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1997년07월24일 제 167호 한겨레21

조선족 3세 록가수 최건의 음악세계

(사진/최건은 중국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록가수다. 지난 7월 열린 내한 공연에서 열창하고 있다.)

중국의 대중음악인 가운데 최건만큼 인기를 실감하며 사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중국에서만이 아니다. 대만과 홍콩에까지 영역을 확장한 그의 명 성은 이제 미국과 일본을 거쳐 한국에 상륙했다. 지난 7일 열린 그의 내 한 공연장은 그런 명성을 확인하는 자리였다. ‘조선족 3세’라는 꼬리표 로 그를 품어안기엔 역부족이다. 그의 음악은 우리가 찾고자 하는 민족적 정서에서 저만큼 떨어져 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호소력이 넘쳤고 낯 선 이국적 음향은 오히려 관객을 열광하게 했다. 아시아권에서 1천만장 이상 팔린(80% 이상이 복제품이다) <일무소유>(아무 것도 가진 게 없 다)의 저력은 거기에 있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노래하는 최건. 그를 ‘체제’와 ‘반체체’의 논리 에 묶어두는 것은 일방적 ‘구별짓기’의 부질없는 시도일 뿐이다. 그는 다만 음악을 하는 사람으로 존재하며 여타의 평가에 구속되기를 원치 않 는다. “음악은 인생을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다. 어떤 상황에서 건 나 름대로의 인생을 말해야 한다”는 그의 신념을 접어두고 음악을 얘기할 수는 없다.


대를 이은 음악인, 트럼펫 연주자로 출발

최건은 자유로운 감성과 음악적 재능을 타고났다. 그 뿌리는 부모에게서 쉽게 찾아진다. 공군 군악대 트럼펫 주자였던 아버지와 소수민족가무단의 무용수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그는 맏이로 태어났다. 그와 함께 사는 여성 은 미국인이다. 어려서부터 트럼펫을 익힐 수 있었던 그는 고등학교를 졸 업하던 해 베이징심포니오케스트라 단원으로 음악생활을 시작했다. ‘스 팅’과 ‘토킨 헤즈’, ‘폴리스’ 등 외국음악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던 그에게 록은 피할 수 없는 통과의례였는지 모른다. 트럼펫 주자로 공식 활동하면서 84년에 록밴드 ‘칠합판’(七合板)을 결성해 로커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86년 5월 그는 자신의 음악세계에 한획을 긋는 전기를 맞이한다. 베이징에서 열린 세계 평화의 해 기념공연에서 <일무소유> 를 오프닝으로 부르며 세계 무대에 선을 보인 것이다.

“난 예전엔 쉬지 않고 물었다. 네가 언제 나랑 갈 건지. 그러나 넌 아무 것도 가진 게 없는 날 웃었다. 난 너에게 나의 희망을 주겠어. 나의 자유 도 함께. 그러나 넌 아무 것도 가진 게 없는 날 웃었다. 넌 언제 나랑 갈 래.” <일무소유>는 사랑에 대한 간절한 바람을 표현한 연가다. 하지 만 그것은 충격이었다. 그때까지 중국 가수들은 그런 바람을 음악에 실어 발산하지 못했던 것이다. 타오르는 연민과 희망을 접어둘 수밖에 없었던 젊은이들의 가슴을 두드렸다. 그의 노래에는 시대의 감수성이 묻어 있다. 70년대 한국에서 김민기라는 이름이 그랬던 것처럼.

문화혁명 이후 중국의 젊은이는 고독과 무력감에 휩싸여 있었다. 최건 역 시 그 대열에 끼어 있었다. 당대의 ‘청년문화’를 무엇이라 딱 잘라 말 할 수도 없었다. 젊은이들은 사회적 격변기에서 젊음을 무기로 한 ‘해방 구’를 갈망했지만 ‘희망사항’일 뿐이었다. 집단의 논리는 개인의 감성 표출을 언제나 짓눌렀다. 그런 시절에 최건의 노래는 억압된 감정의 둑을 무너뜨렸고 젊은이들의 정서는 엄청난 폭풍과 함께 폭발했다. 그의 노래 는 빠른 속도로 계몽적 국민가요에 넌더리난 젊은이들에게 파고들었다. 청년문화를 새롭게 여는 이정표로서 청년층의 정신적 혼돈을 무한대로 흡 수했다.


청년의 열정 내뿜으며 정신적 탈출구 제공

그의 성공은 록의 미학을 제한적으로만 받아들인 데도 있었다. 최건은 서 구에서 ‘저항과 파괴의 예술’로 자리잡은 록형식을 일방적으로 숭배하 는 ‘록의 전사’가 아니었다. 씨앗도 채 뿌려지지 않은 중국에서 록의 미학으로 일컫는 ‘청년의 저항’을 말하는 것은 섣부른 도전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대신 내면에 잠긴 자아를 스스로 발견하도록 하는 마력이 그 의 노래엔 있었다. 전자악기가 뿜어내는 강력한 사운드와 냉소적인 노랫 말은 하나의 신화로 자리잡았다. 때문에 그의 노래를 ‘저항정신’이라는 하나의 그릇에 담으려는 것은 부질없다. 다만 ‘자유’에 대해 새롭게 눈 을 뜬 젊은이들의 오감을 자극하는 열정이 살아 숨쉬고 있을 뿐이다. 록 의 불모지 베이징에서 폭발한 그의 노래는 대륙을 흔드는 젊은이의 언어 가 되었다.

