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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
1997년07월24일 제 16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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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최후의 오지로 떠나는 세종기지 대원들. 미지 세계에서의 원시공동체 생활을 준비하고 있다.)
한반도의 60배나 되는 땅덩어리가 온통 얼음과 눈으로 뒤덮여 있는 빙하 의 대륙. 펭귄과 물개가 얼음바위 위에서 한가롭게 낮잠을 즐기는 신비의 땅. 남극하면 이런 풍경이 떠오를지 모른다. 그러나 사람에게 그곳은 천 형의 땅이다. 체감온도만 영하 40도. 불청객처럼 찾아오는 돌풍(블리자드 )은 초속 40m를 넘는다. 얼음과 얼음 사이에는 틈새(크레바스)가 지옥사 자처럼 숨어 있다. 발을 헛디디는 순간 그대로 영영 작별이다. 그런데 굳 이 이 천형의 땅으로 떠나려는 사람들이 있다.
1년 동안 혹한 체험하며 새로운 전기 마련
올 12월부터 남극 킹조지섬 세종과학기지에서 1년을 보내게 되는 11차 월 동대장 이상훈(41) 박사. 그는 남극의 생태계를 연구하는 한국해양연구소 극지센터의 연구원이다. 극지센터의 연구원들은 진정한 ‘남극맨’이 되 기 위해 통과의례처럼 남극대장을 거친다. 선배연구원 10명이 한번씩 월 동대장을 맡아왔으므로 이제 싫든 좋든 그의 차례가 됐다.
요즘 그는 제때 퇴근해본 기억이 별로 없다. 남극을 가는 일이 몸만 가면 되는, 그런 간단한 일이 아니어서다. 신접살림 차리듯 신경써야 할 일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세종기지와 수시로 연락해가며 살림에 필요한 장비와 물품을 꼽아 들여놓아야 한다. 특히 이번에는 10년이 다 된 발전기를 새 것으로 교체해야 하는데, 이게 영 만만찮다. 발전기는 남극의 혹한을 견 디게 해주는 생명줄. 온수와 난방, 통신이 모두 자체 발전에 의존한다. 때문에 선정에서 구매까지 시시콜콜히 따질 수밖에 없다. 월동대장을 지 낸 선배들을 만나 조언을 구하는 것도 빠뜨릴 수 없다. 기지에서 1년을 보낼 생각을 하면 그들의 조언을 단순한 무용담으로 흘려 들을 수 없다. 게다가 개인적으로 남극에서 연구할 자료와 참고문헌을 정리하다 보면 하 루해가 빠듯하다.
하지만 그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월동대원 선발이다. 남극의 여름은 12월 과 1월 겨우 두달에 불과하다. 영하 0.8도의 기온 속에서 1cm 안팎의 이 끼가 고개를 내밀긴 하지만 돌풍과 눈발은 겨울과 매한가지다. 한국의 6 ∼9월이 남극에서는 한겨울이다. 한겨울이 되면 눈은 세종기지의 지붕을 아예 덮어버린다. 한국의 기후로 치면 1년 사시사철 혹한인 셈이다. 동물 이 겨울잠을 자듯, 1년을 꼬박 남극대륙 한가운데서 겨우살이를 해야 하 는 대원들이기에 그 선발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것은 오로지 월동대장 의 몫이다.
일단 그곳에 가면 대원들은 쳇바퀴처럼 반복되는 단순한 생활, 고립감, 가족에 대한 그리움 따위로 신경이 예민해지기 십상이다. 그러다 보면 불 필요한 오해가 생기게 마련. “살을 맞대고 사는 부부 사이에도 마찰이 생기잖아요. 서른 다른 생각과 생활을 하다 모인 대원들이 열악한 환경을 견뎌야 하니 오죽하겠어요. 자기절제 능력과 원만한 인간관계가 가장 큰 선발기준이 되는 것은 그 때문이죠.”
세종기지를 1년 동안 운영하는 대원들은 모두 15명이다. 과학기지라고 해 서 모두 과학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연구요원은 5명이 전부다. 나머지 1 0명은 각 분야의 정예들도 구성된다. 먼저 기상관측요원·중장비요원·의 사 1명씩 해당기관의 추천을 받아 선발한다. 여기에 조리·전기·발전· 통신 등 시설물 유지관리 분야에서 7명의 대원을 공개선발한다. 최근 실 시한 시설물 유지 관련 공개채용에서는 7명 모집에 1백43명이 지원해 20. 4 대 1의 높은 경쟁률을 기록했다. 93년부터 10 대 1 안팎에 머물던 경쟁 률이 올해엔 2배 이상 높아진 것이다.
지원자들은 대체로 미지의 세계에 커다란 호기심을 보인다. 최근 우리 사 회에 불고 있는 오지탐험 열풍과 맥을 같이 하는 것 같다. 지원자 가운데 가장 많은 연령층을 차지한 30대들은 회사생활로 지친 삶에 뭔가 변화의 전기를 마련하고 싶어하는 욕구가 강하다. 게다가 전에는 보기 드물던 40 대 이상 지원자들도 15%나 됐다. 극지지원실 이경인(43) 실장은 “지원자 들 가운데 명퇴자들도 꽤 많았는데 이들은 한결같이 급여에 관심이 많았 다. 확실히 불황이라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한다.
