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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단 |
1997년07월24일 제 16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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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지난 7월10일 우석전자 노동조합 조합원들이 인천북부노동사무소 앞에 모여 공문서 변조 의혹에 대해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참여와 협력의 신노사관계를 내세우며 노동법을 재개정한 지 4개월. 그러 나 노동법의 사각지대는 여전히 넓기만 하다. 교묘한 수법으로 회사쪽이 눈엣가시인 노동자들을 해고하고, 용역깡패를 동원해 노동자 테러를 자행 하는 것은 여전히 ‘지난날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심지어 노동자들을 보호해야할 노동사무소가 노동운동탄압에 앞장서는 일도 있다.
성실교섭 다짐하던 회사 태도 돌변
지난 7월7일 인천북부노동사무소 정문 앞. 트랜지스터를 생산하는 인천시 서구 가좌동 우석전자의 노동조합 설립신고를 마치고 노동사무소의 문을 나서는 박지영(27) 위원장은 들뜬 마음을 가눌 길이 없었다. “마침내 우 리도 노조를 갖게 됐구나!” 노동자라면 당연히 가질 수 있는 권리를 실 현한 게 그리 특별할 것도 없건만, 그의 가슴은 마냥 뛰었다.
박 위원장은 이날 점심시간을 이용해 노동자들 앞에서 법절차에 따라 노 조설립 보고대회를 가졌다. 이날 하루 동안에만 1백50여명의 노동자 가운 데 95명이 조합가입을 신청하는 등 지지열기 또한 뜨거웠다. 노동조합은 노조설립 사실을 회사쪽에 알린 뒤 회사간부들과 상견례를 갖고 노조활동 보장 등 7가지 요구안을 정식으로 전달했다. 회사쪽도 성실히 교섭에 임 할 것을 약속했고, 노사는 다음날 오전 11시부터 본교섭을 시작하기로 합 의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모든 것이 너무나 순조롭기만 했다.
그러나 이날 오후 8시께 북부노동사무소 전수창 근로감독관에게서 걸려온 한통의 전화는 모든 것을 한꺼번에 뒤집어놓았다. “이미 지난 7월4일 우 석전자에 이준복 노조위원장 이름으로 노동조합 설립신고가 돼 있습니다. ” 단위사업장의 복수노조 금지 규정에 따라, 뒤늦게 접수한 박 위원장의 노조설립신고는 무효라는 통보였다.
오전까지만 해도 우석전자에 노조가 없다는 사실을 확인해주던 근로감독 관의 뒤늦은 전화통보에 노조간부들은 그만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다음날 회사쪽은 예상대로 “두개의 노조가 설립돼 있어 어느쪽을 상대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이유를 들어 예정된 본교섭을 취소했다.
어디에서부터 문제가 생긴 것일까? 상황을 처음부터 거슬러 조사한 노조 간부들은, 조사결과 너무도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빚어졌음을 알았다. 뒤 늦게 조합설립을 신고한 유령노조가 먼저 설립신고를 마친 것처럼 공문서 조작의 흔적을 곳곳에서 발견한 것이다.
다른노조 설립신고 지우고 유령노조 접수
먼저 노동사무소쪽이 보여준 일반문서접수대장에는 ‘ㅈ법인노조’의 서 류를 접수한 난을 화이트로 지운 뒤, 그 위에 이준복 노조의 신고서를 접 수한 것으로 변조한 것이 한눈에 확연했다.
그러나 민원사무처리부에는 반대로 박지영 노조의 접수번호가 1032번으로 , 1035번인 이준복 노조보다 신고가 빠른 것으로 기재돼 있었다. 더욱이 이준복 노조가 7월4일 설립신고서를 냈다는 근로감독관의 말과는 달리, 두 노조의 신고일도 7월7일로 같았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일까? 북부노동사무소 윤지식 근로감 독과장은 이에 대해 “일반문서접수대장에 기록된 대로 이준복 노조가 먼 저 설립신고를 낸 것은 분명하다”고 말했다. 당초 일반문서접수대장에 기록한 것을 여직원이 민원사무처리부에 옮겨 적으면서 실수가 생겼다는 것이다. 그러나 노동사무소의 한 관계자는 그럴 가능성을 단호히 일축했 다. “통상 노조설립신고서는 민원접수철에 먼저 적는 것이 관례”라는 것이다. 박지영 위원장은 화이트로 지워진 난 아래 적힌 ㅈ법인의 설립신 고서를 확인해보았다. 문서번호 9513번, 분명히 정상적으로 신고된 것이 었다.
“노동사무소가 문서를 변조했을 것이라는 의혹은 이준복씨가 최근까지 이 회사 총무과에 근무하면서, 인사노무관리를 담당하던 직원으로 조합원 자격조차 가질 수 없는 사람이었다는 사실에서도 분명합니다.” 박지영 위원장의 말이다.
유령노조 설립신고서 첨부서류도 없어
노조의 반발이 거세게 일고, 문제가 확대될 조짐을 보이자 북부노동사무 소는 지난 9일 뒤늦게 박지영 노조에 노조설립신고필증을 교부했다. “조 사결과 이준복 노조는 노조설립 결격사유가 있어 인정할 수 없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실제로 이준복씨가 접수한 신고서에는 노동관계조정법 에 따라 반드시 첨부하도록 돼 있는, 노조설립에 필요한 임원의 성명, 주 소, 회의록, 규약 등이 적힌 서류가 전혀 없었다. 노조위원장의 이름과 주소, 전화번호, 조합원 3명만을 달랑 기재한 서류가 전부였다.
우석전자 노조원들과 민주노총 인천지역본부는 지난 10일부터 이번 사건 의 철저한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북부노동사무소에서 날마다 시위를 벌이 고 있다. 그러나 북부노동사무소쪽의 대답은 지금까지 한결같다. “단순 한 실수였을 뿐”이라는 것이다.
정남구 기자
© 한겨레신문사 1997년07월2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