최건은 스스로 ‘로커’임을 내세운다. 하지만 그의 음악이 록의 전형을 추구하는 것은 아니다. 서구음악의 여러 장르를 섭렵한 그는 각각의 특성 을 결합해 ‘중국적 록’을 선보였다. 그래서 서구적 록의 어법에 중국 정서와 민속음악을 입혀 실험성이 돋보인다는 평가를 받는다. 홍콩의 인 기가수들이 팝을 부를 때 어눌한 중국어가 그의 폭발하는 감정을 표출하 는 록음악엔 강력한 친화력을 보이는 강점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누구와 도 다른 그러나 철저히 중국적인 그만의 음악적 색깔이 있기에 가능한 일 이다.

록의 토착화를 주도했다는 측면에서 최건을 ‘한국 록음악의 대부’ 신중 현과 비교하는 것은 어색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한국의 신중현이 탁월한 예술적 업적에도 당국의 혹독한 탄압 속에 오랜 동안 음악 삶을 접어야 했던 사정과 비교할 때 그는 축복받은 로커로 성장했다. 일부 제약은 있 었기만 그에게서 무대를 온전히 박탈한 적은 없었다. 그것이 자유주의 한 국과 전체주의 중국의 차이일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일부에서는 최건을 ‘중국의 밥 딜런’이라 부르기도 한다. 포크가 주류를 이루었던 1965년 밥 딜런은 상업주의로 비난받던 전기기타를 들고 나온 것보다 더 큰 충격 을 대중에게 안겨주었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하지만 밥 딜런이 골수 팬에 게 진정성을 상실한 배신자로 취급받은 것과는 정반대였다. 그는 황무지 에서 시들지 않는 꽃을 피워냈다. 중국의 젊은이들은 그에게 상업주의라 는 잣대를 들이대지 않는다. 자유로운 개성을 내세우며 건강한 젊음을 표 출하는 그의 노래를 그대로 수용한다.

“나는 거창한 혁명을 노래지 않는다. 다만 내 마음 속에서 움트는 자유 를 어떻게든 발산하고 주장하고 싶다. 내가 다른 사람과 다른 게 있다면 일상 속에서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느끼고 음악적으로 표현하려는 욕구가 강하다는 것이다.”

베이징 공연 뒤 최건은 5인조 밴드 ‘아도’(ADO)를 결성했다. 그후 자유 의 열풍을 몰고다니며 중국 대륙 순회했다. 순회하는 도중 그는 이미 중 국의 슈퍼스타가 돼있었다.

89년 6월 베이징 천안문사건은 그에게 또하나의 전기였다. <일무소유&g t가 시위현장에서 사회변혁의 테마곡으로 불리면서 서구 언론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서구 언론은 최건을 중국 체제에 맞서는 ‘반 체제가수’의 이미지로 윤색했다. 그는 실제로 천안문사건 당시 붉은 천 으로 눈을 가린 채 노래를 부르며 시위현장에 있는 젊은이들의 분노에 연 대감을 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연히 중국에서 그의 노래활동은 공연 이 제한받는 등 한동안 위축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일부 인사의 편견 에서 비롯된 이 제재조처는 오래지 않아 활동은 정상화됐다. 서구에서는 바로 이 때문에 그의 주가가 오히려 급등했다. 독특한 매력의 중국풍 록 음악으로 인정받은 것이다.


미래를 낙관적으로 전망하는 ‘제사장’

서양의 음악인들은 아도 밴드가 사용하는 전통악기에 주목했다. 중국의 전통피리인 ‘티즈’(笛子)와 북 등의 전통악기가 드럼, 색소폰, 트럼펫 등의 서양악기와 함께 빚어내는 소리에 묘미가 있었던 것이다. 또 록과 펑크, 레게에서 힙합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양식이 어우러진 그의 음악은 원시적인 카니발을 떠오르게 한다. 개인적 분노, 감정 표출에 머무르지 않고 서로의 공감과 연대를 확인하며 신명을 불러내는 것이다. 그는 제사 장이 되어 제의를 주관하는 듯하다. 서구 로커들의 카리스마와는 본질적 으로 다른 모습이다. 그의 음악에 숨겨진 원시성 때문일까.

천안문사건 뒤 공백기를 거친 그는 <해결>이란 음반을 들고 나왔다.

“눈앞에 많은 문제가 있지만 해결할 방법이 없고, 늘 기회가 없다는 것 은 더 큰 문제다. 난 갑자기 너와 마주쳤고, 넌 날 보고 있었지. 머리 속 에 갑자기 떠오른 생각은 너를 먼저 해결해야겠다는 생각. 내일의 문제는 많지만 지금은 하나뿐이다. 난 너와 진지한 얘기를 하는 척하지만 넌 그 걸 알아챘고, 마치 상관없다는 듯 웃으며 손을 내밀어 나의 허위와 문제 를 같이 받아들였다.” <해결>은 미래에 대한 낙관적인 전망을 담고 있다. 사회적 변화 과정에서 불거진 산적한 문제들이 있지만 하나씩 풀어 나가면 될 것이라는….

