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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 지성/과학읽기 |
1997년07월24일 제 16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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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은 생산력과 직결되는 도구적 이성으로서의 특성과 그 생산력의 사회 적 의미까지도 천착할 수 있는 비판적 이성의 성격을 갖는다. 유전자 구 조와 그 속에 담겨져 있는 정보를 밝혀내는 것도 과학의 몫이지만, 그 지 식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 또는 이용해서는 안 되는지를 파악하는 것도 과학의 소임이다. 원자핵 속의 비밀을 밝히는 것도 과학의 역할이지만, 그 쓰임새를 결정하는 데에도 과학은 관여할 수 있어야 한다.
도구적 이성으로서의 힘이 커지는 만큼 비판적 이성으로서의 역할은 더욱 중요해진다. 인류의 말살만이 아니라 지구상의 생태계를 교란·파괴할 힘 을 갖게 되었고, 프랑켄슈타인과 복제인간의 제조가 머나먼 미래의 일이 아니게 된 오늘날 그 힘을 제어할 이성은 필수적이다. 그러한 이성은 필 시 윤리적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으며 윤리성은 ‘윤리적 인간’에서 비 롯된다. 자신의 좁은 전문영역에만 관심을 가질 뿐 그것의 사회적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는 과학자는 일상적 삶과 전문 과학자로서의 삶에 아무리 충실하다 할지라도 윤리적 이성을 가진 과학자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면 과학자가 어떻게 자신이 하는 일의 사회적 의미와 성격을 파악할 수 있는가? 핵분열에 관한 자신의 ‘순수한’ 연구가 원자폭탄 제조로 연 결될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중추신경계의 흥분전달물질에 관한 연구가 인간 통제에 사용될 것을 짐작이나 할 수 있을 것인가? 과학자 개 인으로서는 도저히 해결 불가능한 숙제일지도 모른다.
암세포의 분자생물학적 특성에 관한 연구를 하는 과학자가 연구비가 아무 리 많이 늘어나도 자신이 하려는 연구를 충족시키기에는 여전히 부족한 실정에서 어떻게 자신의 분야에 투입되는 연구비 가운데 상당 부분이 암 발생의 사회적 요인을 규명하는 데 돌려져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인 가? 이 또한 개인 과학자로서는 영원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일지 모른다. 개인적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면 사회적 장치가 마련돼야 할 것이 다. 그리고 어차피 이런 문제는 그 자체가 개인적 차원이 아니라 사회적 인 것이기도 하다. 과학기술의 사회적 관리에 관해 두 가지 길을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여태까지 주로 해왔던 엘리트적 방법으로 소수 관계자가 모든 것을 장악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이는 현실적으로 가능하지도 않을 것이며 설사 가능하다 하더라도 그 귀결은 철저한 관리사회와 독재사회일 수밖에 없다.
다른 한 가지는 과학기술 정보의 공개와 사회적 토론 및 검증을 통한 관 리이다. 공개를 통해 과학기술의 내용만이 아니라 그 사회적 의미를 그때 그때 검토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인류의 지적 자원인 정보를 사회 구성 원들에게 알려야 한다는 당위적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인류의 생존을 위해 서 불가피한 전략으로 생각된다. 또한 개인 사이, 국가 사이의 무한경쟁 이 찬양받고 추구되는 지금으로서는 현실성이 없는 구상으로 비칠지 모르 지만 선진 과학기술의 국가간 이전과 공유의 장치도 마련돼야 한다. 예컨 대 환경보존과 관련되는 과학기술이 절대적이지는 않더라도 어느 정도 환 경을 유지하고 개선하는 힘을 가진다면, 그것을 그린라운드의 구상처럼 세계 지배의 새로운 배타적 도구로 삼을 것이 아니라 인류가 평화스럽게 공존하기 위한 공동의 자산으로 전화시킬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과학기술의 공개 및 공유와 더불어 행해져야 할 것은 과학교육의 쇄신이 다. 지금까지의 과학교육은 대부분 도구적 이성으로 과학을 가르쳐 왔다. 그러나 이제는 비판적 이성으로 과학 교육이 확대되어야 한다. 거기에는 과학과 사회와의 관련에 관한 영역이 한 가지 중심을 이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성격의 과학교육은 국민 일반의 교육과정에서뿐만 아니라 전문 과학기술인에 대해서 더욱 철저히 이뤄져야 한다.
과학문명이 통제력을 잃고 비대해지기만 해서 마침내 인류와 생태계 그리 고 과학 자체를 파탄시킬 미래가 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 인류는 그리고 현장의 과학기술인들은 새로운 윤리적 이성을 갖추어 나가야 할 것이다. 이것은 여러 가지 답안 가운데에서 어떤 것을 선택할 것인지의 문제가 아 니라 유일한 답안을 어떻게 실천해낼 수 있느냐 하는 문제이다.
황 상 익/ 서울의대 교수·의학사 및 의료윤리학
© 한겨레신문사 1997년07월2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