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읽기
1997년07월31일 제 168호 한겨레21

과학기술에 시민은 있는가

7월15일 국회의사당 앞에서 전자주민카드 시행을 위한 주민등록법 개정에 반대하는 시민단체들의 항의시위가 있었다. 그리고 다음날인 7월16일에는 종로성당에서 인간복제연구를 비롯한 생명공학의 사회적 문제점에 대한 시민사회단체의 토론회가 개최되었다. 이 두가지 일은 얼핏 보면 서로 무 관한 듯하지만, 문제의 원인과 성격 그리고 예상되는 결과 면에서 근본적 으로 동질적인 내용을 지닌다고 보인다.

내무부가 95년부터 계획하고 추진중인 전자주민카드는 이번 법 개정이 끝 나면 98년 4월에 제주도부터, 그리고 99년 10월에는 전국에 걸쳐 본격적 으로 실시될 예정이다. 행정의 편의와 효율성을 내세워 이를 추진하는 정 부에 대해 여러 시민단체에서는 프라이버시권의 침해와 시민통제의 위험 성을 이유로 1년 전부터 공동대책위원회를 만들어 조직적인 저항에 나섰 다. 한편 그동안 우리나라에서는 아무런 규제없이 성장해왔던 생명공학기 술은 복제양 ‘돌리’ 사건으로 시민의 우려가 커지면서, 지난 4월22일 보건복지부가 ‘유전자재조합실험지침’을 서둘러 마련하여 7월22일부터 시행에 들어간다고 발표하였다. 아울러 과학기술처를 중심으로 생명공학 의 윤리에 대한 대책 강구도 논의되고 있는 중이다.

정보기술과 생명공학은 근대문명의 발전이 20세기 말에 낳은 과학기술의 양대 총아다. 그것은 전대미문의 물질문명 발전을 약속하지만 동시에 ‘ 전자감시사회’와 ‘인간복제사회’라는 재앙을 암시하기도 하는 모순된 모습으로 인간에게 다가오고 있다. 문제는 우리나라에서 이러한 첨단 과 학기술의 도입이 그동안 시민들의 아무런 동의 없이 정부, 과학기술자, 기업간의 3자연합에 의한 의사결정 독점에 의해 이루어져 왔다는 사실이 다. 시민은 단지 이들이 결정한 과학기술정책의 홍보 대상이거나 과학기 술 산물의 수동적 소비자 구실을 해왔을 뿐이다. 미래 사회의 모습을 결 정하는 데 있어 법이나 정치 못지 않게 중요한 과학기술에서 시민은 소외 된 존재였다.

과연 엘리트들이 상정하듯이 시민은 과학기술에 대해 본래 무관심하고 무 능한가? 그렇지 않다는 예가 유럽에서 최근 발전된 ‘합의회의’(consens us conference)에 의해 증명되고 있다. 이는 정치·사회적으로 쟁점이 되 는 과학기술적 주제에 대해 비전문가인 보통사람들이 주도하여 전문가와 조직화된 공개토론을 하고 이를 통해 정리된 견해를 매스컴에 발표함으로 써, 시민사회의 여론형성과 정책결정에 영향을 미치려는 시도이다. 87년 덴마크에서 시작된 이 제도는 이미 70년대 초부터 서구에서 전개된 ‘기 술영향평가’(Technology Assessment)의 새로운 방법론으로 환영을 받으 면서, 최근 네덜란드와 영국 그리고 미국으로 확산되고 있다.

과학기술에 참여민주주의를 도입하려는 이러한 합의회의에서 가장 빈번하 게 다뤄지는 주제가 바로 생명공학과 정보통신기술이다. 흔히 엘리트들은 이러한 시민참여가 비효율성을 낳는다고 꺼리는 경향이 있으나 핵발전소, 쓰레기소각장, 경부고속철도 등이 초래한 사회적 비용과 갈등을 고려할 때 오히려 사전에 시민의 평가와 동의를 구하는 것이 안전하고 효율적인 길이 될 수 있다. 또 이런 경험을 통해 과학기술은 시민에게 친근한 것이 되고 전문가와 비전문가간의 거리가 좁혀질 뿐 아니라, 사회적 토론의 활 성화로 민주적이고 다원적인 시민문화의 성숙이 촉진되는 효과도 있을 것 이다. 만일 지금처럼 과학기술정책이 엘리트집단에 의해 폐쇄적으로 결정 된다면 과학기술사회가 될 21세기 우리나라의 과학기술 자체를 위해서도, 그리고 민주주의를 위해서도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김환석/국민대 교수·사회학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07월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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