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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
1997년07월24일 제 16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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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국내 만화시장은 그 규모마저 제대로 집게되지 못하는 실정이다. 대본소용 만화가 공급날짜를 기다리며 총판에 쌓여 있다.)
만화방에는 냄새가 있다. 손때 묻은 만화책에서 풍기는 약간 퀴퀴한 냄새 는 호야, 맹구, 독고탁, 최고봉, 성일, 각시탈이 활개쳤던 70년대 중반이 나 오혜성, 이민, 강백호, 짱구, 한비광이 주름잡는 지금이나 거의 똑같 다. 검은 고무줄이 달린 책장, 1백원에 5개씩 나눠주던 하얀 쇳조각(시대 , 지역에 따라 금액과 형태는 조금씩 달랐다) 표, 주황색 얼음주머니 아 래 팔을 깊숙이 뻗어 만화 2권을 포기하고 꺼내먹던 하드, 코를 훌쩍이고 만화를 보다 키득키득거리던 고만고만한 아이들, “00야” 하고 야단을 치며 손을 잡아끌던 엄마도 이젠 만화방에 없다. 푹신한 소파, 라면·커 피·김밥, 그리고 뽀얀 담배연기를 내뿜는 어른들, 모든 게 달라졌다. 유 일하게 변하지 않은 그 냄새가 벌름거리는 콧속으로 파고들 때 문득 우린 만화와 함께 한 ‘추억’과 ‘낭만’ 한자락을 폴폴 날리는 그 냄새 속에 서 부여잡는다. 누나 심부름으로 쪽지에 적어준 엄희자 만화 한보따리에 심부름값 대신으로 독고탁 만화 몇권을 진보라색 나일론 보자기에 찔러 넣고, 집으로 향하던 그밤 그 골목의 뿌듯한 포만감을 어찌 잊을 수 있을 까?
상상의 날개 펴고 3조원대 시장 형성
20대 중반에서 40대 초반까지가 그렇게 만화를 보고 자란 ‘만화 1세대’ 다. 별다른 오락거리가 없던 시절, 십원짜리 몇닢으로 상상의 나래를 활 짝 펴게 해줬던 만화는 유년의 뜰을 거닐 때마다 매번 나타난다. 번데기 와 뽑기 대신 만화를 집어들은 그 아이들과 함께 우리나라 만화는 자라났 다. 해마다 5월 ‘쥐잡는 날’ 위기를 넘겨가며 잡초처럼, 고아처럼.
현재 국내 만화시장은 크게 대본소용, 만화잡지, 단행본 등 3종류로 나뉜 다. 현재 합동(박원빈, 이재학), 세대(김현, 강촌, 조명운, 박봉성), 연 합(고행석, 조남기, 순정만화) 등 3개사가 운영하고 있는 총판을 통해 1 년에 3백여종, 3천여권의 대본소용 만화가 쏟아져 나온다. 만화잡지는 청 소년지 7종, 순정지 5종, 성인지 3종 등 모두 15종이 매주, 격주, 월간지 로 각각 5만∼10만부 가량 판매되고 단행본이 서점, 도서대여점, 대본소 등에서 유통된다. 옛날에 비하면 엄청난 규모로 성장한 만화시장이긴 하 지만 지금도 국내 만화시장을 제대로 파악하는 일은 굉장히 힘들다. ‘문 화의 사생아’ 취급을 받는 만화는 어디에도 제대로 집계가 되어 있지 않 기 때문이다. 만화산업 종사자들과 전문가, 그리고 문체부 문화산업국이 지난해 기준으로 작성한 ‘통계로 보는 문화산업’ 보고서 등을 종합해 주먹구구식으로 합산해 보자. 지난해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에 사전심의를 의뢰한 만화는 모두 5천5백건, 출판협회로 납본한 초판 신간발행부수 5천 5백92종, 1천8백2만1천7백25부, 판매액 3천1백49억원. 이를 1년 매출액으 로 다시 구분하면 대본소용 5백억(6천여권), 만화잡지 8백95억(광고비 포 함 9백50억), 단행본 1백억, 스포츠신문 연재 단행본 50억, 그리고 불법 유통(하루 약 1백50권) 3백억, 기타 출판용을 포함해 총 출판만화 4천억, 애니메이션 7천억, 팬시·캐릭터 1조, 관련 음반 2천억, 컴퓨터게임 4천 억, 테마파크 3천억 등 모두 3조원이라는 어마어마한 시장이 고구마 줄기 처럼 줄줄이 달려 있다.