절제 능력·인간관계가 선발의 주요 기준
(사진/남극 반도 옆의 킹조지섬에 세운 세종과학기지 기념비. 우리나라는 제2의 과학기지 건설을 검토하고 있다. )
이번 월동대원 선발에서 경쟁이 가장 치열했던 부문은 조리부문이었다. 1 명을 뽑는데 자그마치 32명이나 지원했다. 특급호텔 조리장 경력자가 도 전장을 내밀기도 했다. 이승일(27)씨는 대학입시보다 더 어려운 경쟁률을 뚫고 조리부문 월동대원으로 선발됐다. 최종면접에서 경합을 다툰 미혼의 여성 지원자를 제치고 그가 낙점된 데는 실력뿐만 아니라 건장한 체격도 한몫했다. 조리사는 매일 아침 눈 속을 뚫고 길을 내어 식당으로 건너가 식사를 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1백여m 떨어진 냉동창고에서 15명분의 부식거리를 꺼내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인근 칠레나 러시아기지에 서 손님이라도 오면 한국의 요리솜씨를 뽐내야 한다. 1년 내내 쉴 날이 없는 것이다.
그가 남극을 지원하게 된 동기는 독특하다. 요리는 가장 극한적인 상황에 서 발전한다는 그의 신념 때문이다. 음식재료가 풍부한 곳에서는 요리를 연구할 필요성이 없어져 그만큼 발전이 더디다는 것이다. 지난해 파키스 탄 한보지사에서 1년 동안 조리사로 근무하면서 그가 체험적으로 터득한 이치다. “무와 된장밖에 구할 수 없는 곳에서 매일 된장찌개를 끓여야 된다고 생각해 보세요. 매일 똑같은 맛은 사람들을 금방 질리게 하죠. 그 래서 무와 된장의 양을 조절해 가며 색다른 맛을 연구하게 되었지요. 남 극에서도 마찬가지 상황일 겁니다. 고춧가루가 다 떨어지면 매운맛을 낼 다른 재료를 찾아 연구하지 않겠어요.”
벌써부터 그는 대원들이 남극에서 1년 동안 먹을 식단을 짜느라 정신이 없다. 9월에 한국을 출발하는 화물선편에 요리재료를 부치려면 시간이 촉 박하다. 혹한 속에서는 체력소모가 많기 때문에 육류를 많이 준비할까 생 각하다 고개를 내젓는다. 육류만 먹으면 변비에 걸리기 쉽기 때문이다. 대신 미역, 표고버섯, 말린 나물의 양을 많이 잡는다. 마른 오징어와 젓 갈류도 준비하고 싶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적도를 건너 2달을 넘 게 항해하는 배 속에서 곰팡이가 슬 것 같아 포기해 버린다.
전기설비부문에 선발된 박광수(35)씨는 한 섬유회사에 근무하다 남극을 지원했다. 섬유산업이 사양산업인 데다 경기불황까지 겹쳐 회사가 맥을 못췄다. 당연히 개인적으로도 생활이 어려워졌다. 게다가 직장생활을 12 년 동안 하다 보니 삶의 새로운 전기를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 다. 월동대원으로 선발된 뒤부터는 마음과 몸이 깃털처럼 가볍다. 새로운 삶에 대한 기대감이 그를 마냥 들뜨게 한다. 그래도 눈물을 흘리며 남극 행을 말렸던 아내에게는 여전히 죄스럽다. 내년 큰 아이의 초등학교 입학 식에 참석하지 못하는 것도 못내 마음에 걸린다. 4형제 가운데 장남으로 부모님을 모시고 있는 처지도 쉽게 결심하지 못하게 했다. 하지만 그는 이번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은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그동안 너무 쫓기 다시피 허겁지겁 살아 왔어요. 남극에 가서 제가 살아온 삶을 차분하게 되돌아볼 참입니다. 그리고 긴 호흡으로 인생을 계획하고 싶어요. 혼자 고민할 시간, 책을 읽을 시간도 무진장하니까요.”
애로와 난관이 있는 매혹적인 세계
새로운 삶과 오지의 생활에 대한 끝없는 동경, 갑갑한 일상으로부터의 탈 출은 남극행을 재촉한다. 김효동(33)씨가 바로 이런 경우다. 그는 지난 9 1년 남들이 꺼리는 리비아 대수로 공사현장에 자원해 건너갔다. 트레일러 와 발전기 시설을 정비하면서 지낸 리비아에서의 세월은 행복했다. 사막 이라는 극한상황이었지만, 누구로부터의 간섭도 없는 자유로운 세계가 매 혹적이었다. 그 매력에 빠져 5년 넘게 리비아에 붙들렸다. 지난해 말 귀 국했다. 그뒤로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고 한다. 일정한 시간에 맞춰 출퇴근하는 평범한 직장생활, 직장상사의 간섭이라는 고리타분한 틀을 다 시 한번 깨고 싶어졌다. 그래서 남극을 지원하면서 다니던 직장을 과감히 그만뒀다. “남극은 돈을 주고 가고 싶어도 못가는 데 잖아요. 그런데 돈 을 받으면서 새로운 세계를 접해볼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가슴벅찬 일입니 까.”
남극에서의 삶은 원시공동체 생활과 비슷하다. 식사를 제외하고 청소와 세탁은 모두 각자의 몫이다. 게다가 외부로부터 철저하게 단절돼 있다. 거대한 남극대륙에 한국사람이라곤 세종기지 대원 15명이 전부다. 1분에 5천원의 통화료가 나오는 전화통화도 쉽지 않다. 편지나 신문은 한달이 넘어야 칠레기지를 거쳐 들어온다. 고무보트를 타고 가다 뒤집히기라도 하면 남극의 얼음물에 금방 동상을 입는다. 이런 험한 생활에도 걱정보다 기대감이 앞서는 것은 월동대원 각자에게 꿈이 있기 때문이다. 최고의 과 학자, 최고의 요리사, 새로운 인생을 설계해 보겠다는 야무진 꿈들이 있 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극은 이들에게 꿈의 경연장이다. 대원들의 마음은 이미 남극을 달리고 있다.
이용인 기자
© 한겨레신문사 1997년07월2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