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이야기
1997년07월24일 제 167호 한겨레21

일본만화는 구제불능?

일본 폭력만화가 문제란다. 거기 나오는 묘사 때문에 애들이 교사에 대한 적개심을 키우고 폭압적인 깡패문화에 경도되며 사람목숨을 경시한단다. 하지만 과거 학생시절 저 선생 죽어버렸으면. 아니, 죽여버렸으면 하고 바라본 적이 없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주먹을 과시하며 패를 지어 무리 를 휩쓸고 다녀보고팠던 생각이 없었던 사람은? 그런데 우리도 그때 만화 와 영화에 물들어 그런 철없는 생각을 품었었나? 시대가 변한 것도 사실 이고 어린 청소년들이 만화, 영화로부터 전혀 영향을 안 받는 것도 아니 지만, 폭력을 권하는 사회 자체를 거론하지 않는다면 날로 흉폭해지는 청 소년문제 해결은 요원할 것이다. 폭력 청소년들에게 이른바 영향을 끼쳤 다고 거론되는 일본만화들 중에는 꽤 멀쩡한 작품도 있고, ‘쌈마이’(싸 구려) 쓰레기도 있다. 무책임한 언론이 선도하는 대로 부화뇌동할 것이 아니라, 직접 이것들을 찾아읽고 냉정하게 생각해보는 건 어떨까? 이젠 대부분의 대여점에서 철수돼 찾아보기가 쉽진 않겠지만.


<용>

<용>(龍)은 요즘 학교폭력배들이 폭력조직의 의식과 행태를 배우는 교과서가 되고 있다며 집중포화를 맞고 있는 일본만화 중 하나다. 하지만 이것이 정말이라면, 그들은 <죄와 벌>을 읽고 도끼살인을 배우고, &l t등신불>을 읽고 분신자살할 그런 사람들이다. <용>은 무사와 게이 샤의 전통이 두터운 1920년대 교토를 무대로, 진정한 무사를 꿈꾸는 17세 소년 류와 그를 사모하지만 기생의 법도대로 남의 첩이 된 게이샤 코스즈 , 그리고 강인한 정신으로 자기 삶을 개척하는 가난한 소녀 테이가 겪는 격동의 세월을 그린 작품이다. 일본가옥과 축제풍습, 옷매무새 등을 세밀 히 묘사한 아름다운 그림과, 의리와 사랑을 강조하면서도 유치하지 않은 줄거리 전개 탓에 걸작으로 꼽히기에 손색이 없다. 일본판, 만화판 <혼 불>이래도 좋을 정도다. 일본죽도로 사람을 치는 장면, 선배가 후배 뺨 을 마구 때리는 장면, 목욕탕에서도 선배에게 설설 기며 인사하고 등을 밀어주는 장면이 나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은 무사전문학교의 나날을 그리기 위한 묘사에 지나지 않으며 몇컷 되지도 않고, 무엇보다 작품이 이것을 옹호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작품의 대부분은 대동 아 공영을 외치던 일본의 격동기에 사람들이 맞닥뜨린 곤경과 사회문제들 , 사상투쟁과 일본인들의 향수를 자극할 만한 일본문화를 묘사하는 데 할 애된다. 일본문화에 관심있는 사람들에게는 가벼운 입문서로도 권할 만하 다. 일본문화에 적개심을 가지고 있다면 일본문화를 세세히 소개하니 나 쁜 만화라고 할 수는 있을지언정, 폭력만화라고 보긴 어렵다. 일본의 조 선인을 묘사할 때도 삐딱한 시선은 없으며, 오히려 당시 일본 제국주의자 , 군국주의자, 고등경찰들에 대한 비판이 심심찮게 나타난다.



<오렌지 블루스>





학원 액션물(학원 폭력물)의 전형. 제건고등학교 권투부 학생 타이손과 그 친구들이 맞부딪치는 각종 싸움- 동네 뒷골목, 학교 화장실, 권투부 체육관 등 다양한 무대와, 일대일, 집단 대 집단, 집단 대 개인, 맨주먹, 각목, 야구방망이 등 다양한 방법으로-이 주요 줄거리며, 그들을 좋아하 는 여학생들과 선생님, 그리고 라이벌들과의 에피소드가 곁들여진다. 일 본에서도 장기연재물인 만큼 줄거리 구성력도 일정 수준은 된다. 극화체 의 살벌한 캐릭터 묘사 중간중간에 느닷없는 유머를 삽입해둔 것도 특징. 피가 흩뿌려지고 만신창이로 깨지는 장면들과, 끼리끼리의 우정과 의리묘 사 등이 학원 액션물의 전형답다.



