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과학과 지성 |
1997년07월31일 제 168호
|
|---|
민속학자 주강현씨가 <주강현의 우리문화기행>이란 제목의 문화답사기를 펴냈다.
주씨는 지난해 한국인·한국문화의 원형을 탐구한 책 <우리문화의 수수께 끼>가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졌다. 그는 ‘두레 연구 ’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지금까지 모두 17권이란 적지 않은 저작을 냈지 만, 대중적인 문화답사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게다가 그는 이 17번째 책 의 제목에 자신의 이름을 내세웠다. 출판사의 상업적 고려가 없지 않았겠 으나 지은이는 “우리 문화의 포교사를 자처해온 책임을 입장에서 지겠다 는 뜻”이라는 당당한(?) 태도를 굳이 감추지 않는다. 사라져가는, 또는 화려한 조명에 비켜서 있는 소박한 생활 문화의 현장을 발굴·기록해온 그로서는 이 ‘문화답사기’에 무언가 새로운 자기만의 관점을 제시했다 는 의욕이 넘쳐보인다.
문화인류학적·민속학적가치 뛰어나
어쨌든 문화답사기들은 차고 넘친다. 개중에는 탁월한 인문기행의 진수를 보이는 것도 많다. 대표적으로 미술사가 유홍준 교수의 <우리문화유산답 사기>처럼 우리에게 미술사적·문화사적 안목을 높여준 훌륭한 책들도 있 지만, 주강현씨의 이 책은 문화인류학적·민속학적으로 여행기에 접근한 점에서 차별성을 갖는다. 그리고 이 책을 우리가 주목하는 의의도 여기에 있다. 그저 기존의 답사기에 비슷한 또 하나를 더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 우리의 문화여행도 그 폭과 깊이에서 새로운 길을 필요로 하는 시점에 이 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지은이의 발길을 따라 가노라면 이 여행이 단순히 유적과 유물 을 보고, 해석하고,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 여행 에서 유적과 유물은 부차적이다. 우리가 먼저 만나는 것은 민중의 생활이 고, 생활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어온 자연생태이고, 현장에 깃든 사람들의 역사이다. 지은이가 “이 책을 쓸 때 나는 보고 오는 여행이 아니라 느끼 고 오는 여행의 참맛을 목표했다”고 한 말은 적어도 이 책이 택한 소재 와 주제를 감안할 때 확실히 새로운 여행 전략이라는 점을 인정케 한다. 말하자면 우리의 인문학적 여행은 이제 유형의 문화유산에 대한 ‘점고 의식’에서 나아가 우리 문화의 뿌리와 정신의 흔적, 그리고 오랜 풍상 속에서 형성된 생활사의 자취를 더듬어 우리의 원형과 그것이 오늘에 주 는 의미를 캐도록 하는 것이어야 할 때가 되지 않았나 하는 것이다. 아마 도 “인문학적 여행”이란 지은이의 표현도 이를 말하는 것이리라.
이 책에서 여행은 그렇게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의 순환처럼 한반도의 오랜 시간을 순환하고 있다. 그 순환에 따라 답사 장소가 배치되고, 만나 야 할 옛사람의 흔적이 정해지고 있다.
각 시대의 뒤안길에서 역사의 수레바퀴를 밀어온 이름없는 장삼이사의 선 조들과 나누는, 시간을 초월한 대화는 낙도의 울창한 숲과 마루 밑의 수 레바퀴, 강물 속의 쏘가리와 늪지의 밤나무, 마을의 신당과 고찰, 백제의 유허와 수원의 화성, 어촌의 독살과 절간의 구도행위를 통해 끊어질듯 이 어져 간다. 이런 여행은 이름난 명승·고적에서 우리 문화의 찬란함에 자 부하고 또 사라져버린 그 흔적을 아쉬워하는 긍지와 한탄의 습관적인 역 사인식에서 우리를 잠시 벗어날 수 있게 해준다.