이 엄청난 만화시장을 채우는 국내 만화가는 대략 5천여명. 하지만 실제 로는 2백명 정도가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작품활동을 할 뿐 대부분 공장 제의 부속품이거나 문하생, 그도 아니면 과거에 한번 만화를 그렸을 뿐이 다. 우리 만화시장이 이처럼 변칙적으로 형성된 이유는 대본소체제 탓이 다. 83년 <공포의 외인구단> 이후 성인들이 만화방을 찾게 되면서 작 가들은 갑자기 늘어난 수요를 충당할 수 없었다. 그러자 데생, 컷 등 기 초작업에서부터 완전분업화해 대량생산체제에 돌입, 자신은 작업에 거의 관여하지 않으면서 이름을 달아 작품을 찍어내는데 이를 ‘공장’이라 부 른다. 일부 공장은 종사자가 1백명이 넘어 몇개의 팀으로 운영되는 곳도 있다. 이는 일본만화가 우리 만화시장을 장악하는 지렛대 구실을 하기도 했다. 대본소체제와 공장운영은 기성작가를 이어줄 신진작가 배출을 원천 봉쇄했고, 여기에 88올림픽을 기점으로 다양한 레저·오락문화의 발달, 비디오 보급 등으로 대본소가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하면서 70년대 후반 한때 2만여개에 이르렀던 것이 현재 4천5백여개로 쪼그라들었다. 대본소 침체는 우리나라 만화시장 발전에 긍정적이긴 하나 그뒤를 도서대여점이 바통터치하듯 이어받아 별반 차이가 없어졌다. 대여점 수는 현재 1만8천 여개 정도다.
일본만화, 시장 공백 틈타 무혈입성
이 과정에서 아동·소년만화 시장에 공백이 형성됐고 이 무주공산에 일본 만화가 무혈입성한 것이다. 일본만화와 한국만화의 비율은 현재 대략 60( 해적판 포함):40 정도로 추산된다. 전세계 애니메이션의 40%를 차지하는 거함 일본만화는 90년 <드래곤볼>을 시작으로 표절 및 복제판을 포함 해 삽시간에 한국만화 시장을 점령했다. <드래곤볼> <란마> < 슬램덩크> 등은 최고 2백만부의 판매고를 기록했다. 만화, 만화비디오, LD까지 합하면 연 수천억원에 이르는 시장을 일본 기업이 독식하고 있는 셈이다. 처음엔 기모노를 한복으로, 이름·지명을 모두 한국식으로 표기 했으나 최근엔 이름을 일본명 그대로 싣고, 작품에 손대지 말 것을 계약 조건에 삽입해 기모노, 게다, 일본 이름들이 여과없이 등장하고 있다. 일 본출판사들의 속셈은 직배를 위한 징검다리 역할을 기대한 것이지만 독자 입장에선 ‘눈 가리고 아웅’식보단 무대가 일본임을 솔직히 밝히는 편이 정서적 혼돈을 줄일 수 있다는 점에서 차라리 낫다는게 중론이다. 일본만 화는 캐릭터, 스토리 라인이 강렬하고, 거의 무제한의 자유 분위기에서 상상력을 키운 데다, 일본시장에서 검증을 거친 작품들만을 골라 수입하 기 때문에 국내만화에 비해 경쟁력이 뛰어난 게 당연하다. 일본에선 1년 에 만화잡지 12억5천만부, 단행본 4억5천만부 등 약 17억부(4천8백77억엔 )의 만화가 팔리고 있는데 이는 출판물 전체 판매부수의 37.5%, 판매금액 의 22.9%에 이른다. 이런 시장에서 태어난 일본만화는 문학작품을 뛰어넘 는 것에서 저질 포르노에 이르기까지 스펙트럼이 종횡으로 끝없이 펼쳐져 있다. 여기에 일본 특유의 상업성은 애니메이션, 캐릭터·팬시, 게임, 테 마파크로 이어지는 관련 산업을 육성시켜 출판만화의 뒤를 잇고 있다. 그 래서 이런 수순의 수입 또한 만화의 뒤를 따른다. 국내만화 캐릭터 상품 은 ‘둘리’가 거의 유일하다. 국내 문방구와 완구점을 장악한 ‘슬램덩 크’ ‘짱구’ ‘요술공주 핑키’ ‘세일러 문’ 인형, 요술봉, 장난감, 모두 일본만화에서 솟아나온 것들이다. 올해가 가기 전에 ‘에반게리온’ 이 동참하며 돌풍을 몰고 올 건 뻔한 일.