<남자의 바다>




전철 안에서 교사를 학생들이 몰매 놓고 교사의 애인을 능욕하는 장면 때 문에 유명해진 만화. 전개와 캐릭터 설정, 줄거리 짜기 등 그 어느 부문 도 둘째가라면 서글플 정도로 유치한 만화다. 바닷가지역 한 도시를 꽉잡 고 있는 조직폭력배 두목 전태성의 전지전능한 능력이 주요 볼거리다. 철 없는 어린 소년들이 한때 가져봄직한 모든 바람들, 무소불위의 힘과 전투 력, 목숨걸고 충성하는 졸개무리, 쉽게 갈취해 쌓아둔 돈, 부자고 파워도 있지만 자식을 버린 아버지, 그런 아버지를 향해 불타는 복수심, 자기만 바라보는 예쁘고 착한 여자, 모든 사람들을 굴복시키는 카리스마…. 이 만화는 이렇게 애들이 바라는 맹목의 모든 것들을 숨가쁘게 채워넣고 나 열하기에 바빠, 상황설정과 이야기 전개에 필요한 최소한의 생각이나 노 력도 방기해 버린다. 폭력을 위한 폭력이 가득한 만화.



<할렐루야 보이>




주위에 괴롭히는 녀석들도 많고 화는 나는데 힘은 없고, 이럴 때 누가 나 서서 좀 도와줬으면, 힘센 친구가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충족시켜주려고 만들어진 듯한 만화. 인류구원을 위해 2천년 전 하나님이 아들을 내려보 냈듯이 요즘 힘없는 학생들을 위해 신은 ‘할렐루야 보이’를 땅으로 보 낸다. 인간의 몸으로 내려온 할렐루야 보이지만 평균 이상의 힘과 재치로 못된 녀석들을 혼내주는 정의의 사자가 된다. 극화요소와 명랑요소를 어 정쩡하게 혼합해놓은 바람에 함량미달의 혐의가 도처에서 발견된다. 엉성 한 그림체 때문에 폭력묘사가 별로 폭력적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점은 장 점이라고 해야 되나 단점이라고 해야 되나.


<파워클럽>




줄거리 전개는 대충대충 하면서, 이유야 여하간에 일단 사람을 치는 장면 만 나오면 맞기 직전, 맞을 당시, 맞은 직후를 갑자기 슬로 비디오로 각 각 한컷씩 할애해 그려주는 이상한 만화. 주인공들 신분이 학생일 뿐, 학 교와 결부된 이야기나 학교 안에서 벌어지는 싸움은 별로 없고 주로 계속 밖에서 싸우는데, 누구와 누구가 만났건 간에 아무튼 만났다 하면 무조건 싸운다. 줄거리 구성력뿐 아니라 그림실력도 보잘것 없어 때로는 유머러 스하게 보이려고 일부러 이렇게 그린 건가 생각될 정도. 학교교실을 배경 으로 한 싸움이 별로 없는 것은 그린 이의 그림실력이 부족한 점이 주요 이유가 아닐까. 배경을 안 그려도 되는 공터에서 그저 종일 싸운다.



<크레이지 보이>




중학교 때부터 고등학생들 돈을 뺏는 짓도 서슴지 않을 만큼 대담한 싸움 꾼이었던 박승부와 강형준, 두 친구는 고등학교 진학 뒤 여전히 싸움을 일삼으며 더욱 위용을 떨친다. 학교 선배들이 시비를 걸어오고 삐딱한 녀 석들이 시시때때로 전학을 오고 또 나쁘고 힘센 녀석들과 이렇게 저렇게 알게돼 어쨌든 계속 싸우는데, 작가가 적어도 폭력묘사에 대해서만큼은 머리를 계속 썼는지 채찍, 수갑, 사냥개 등등 다양한 무기(?)가 동원되고 얻어맞은 상처나 맞는 순간의 고통묘사도 꽤 창의적(?)이다. 주인공들은 다른 폭력만화 주인공들이 치졸하고 조악한 수준에서나마 표방했던 대의 나 의리도 중요시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이들은 재미있다고 생 각하는 걸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겠다고 드러내놓고 주장하며, 폭력은 하 나의 스포츠 내지는 재미일 뿐임을 당당히 밝힌다.


오은하 기자/ 한겨레 씨네21부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07월24일


커버스토리 포커스 문화시대 특집 지난호 전체보기 처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