외딴섬이 머금고 있는 우리문화의 기원
지은이는 서해의 한 섬 외연도에서 ‘황금가지’를 찾는다. 황금가지는 인류학의 비조 프레이저가 인류 신화의 기원을 찾은 키워드. 지은이는 수 백년 아니 천년을 넘도록 울창한 한반도 한 외딴 섬 숲속에서 우리 문화 의 기원을 본다. 숲을 지키고 숲을 통해 살림의 번창을 기원하는 마음으 로 산 소를 숲에 제물로 바치는 고대적 제의에서 지은이는 살아 있는 신 화를 발견한다. 그곳에는 거창한 사찰도 유명한 탑도, 빼어난 유물도 없 다. 있다면 숲과 사람들, 그리고 사당의 신이 된 역사 혹은 전설이 띄엄 띄엄 의미와 느낌을 좇아오는 드문 나그네들을 물끄러미 맞이할 뿐이다. 그래서 외연도 기행은 여행의 맨 앞머리를 장식하며 전체 여행기의 의의 를 관장한다.
지은이는 신화의 다음 여로로 섬진강을 택하고 강변 구례 마을의 한 고택 마루 밑에서 “산 채로” 보관된 수레바퀴를 본다. 민속관이나 심지어 카 페의 장식용으로도 쉽게 볼 수 있는 수레바퀴가 굳이 새로울 것은 없으나 , 자기가 쓰이던 곳에서 쓰임을 다한 채로 수명을 놓은 모습은 고향 언저 리에 묻힌 농부나 선비의 모습과 다를 것이 없다. 그것은 역사의 바퀴라 는 형용에 동원될 것이 아니라 한때 여기 사람의 삶을 밀고 끈 살림의 바 퀴로 상징되는 것이 옳다. 섬진강의 바퀴는 또 은어다. 은어의 모천회귀 와 섬진강 사람들의 낳고 죽음과, 일출과 일몰…. 그 윤회의 땅을 거쳐 지은이는 지리산 반야봉 남쪽의 칠불암 아자방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눈 푸른 납자가 해탈을 기원하며 천천히 마당을 돌고돌아 형성된 암자 앞마 당의 원 또한 보는 이의 가슴 속에서 “문화는 살아있다”고 신음하듯 말 하게 한다.
지은이는 이렇게 남해안의 남해 금산과 정여립의 죽도와 진안의 오지를 더듬고, 아득한 선사시대 슬기사람, 슬기슬기사람(호모 사피엔스 사피엔 스)들이 살았던 남한강변의 ‘황금동굴’로 들어간다. 그리고 동굴에서 걸어나온 우리는 수천년 한반도의 ‘황금연못’이었던 서해바다와 개펄, 그 바다를 떼지어 다니며 마침내 신이 돼버린 ‘황금 조기’를 만나게 된 다.
여행은 또 국파의 와중에서 유랑하는 백제인의 한과 수원의 화성을 쌓는 새 기운의 시대를 돌아본다. 부여가 처연함의 여행이라면 수원 화성은 조 선조에 대한 재인식이다. 중단된 화성의 역사는 우리를 슬프게 하지만, 화성건축을 기록한 선조의 뜻은 우리의 자부를 한껏 부풀려 주기 때문일 까.
이 책은 결국 우리 문화의 유산과 흔적을 통해 한국인 한국문화의 원형질 을 찾고자 하는 지은이의 평생의 화두를 여행기란 형식에 담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때때로 지나치게 주관적인 역사해석이 다소 거슬리지만, 시골 외양간에서 여물 먹는 황소를 쳐다보는 것도 신기한 여행이 될 날이 그리 멀지 않았 음을 염려한다면 그리 크게 허물할 수 있는 티끌은 아닐 것이다.
한국문화원형 찾는 평생 화두 담아
지은이는 프롤로그에서 시베리아에서 겪은 에피소드를 소개한다. 독일인 여행객이 사슴농장에서 막 자른 사슴뿔을 들고는 집에 가서 박제로 하겠 다고 말했을 때 한국사람은 주인에게 이렇게 말했단다. 먹기 좋게 썰어주 세요.
마치 유전자가 시키기라도 한 듯한 이런 무심한 행동은 때때로 다른 문화 의 조소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어쩌랴, 문화의 본질이란 그런 것인지 모른다.
이인우 기자
© 한겨레신문사 1997년07월3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