최건과 소련 젊은이의 우상이었던 한국계 로커 빅토르 최를 구별해 주는 게 바로 미래에 대한 전망이다. 빅토르 최는 짓눌린 사람의 자기표현 양 식으로 록을 택해 절제된 가사와 긴장된 침묵, 그리고 전통민요의 단순리 듬으로 내면과의 대화를 꾀했다. 80년대 소련의 청년문화를 주도했던 그 에게 사회적 지향을 발견하기한 쉽지 않다. 설원지대의 우울과 고독한 반 항이 찬바람으로 다가온다. 빅토르 최의 미래에 대한 불투명한 음영과 달 리 최건에겐 넘지 못할 언덕이 없다는 식의 낙관이 자리잡고 있다. 빅토 르 최와 최건에겐 비슷한 점도 많다. 영화에 대한 관심이 그것이다. 93년 그는 다른 음악인들과 함께 영화 <북경녀석들>을 만들었다. 음악감독 으로 공동 제작, 특별출연한 이 영화는 로카르노영화제에서 특별상을, 베 를린영화제에서는 청년비평가상을 수상해 또다른 재능을 뽐냈다. 그는 &l t북경녀석들>에서 <베이징 스토리> <관용> <마지막 총탄> 등의 노래를 통해 천안문사건이 아직 아물지 않았음을 들려준다.

지난 94년에 내놓은 <붉은 깃발 아래의 알>은 중국에서 추진하는 개 혁·개방의 잔주름을 색소폰 연주의 불협화음으로 표현한 노래다. 사회적 혼돈이 끝나기를 갈망하는 그의 바람이 그 불협화음 속에 또아리를 틀고 있다. “갑작스런 개방, 사실은 갑작스런 것도 아니다. 이제 기회는 왔다 . 하지만 뭘 해야 될지 모르겠다. 붉은 깃발이 방향도 없이 휘날린다. 혁 명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늙은이는 힘이 더 세진다. 돈은 공중에 돌고 있고 우리에게는 이상이 없다. 우리의 개성은 모두 동그랗다. 마치 붉은 깃발 아래의 알처럼…” <붉은 깃발 아래의 알>.

또다른 노래 <상자>는 더욱 도발적으로 느껴진다. 이 노래는 홍콩에 서 발매된 CD에 수록되지 못할 정도로 중국 정부의 눈치를 살펴야 했다. 솔직함과 투명함을 미덕으로 여기는 그가 아니라면 쉽게 내뱉을 수 없는 노랫말이다. “나의 이상은 저 깃발에 싸여진 상자다. 상자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피가 묻은 깃발은 빨갛다. 따라서 승리자는 빨간색은 좋아한다. 되돌아가서 그 상자를 때려부수자. 저 깃발 을 찢어버려라. 승리자에게 너는 잘못했다고 말해야 한다. 상황은 바뀌었 다고 말해야 한다” <상자>.


세계를 무대로 중국 록을 전파한다

90년대 들어 베이징에도 록음악을 하는 사람들이 늘어 이제 ‘2세대 로커 ’들이 성장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껏 어느 누구도 최건의 아성을 허물지 는 못했다. 최건으로 하여금 오히려 군계일학으로 우뚝 서게 했다. 그는 92년 3월 일본 도쿄에서 5만여명이 운집한 가운데 공연을 가졌다. 이어 9 5년 8월엔 중국 로커로는 처음으로 미국의 뉴욕 등 3개 도시와 독일 스위 스 등지에서 공연을 가졌다. 록의 본고장에서도 그의 진가는 유감없이 발 휘됐다. 중국 록의 씨앗을 세계에 뿌리고 다니는 전도사가 된 것이다. 해 외 공연을 거듭할수록 그의 음악적 깊이와 넓이는 더해가고 있다. 드넓은 대륙의 용솟음치는 기개 앞에서 거칠 게 없었다.

최건에게 한국혼이 숨쉬고 있다지만 생활양식과 사고방식 등은 철저히 중 국식이다. 거기에다 어떤 속박도 원치 않는 코스모폴리탄적 개성이 있다. 애당초 그의 한국방문은 ‘금의환향’과 거리가 멀었다. 그럼에도 한국 팬들은 뜨거운 동포애로 감싸안았다. 물론 한국에 와있던 중국 조선족의 열광적인 환호도 있었다. 그래서일까. 정부는 억지 관심을 보였다. 내한 공연장을 가득 메운 팬들의 요청이 아니었으면 그의 대표곡 <일무소유& gt는 한국땅에서 들을 수 없었다. 오는 7월26일 텔레비전 녹화방송에서 & lt일무소유>를 기대하는 것은 허망할 뿐이다. 중국에선 가능해도 한국 에서는 불가능하다. 진실로 알 수 없는 게 우리 정부 관계자의 판단이다.

김수병 기자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07월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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