그런데 한국만화 작금의 사태를 보자. 최근 만화가 일진회의 교과서가 되 었다며 일본 폭력만화 단속에 검찰이 발벗고 나섰다. 언론과 당국이 ‘마 녀사냥’식으로 만화를 몰아붙여 학부모들에게 만화는 마약보다 더 무서 운 유해매체로 인식시키고 말았다. 심지어 만화 1세대 학부모들마저. 최 근 단속이 심화되면서 대본소, 대여점, 서점 등은 경찰의 싹쓸이 바람에 책장 한 부분이 휑하니 비어버렸고, 일부 서점은 아예 만화를 취급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할 정도다.
서울 성동구에서 총판을 운영하는 황희권 신진도서 사장은 “뚜렷한 처벌 규정이나 기준도 없는 마구잡이 단속은 엄연한 재산권 침해”라고 목소리 를 높였다. 우리만화연대회의(우만연) 이동수 사무국장은 “선정, 폭력은 규제돼야 하겠지만 현재 단속은 만화말살 정책이다. 방송, 영화의 폭력이 만화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 만화종사자들이 힘이 없으니까 두 둘겨 맞는 것 아니냐? 학원폭력 책임회피를 위한 희생양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고 말했다. 만화가 황미나(36)씨도 “<캠퍼스 블루스&g t를 일진회 만든 학생들만 봤는가? 연못 물을 뱀이 먹으면 독이 되고, 소 가 마시면 우유가 된다. 뱀이 마셔서 독이 됐으니 연못 자체를 없애자는 게 당국의 논리다”며 “여름햇살이 강할 땐 그림자도 강한 법이다. 그런 데 그림자를 그리지 말라고 하니, 햇살도 희미하게 그릴 수밖에 없는데 손발 묶은 상태에서 어떻게 이길 수 있느냐”고 말했다.
“손발 묶어두고 일본에 맞서란 말인가”
ㅎ고 3학년에 재학중인 이동혁(18)군은 최근 일본만화에 대해 “일본만화 의 인기가 좋긴 하나 만화를 보고 폭력을 배웠다는 건 맞지 않다. 신문에 거론되는 폭력만화 대부분은 의협심 많은 아이가 돈을 뺏고 폭력을 휘두 르는 나쁜 아이들을 무찌르는 것이다”고 말했다.
실제 일본만화 가운데 여교사를 성폭행하고, 학원깡패들이 총기를 휘두르 며 집단 패싸움을 벌이는 문제있는 만화들이 분명 있다. 대부분 이런 만 화들은 해적출판사들의 무단복제다. 이들 출판사들이 많은 일본만화 중 폭력, 선정성 짙은 만화에만 손대는 것이다.
현재 심의는 청소년용에 한해 불문, 주의, 경고, 제재 등의 4등급으로 나 눠지는데 문체부나 경찰, 검찰 등의 의뢰가 들어올 경우 한국간행물윤리 위원회에서 판단을 내린다. 7월1일 청소년보호법이 시행되면서 이젠 사후 심의다. 성인용이라 하더라도 포르노로 분류가 되면 형법에 의해 제재를 받는다. 그래서 만화출판업자들이 먼저 간윤에 문의한다. 자기검열로 스 스로를 옥죄는 결과를 낳고 있는 것이다.
