지금은 25등으로 뚝 떨어 졌다. 그래도 좋다. 불교신자인 어머니가 걸어준 卍자 목걸이를 걸고서 그는 오늘도 춤을 춘다. 이런 백댄서 그룹은 서울에만 약 10여개 팀이 있 다. 그들을 다 합하면 대략 5백여명 정도이고, 이중 절반은 10대다. ‘신 세대’팀에도 한달에 10명 정도가 문을 두드리지만 이중 6개월 이상 버티 는 이는 10명 중 1명도 안 된다. 그래서 재현이처럼 끝까지 남는 친구들 은 정말 드물다.

보람(16·여·ㄱ여산)이는 여성로커를 꿈꾼다. 중3 때 접한 록그룹 크래 쉬가 계기였다. 지난해 중3 여름방학 땐 10대 록그룹 보컬을 잠깐 하기도 했는데 두달 만에 해체됐다. 1시간에 1만6천원씩 하는 신림동 지하연습실 에서 여름 내내 너바나, Off-Spring의 노래를 부르고 또 불렀다. “영어 로 외우는데 머리 뽀개지는 줄 알았다”고 한다. 비록 무대엔 한번도 서 보지 못했지만, 연습실에서 노래할 때 보람이는 수많은 관객 앞에서 노래 를 하는 것 같은 기분에 빠져, 마치 구름 위를 둥둥 떠다니는 것 같았단 다. 보람이는 “만날만날 음악만 듣고 싶은데 학교 있는 동안은 음악을 못 들으니까, 학교 그만두고 낮엔 아르바이트로 돈 벌고, 밤에는 음악을 할까” 생각도 했다. 그러다가 “엄마한테 맞아죽는 줄 알았다”고 한다. 이번 여름엔 기타학원에서 전자기타를 배우고, 내년엔 직접 록그룹을 만 들 작정이다. 보람이 외에도 록그룹을 꿈꾸는 10대는 많다. 껌, 해피 아 우어스, 스팀 포테이토, 압력밥솥 등 10대들 사이엔 조금씩 알려진 그룹 들도 꽤 된다.


영화감독이 꿈 걸림돌은 부모반대

(사진/가수 뒤에서 춤을 추는 백댄서도 10대들에게는 인기직종이다.)

세진(18·ㅇ고 3)이는 학교 영화동아리 회원이다. 그는 영화를 보면서 감 상노트를 쓰는데 줄거리와 함께 특징적인 화면들을 분석한다. 지금은 3학 년이어서 입시공부에 열심이다. 중앙대 영화과를 목표로 하는 그는 대학 에서 촬영을 전공하고, 폴란드 국립영화학교로 유학갈 계획도 세워놓고 있다. 그래서 영화감독이 되는 게 꿈이다. 그런데 집에선 반대다. 당장 대학 학과선정에서부터 갈등이 예상된다.

경아(16·여·ㄱ고 1)는 하이텔 영화동아리 ‘시네마천국’ 회원이다. 영 화에 취미를 붙인 건 중학교 1학년 때. 한달에 1∼2번 영화관을 찾고, 비 디오는 1주일에 한편 정도 본다. 미성년자 관람불가 영화도 보고 싶은 건 본다. 영화잡지도 구독한다. 하지만 장래에 영화일을 하겠다는 건 아니다 . 그냥 영화를 좋아할 뿐이다. 경아는 영화를 보면서 사람들 살아가는 것 을 보고, 이것저것 많이많이 생각한다.

하이텔 영화동아리 ‘시네마천국’ 회원은 약 6천여명, 이중 20%가 10대 다.

세일(15·ㅇ중 3)이는 컴퓨터 도사다. 컴퓨터를 껴안고 산다. 초등학교 2 학년 때 선물로 받은 286컴퓨터로 컴퓨터 인생이 시작됐다. 초등학교 5학 년 때부터 통신을 시작했고, 애니메이션, 게임동호회에 들었고, 인터넷 1 0대 사이트인 ‘CH 10’ 기자이기도 하다. 학교와 학원수업을 모두 끝마 친 밤 11시부터 그의 컴퓨터 power에 불이 들어온다. 그리고 그때부터 새 벽 2시까지 통신을 한다. 통신에선 나이, 출신성분, 사회적 지위 아무 것 도 따지지 않는 게 좋단다. 조만간 프로그래밍도 배워볼 생각이다. 장래 희망? 아직은 잘 모른다. 세일이는 공부도 잘한다. 전교 10등권이다. 한 때 컴퓨터에 너무 빠져 학교를 그만둘 생각을 하기도 했다. 지금은 부모 님의 설득으로 중학교는 졸업할 생각이지만, 고등학교는 진학하지 않고 검정고시를 거쳐 1년 정도 일찍 대학에 가고, 여행을 많이 다녔으면 하는 게 바람이다.

선영(16·여·신림고 1)이는 서태지기념사업회(서기회) 회원이다. 그렇지 만 꿈이 서태지 같은 가수가 되는 건 아니다. 선영이는 기자가 되고 싶어 한다. 그래서 보라매청소년회관 ‘홍보연합’에 들어가 신문 만드는 것을 배우고 있고, 사회과목도 열심히 공부하고, 책도 많이 읽고, 글도 많이 쓴다. 기자가 되려는 이유는 청소년을 대변하고, 청소년 문화를 제대로 이야기해줄 수 있는 기자가 꼭 필요하다는 생각에서였다. 지난 1월 서기 회에서 합법적으로 마련한 야외행사를 “사고날지 모른다”는 이유로 훼 방놓고, 몰래 앰프의 전선을 자르는 야비한 짓을 하는 어른들을 보고 생 각을 더욱 굳혔다. “어른들은 우릴 못 믿는다. 믿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 문화를 안 좋게 보는 거다”라고 선영이가 말했다. 미래를 살아갈 10대들 은 이처럼 꿈이 많다. 그리고 그 꿈은 과거를 살아온 어른들의 것과는 다 를 수 있다.


어른들은 우리를 못 믿는다

남녀가 벼락을 맞아 몸이 뒤바뀐 청소년 영화 <체인지>의 마지막 장면엔 록가수를 꿈꾸는 대호(김소연)가 학교축제 때 클래식 음악회만을 주장하 는 학교쪽에 맞서 몰래 록무대를 꾸미는 게 나온다. 아이들이 잠오는 피 아노 연주보단 록축제에 흠뻑 빠진 건 당연. 하지만 뒤따라온 ‘미친 개 ’(이경영, 학교 선생님 별명)가 난리를 친다.

그런데 영화에는 ‘미친 개’가 하나뿐인데, 우리 사는 세상에는 ‘미친 개’가 너무 많다. 그리고 그저 자기 학교, 자기 반 아이들 사고 안 치기 만을 바라는 ‘온순한 개’도 너무 많다. 아이가 어떤 길을 가든지 말든 지는 그건 알 바 아니다. 제발 나 있는 동안 사고 치지 말기를…. 그리고 청소년들. 자기가 하고 싶어하는 것 하지 못하는 데 대해 어설픈 핑계 대 지 맙시다. 그건 용기가 없어서일 뿐인데.

권태호 기자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07월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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