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강문 기자의 인물탐험
1997년07월31일 제 168호 한겨레21

소리장이 임동창

임동창. 피아노도 치고 장구도 치고 퍼포먼스도 하고, 그리고 도도 닦는 장이다. 벌써 삼년째 그럴듯한 무대에서 정기공연을 하고 있으니 이름값 이 만만찮다. 그런데 참 나이값을 못한다. 말끝마다 욕지거리요 상소리다 . 마흔한살 먹은 어른이 그러니, 듣는 이로선 사람이 본디 그러려니 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무시로 웃음을 터뜨리는 똥그란 얼굴만큼은 맑기 그 지없다. 그의 말마따나 열일곱살 철부지의 모습이다.


몸은 마흔살, 마음은 열일곱살

몸나이가 비슷한 사람들을 만나면 울화가 치민다. 별것도 아닌 것들이 응 큼을 떨기 때문이다. 치약 쥐어짜듯 속마음을 조금씩 뱉어내는 게 도무지 못마땅하다. 그런 악연을 맺은 날이면 내내 머리가 지끈지끈 쑤신다. 아 프리카 토인을 만난 것처럼 도대체 뜻이 통하지 않아 답답증이 도진다. 그러다 끝내 분통을 터뜨린다. “그럴려면 방구석에 자빠져 뒹굴지 사람 사는 세상에 뭐하러 나왔누. 망할 놈들.”

소리. 그걸로 치면 세상살이가 더욱 팍팍하다. 무슨 놈의 소리가 그리 복 잡하고 어지러운지. 흔히 클래식이라는 소리를 들으면 아예 미칠 지경이 다. 돈 들여 음악 공부했다고 내놓고 자랑하는 거라면 그나마 봐주겠는데 , 이건 세상에서 가장 우아하고 순수한 폼을 잡는다. 기껏해야 손장난이 면서. 그때마다 옛적 용각산 광고가 떠오른다. “이 소리도 아닙니다. 저 소리도 아닙니다. 그건 망할 소리입니다. 하하하.”

그의 소리는 쉽다. 이 세상 모든 사물의 본디 소리를 끄집어내는 게 처음 이자 끝이다. 작곡을 할 때부터 연주를 할 때까지 오로지 그것만 생각한 다. 멀쩡한 피아노를 뜯어 나무막대를 감싼 양털에 경화제를 쳐바르는 것 도, 무대에서 벼루를 긁거나 놋그릇을 두드리거나 탁구공을 튀기는 것도 다 그 때문이다. “요즘 소리는 죄다 성형수술한 소리라. 피아노로 치면 딱딱한 소리가 본성인디, 털옷을 입혀놨으니 맛이 갈 수밖에. 게다가 소 리란 게 그런 악기에만 있는 줄 알고 있으니. 쯧쯧.”

하지만 그가 소리를 내는 방식을 받아들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괴짜로 치부해버리면 일도 아니겠지만, 그가 가장 싫어하는 말이 그 말이 라니 그건 애초 택할 길이 아니다. 그래서 임동창이란 이름 앞에 그렇게 많은 수식어가 붙었는지 모른다. 땡초 피아니스트, 컬트 작곡가, 국악과 양악의 크로스오버 연주가, 퍼포먼스 국악인, 심지어 천재라는 찬사까지. 그런데 그는 그런 딱지가 생뚱맞다. “그냥 ‘임동창이 음악’ 하면 되지 , 왜 그리 이러쿵저러쿵 하고 그러요.”

땡초라는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그는 한때 승려였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자신의 꼬라지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해 머리를 깎았다. 처음 9개월 동 안 공양주 노릇을 하며 적게는 50명분, 많게는 4백명분까지 밥을 지었다. 그 비법을 침을 튀기며 자랑한다. “먼저 곳간에서 쌀을 가져와 쟁반에 한줌씩 뿌려가며 돌을 골라낸 다음 조리질을 해서 가마솥에 앉히는 거라. 솥뚜껑에는 거적때기를 씌우지. 처음엔 태우고 설익히고 난리를 피웠소. 그러다 도가 텄지. 밥 끓는 소리와 김만으로 뜸들일 때를 척 알았응게.”


탈영과 수행… 그러나 고독에 지다

그의 승려 생활이 땡초의 놀음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수행을 한답시고 묵언에 들어갔을 때였다. 오랜만에 서울 작은집에 들렀다. 입을 뻥끗해서 도 안 되는데 작은아버지가 자꾸만 말을 걸더란다. 하도 속이 답답해 화 장실에 가는 척하고 방을 나와 맨발로 담을 넘어 내뺐다. 그때부터 한바 탕 소동이 벌어졌다. 작은아버지를 선두로 식구들이 떼거리로 쫓고, 맨발 에 승복을 입은 조카는 달아나고. 택시를 잡아타고 쪽지로 행선지를 써서 위기를 겨우 모면하기는 했으나 지금 생각해도 배꼽을 쥘 촌극이다.