만화가협회 권용훈 사무국장은 “자기검열은 표현, 창작에 있어 사전·사 후 검열보다 더 무섭다. 우리나라 만화의 시나리오와 캐릭터가 약한 이유 가 오랜 기간의 무수한 검열장치 때문”이라고 말했다. 만화출판사의 한 관계자는 “이런 식이라면 앞으로 나올 만화는 둘리밖에 없다. 성인만화 도 너무 오래 작가적 상상력이 위축돼 소재가 좁아져 아동용 만화가 좀더 폭력, 선정적이 된 것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사실 둘리도 원래 검열을 피하기 위해 공룡으로 탄생한 것이다. 만화에서 어린이는 어른들에게 반 항해선 안 되기 때문에.
최근 SICAF, 춘천만화축제, 동아·LG국제만화페스티벌 등 국내 만화축제 가 5개나 경쟁적으로 개최되고, 삼성, 현대, 대우, 쌍용, 동양, 코오롱, 제일제당, 동원 등 웬만한 대기업들이 다 애니메이션에 뛰어들었다. 돈이 된다니까. 하지만 이의 성공은 만화산업의 인프라인 출판만화 시장의 성 장이 우선돼야 하고, 무엇보다 만화에 대한 이해와 애정이라는 토대가 뒷 받침되지 않는다면 공염불에 그치고 말 것이다. <아마겟돈> <붉은 매> 등 출판만화 시장에서 폭발적 인기를 누렸던 만화들이 애니메이션 에선 무참한 패배를 당한 이유가 그것이다.
국내에 만화관련 학과를 개설한 대학이 10곳이 넘는다. 우리나라만의 독 특한 현상이다. 이들이 우리만화에 어떠한 바람을 불어넣느냐에 따라 한 국만화 발전의 무게가 달라진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거대군단으로 자리 잡고 있는 수많은 만화 마니아들이 바로 우리 만화산업의 자산이다. 세종 대 영상만화학과 강사 한창완(31)씨는 “미래사회는 소프트웨어 각축장이 다. 만화, 영화는 그 소프트웨어를 채우는 콘텐트웨어(contentware)다. 결국 문화상품의 승부수가 여기에서 결정난다”고 말했다.
미래 산업의 뿌리에 영양분 공급해야
그리고 또 하나. 만화는 산업만이 아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수많은 사 람들이 보고 즐기는 상업예술이다. 허영만의 <카멜레온의 시> <고 독한 기타맨>을 보면 머리에 쥐가 나고, 이현세의 <남벌> <사자 여, 새벽을 노래하라>를 보면 가슴이 요동치고(국수주의이긴 하지만), 허영만의 <오!한강>, 김혜린의 <북해의 별>은 80년대 운동권의 필독서였고, 백성민의 <토끼>, 이두호의 <바람소리>에선 백번의 세미나보다 더 적확하게 ‘민중’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고, 이희재의 &l t간판스타> <새벽길>을 보면 가슴이 아파온다. 그리고 강경옥의 &l t별빛 속에>서 아빠와 함께 언덕에 앉아 바라보던 검은 밤하늘 별은 알 퐁스 도데의 그 ‘별’과는 비교가 안 된다. 또 황미나의 <안녕, 미스 터 블랙> <이오니아의 푸른 별>을 보고 얼마나 많은 소녀들이 그 맑은 눈에 눈물을 글썽였을까? 한희작, 허무영, 양영순은 또 얼마나 눈에 불을 켜고 보게 되는가?
오늘은 오랫동안 잊었던 바벨탑에 들어가 로뎀, 로프로스, 포세이돈을 만 나고 싶고, 박포 도장에서 하리케인과 최도천도 만나고 싶고, 무당거미도 만나고 싶고, 일지매도 만나고 싶고, 혜성이와 엄지도 만나고 싶다.
권태호 기자
© 한겨레신문사 1997년07월2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