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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역사 속의 여성 |
1997년07월24일 제 16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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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가족계획이 상식이어서 결혼 적령기를 맞은 여성이라면 누구나 피 임에 대해 구체적인 방법까지 알고 있다. 초등학교부터 성교육은 이미 필 수과목이다. 그러나 60년 전 미국에서는 피임에 관한 이야기를 입에 올리 기만 해도 범죄자 취급을 받았다. 뉴욕주 법 제1142조 일명 ‘컴스톡법’ 은 피임에 대한 정보를 주고 받는 일을 ‘음란’으로 규정하고 이를 어기 는 자에게 5년 징역이나 5천달러의 벌금형을 내렸다. 다만 의사가 질병을 예방하기 위해 말로 정보를 제공하는 일은 허용되었는데, 이때 질병이란 곧 성병을 의미했다. 당시 미국인들은 피임을 창녀나 입에 올리는 부도덕 한 것으로 여겼으며 여성들은 생기는 대로 아이를 낳다가 건강을 망치거 나 젊은 나이에 죽거나 할 뿐이었다.
이 완강한 사회통념에 도전해 “여성은 자기 몸을 스스로 조절할 수 있도 록 피임과 산아제한을 해야 하며 그 방법을 알 권리가 있다”고 주장한 사람이 마거릿 생어다. 자그마한 몸집에 붉은빛이 감도는 머리칼, 투명한 푸른 눈을 지닌 마거릿은 세 아이의 어머니이자 평범한 간호사였다. 단아 한 모습의 마거릿이 아이들을 안고 있는 사진을 본 사람들은 그가 어째서 정숙하지 못하게 성과 임신, 피임을 입에 올리며 산아제한 운운하는지 이 해하지 못했다.
마거릿 생어가 산아제한 운동가로 변신하게 된 계기는 한 트럭운전사 아 내의 비참한 죽음이었다. 마거릿의 환자였던 그는 낙태하려고 자궁에 날 카로운 물체를 집어넣었다가 그만 목숨을 잃고 말았다. 피임방법을 알려 달라고 애원하던 그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마거릿은 간호사를 그만두게 된다. 마거릿은 이어 오랜 자료조사와 준비 끝에 미국 최초의 산아제한 상담소를 열고 <여성혁명> <가족계획>이란 출판물을 발간했다. & lt여성혁명>이 산아제한의 필요성을 설명하는 이론서라면 <가족계획& gt은 구체적인 피임방법을 알려주는 지침서였다. <여성혁명>은 나중 에 <산아제한 리뷰>로 이름을 바꾼다.
마거릿은 망명, 투옥, 구속으로 이어지는 험난한 길을 걸었다. 그에게 씌 워진 죄목은 음란출판물간행죄를 비롯해 모두 아홉가지였고, 45년형에 해 당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들을 잃어야 했다. 막내 딸 폐기가 마거릿이 망명중일 때 폐렴에 걸려 죽었으며, 남편과는 이혼했 다. 음란하다는 손가락질에다, 마침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였으므로 하나라도 더 낳아 애국해야지 산아제한이라니 얼토당토않다는 비난까지 받아야 했다. 그는 아마도 남자들로부터 가장 욕을 많이 먹은 여자일 것 이다.
그러나 마거릿은 여성이 건강한 마음과 몸으로 새 생명을 맞을 준비를 한 다음 임신을 해야 태어난 아기와 어머니 둘 다 진정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고 주장했다. 원치 않는 임신,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맞는 임신과 출산은 비극일 뿐이라고. 그의 외침은 미혼모의 출산과 버려지는 생명들 이 늘어가는 오늘 우리에게도 절실하기만 하다.
마거릿은 특히 가난한 여성, 흑인 여성에게 관심을 기울였다. 부유한 상 류층 여성들은 남몰래 배운 피임법을 알고 있는데 가난하고 교육받지 못 한 여성들만이 아무 것도 모르고 있으며, 그 이유는 가난한 사람들이 아 이를 많이 낳아야 잉여노동력이 유지되어 부유층에 유리하기 때문이라고 마거릿은 말했다. 가난한 석수장이의 딸이요, 아일랜드 이민자 출신인 그 였기에 가능했던 통찰이다.
마거릿의 끈질긴 활동으로 1939년 의사에게 무제한의 피임처방권을 부여 하는 ‘의사법’ 이 연방의회에서 통과됐다. 그제서야 미국 여성들은 원 하는 사람은 누구나 피임에 관한 정보를 얻고 의사로부터 피임시술을 받 을 수 있게 되었다. 마거릿이 산아제한운동을 시작한 지 25년 만의 일이 었다.
박은봉/ 역사연구가
© 한겨레신문사 1997년07월2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