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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1997년07월24일 제 16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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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타계한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의 국내 미개봉작 <살인에 관 한 짧은 필름>은 이 시대 도덕주의자가 남긴 최후의 유언처럼 들린다. 그렇다고 영화가 고루하다거나 지루한 건 아니다. 오히려 짧은 전언 속에 서 영화는 충격으로 다가온다.
떠돌이 생활을 하는 야첵과 무미건조한 일상을 보내는 택시운전사, 그리 고 너무나도 인간적인 변호사. 카메라는 이 세 인물 사이를 오가며 그들 의 뒤를 쫓는다. 최근 국내에 개봉된 <레드> <블루> <화이트&g t 삼색 시리즈에서도 보았듯 독특한 색조는 이 영화에서도 전체 분위기를 좌우한다. 특히 각각의 인물에 따라 조금씩 다른 분위기의 필터를 사용함 으로써 성격을 구별짓는다.
택시운전사를 살해하게 되는 야첵은 매우 부조리한 인물이다. 실수로 누 이동생을 죽이고 고향을 떠난 그의 삶은 구원의 손길이 없는 이방인의 삶 이다. 그를 변론하게 되는 변호사는 인간의 ‘원죄의식’을 들먹이며 항 변하지만 사형이라는 예견된 선고를 막지 못한다. 영화는 인물들을 통해 두개의 살인을 다루고 있는 셈이다. 개인에 의해 저질러진 살인과 제도에 의해 합리화된 살인. 영화 속에서 두 장면 모두 끔찍하기는 마찬가지다. <살인에 관한 짧은 필름>은 TV용으로 만들어진 키에슬로프스키의 < 십계> 시리즈 중 5부 ‘살인하지 말라’를 극장용으로 다시 만든 것이 다. 이 계율을 따르자면 두개의 살인 모두 신의 명령을 어긴 것이다. 그 러나 제도적 살인인 사형은 개인의 살인에 비해 너무나 간소화돼 있고, 냉정한 시선으로 행해지기에 더욱 전율을 느끼게 한다. 실제로 폴란드에 서는 이 작품의 여파로 5년간 사형이 금지되기도 했다.
더위를 식히기 위해 인간의 생명을 눈요깃감으로 만들고 피의 뒤범벅 속 에서 재미를 제공하는 많은 영화들 속에서 <살인에…>은 어떤 여파를 가져다줄 수 있을까? <살인에…>은 마치 영화 속의 변호사처럼 느껴 진다. 개인의 힘으로 제도적 살인을 막아 보려고 하지만 혼자 힘으론 어 쩔 수 없는 나약함. 이 시대 영화들에 영화가 무엇인지를 항변해 보지만 예견된 결과를 막을 수 없는 나약함. 그래도 위로가 되는 것은 야첵이 처 형당한 뒤 변호사의 작은 울음소리는 얼마나 크게 화면을 채웠던가. 비록 이 영화가 작은 물결밖에 일으키지 못한다 해도, 우리는 키에슬로프스키 의 인간에 대한 애정뿐 아니라 ‘영화’에 대한 애정도 맛보게 되는 셈이 다.
이상용/ 영화평론가
© 한겨레신문사 1997년07월2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