군대에 가서는 탈영까지 시도했다. 도를 닦아야겠는데 군대에서는 길이 보이지 않았단다. 부대에 배치받은 지 보름 만에 홀어머니를 뵈러가야겠 다고 떼를 써 2박3일 특별휴가를 받았다. 절에 돌아가자마자 군복을 벗어 던지고 승복으로 갈아 입었다. 사망신고를 내고 깊은 산 토굴에 들어가 수행할 작정이었다. 그런데 막상 토굴에 들어가니 적막강산이었다. 그 고 독을 도무지 이길 자신이 없어 다시 절로 돌아갔다. 절은 헌병대가 왔다 가고 온통 쑥대밭이 돼 있었다. 결국 “3년 군대생활도 견디지 못하면서 어찌 평생 중노릇 하겠나 싶어” 불문을 벗어났다(그는 지금도 까까머리 다. 그건 순전히 헤어스타일일 뿐이란다).

피아노를 처음 접한 건 중학교 2학년 때였다. 첫 음악시간에 선생님이 시 범으로 가곡을 쳤다. 지금 생각하면 거지 같은 피아노에 거지 같은 솜씨 였단다. 한데 그 소리가 벼락치듯 몸 속으로 들어와 버렸다고 한다. 마치 신내림 같은 거였다. 그뒤 완전히 피아노에 미쳤다. 친구고 공부고 다 때 려치우고 오직 피아노, 피아노였다. 수업시간에도 손을 책상 밑에 감추고 건반 두드리는 연습을 할 정도였다. 선생님이 몽둥이로 다스리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없는 살림에 어머니를 졸라 피아노학원 수강료도 뜯어냈다. 그런데 한달이 지나자 학원 선생님이 다음부터는 수업료를 가져오지 말라 고 했단다. 지금도 그 이유를 모르지만, 어쨌든 피아노 공부하는 데 들인 돈이 첫 수업료 3천원이었다.


김덕수 사물놀이패를 만나다

고교 1학년 때 작곡을 시작했다. 그가 마음나이로 머무르는 열일곱살 시 절이었다. 하루에 2시간만 자고 작곡에 매달렸다. 먹는 것도 화장실 가는 것도 잊어버릴 정도였다. 몸 안에서 꿈틀대는 것들이 넘쳐나와 그걸 발산 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단다. 당시만 해도 화성악책이 따로 없어 일본원서를 구해다 선생님에게 번역을 부탁해가며 공부했다. 그러다 어느 날 앞이 훤해지는 걸 느꼈다. 몸 안에서 성을 부리던 것들이 툭 터져버린 것이다. 그 순간 소리와 연주와 작곡에 눈을 떴다고 한다. 그러고 나니 음악보다 음악을 하는 내가 궁금해졌단다. “암만 생각해도 그걸 찾는 길 은 머리 빡빡 깎고 중 되는 수밖에 없더라구.”

국악은 행자 때 좋은 걸 알았다. 법회 때 틀어놓는 설법 억양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더란다. 그래서 라디로 국악프로그램을 다 녹음했다. 그러다 국악만 24시간 줄곧 들려주는 카페에서 사물놀이패를 만나 깊게 빠져들었 다. 정신없이 울려대는 타악 뒤로 흐르는 소리에 매혹당했다. 격한 두드 림을 통해 태어난 소리들이 다시 뭉치고 섞여 형성하는 가락이 멋졌다. 그때 그에게 그런 울림을 들려준 이들이 지금 김덕수 사물놀이패 패거리 들이다. “언젠가는 국악을 파헤칠 것이오. 내가 한국사람인데 국악을 몰 라서야 쓰겄소. 국악하는 것은 소가 언덕을 찾는 것과 같응게.”

그에게는 요즘 ‘장이골 촌장’이라는 새로운 이름이 붙었다. 소리의 세 계를 헤매는 젊은이 몇몇이 모여 만든 동네다. 산구석에 틀어박혀 세상의 온갖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감동의 선율을 찾느라 하루해가 짧단다. 반편 이 장이가 아닌 온편이 장이가 되려는 그들과 함께 그는 그만의 오롯한 소리를 찾아나선다. 꽉 들어차서 한방울도 새지 않는 그런 소리를. 그러 다 몸에 진이 빠지면 뽕짝 한곡을 멋들어지게 불러젖힌다. “대∼지는 부 른다. 환∼희에 빛나는 꿈꾸는 대∼지다….” 그의 18번 <대지의 항구다> 다. “그러다 새참으로 막걸리 한잔 걸치고 피아노 앞에 앉으면 그게 참 선 아니겄소.”

사진 정진환 기자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07월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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