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점
1997년07월24일 제 167호 한겨레21

진짜 집회 막는 가짜 집회

(사진/LG 10개 계열사가 1년 동안 집회신고를 낸 LG 본사 앞.)

“이법은 적법한 집회 및 시위를 보장하고 위법한 시위로부터 국민을 보 호함으로써 집회 및 시위의 권리 보장과 공공의 안녕질서가 적절히 조화 되게 함을 목적으로 한다.”


대우가 처음 LG,삼성 등도 뒤이어

문제의 발단은 “집회 또는 시위의 시간과 장소가 경합되는 둘 이상의 신 고가 있고 그 목적으로 보아 서로 상반되거나 방해가 된다고 인정될 경우 에는 뒤에 접수된 집회 또는 시위에 대하여는 금지를 통고할 수 있다”는 집시법 제8조2항. 집시법은 또 집회신고를 48시간 이전에 하도록 하고 있 다. 이에 따라 누구든 집회신고를 먼저 접수하기만 하면, 같은 시간 그 장소에 다른 사람은 집회를 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지난해 8월 대우그룹은 해고노동자들의 시위를 막기 위해 집회장소 선점 이라는 이 방법을 처음으로 이용했다. 대우그룹과 해고노동자들은 김우중 회장 집 앞과 힐튼호텔 앞자리를 먼저 차지하기 위해 날마다 치열한 경쟁 을 벌였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노동자들과 회사쪽의 다툼은 숨바꼭질 같 은 것이었다. 노동자들도 6 대 1정도의 비율로 집회를 열 수 있었던 것이 다.

대우의 수법을 그대로 전수받아 더욱 세련되게 만든 것은 엘지그룹이다. 날마다 이어지는 해고자들의 회사 앞 집회를 막기 위해 엘지그룹은 지난 해 12월26일, 10개 계열사를 동원해 97년 말까지 1년 동안 회사 앞에 집 회신고를 냈다. 이에 따라 본사 앞 광장을 비롯해 마포대교와 지하철 5호 선 여의나루역 앞까지 반지름 1백여m 일대에서는 올해 들어 아무도 집회 를 열지 못하고 있다. 이어 삼성그룹이 지난 6월 삼성자동차보고서 파문 과 관련한 기아자동차 노조원들의 시위를 막기 위해 태평로 사옥 주변에 1개월치 집회신고를 냈고, 대전성모병원과 한국타이어도 회사 앞에 2∼6 개월짜리 집회신고를 내놓고 있는 상태다.

물론 기업들은 집회신고를 하면서 ‘환경캠페인’ ‘청소년 선도활동’ 등의 명목을 붙인다. 그러나 실제로 집회를 여는 경우는 거의 없다. 당일 아침 집회취소신고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이같은 집회장소 선점 수법은 최근 종교단체에까지 전파됐다. 천주교 대전교구청은 회사쪽의 집회장소 선점으로 집회장소를 잃은 대전성모병원 노조원들이 교구청 앞에서 농성 을 벌이자 지난 7월1일부터 2개월 동안 그 자리에 집회신고를 낸 것이다. 이제 어디로 파급될지 아무도 모른다.

그렇다면 법이 개정된 지 6년이나 지난 지금에 와서야 왜 이런 일들이 일 어나고 있는 것일까? 예전에는 누구도 법의 허점을 몰랐단 말인가. <한겨 레21>의 취재 결과, 문제는 경찰의 법해석이 왔다갔다한 데서 비롯된 것 으로 드러났다.

지난해 대우그룹과 대우해고자들이 집회장소 선점을 위해 숨바꼭질을 벌 인 이유는 당시 경찰이 한번 신고를 할 때 최고 사흘까지만 연속해서 집 회신고를 받아주었기 때문이었다. 집시법에는 “한꺼번에 며칠까지 집회 신고를 받아줄 수 있다”는 규정이 없기 때문에 경찰이 ‘관례’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관례도 경찰서에 따라 달라 ‘제멋대로’다. 종로경찰서 관계자는 “날마다 신고를 하러 오기 어려운 경우 최고 1주일까지를 한계 로 본다”고 말했으나, 영등포경찰서 관계자는 “한달까지는 신고를 받아 줄 수 있다”고 말했다.


집회 백안시 하는 경찰자세가 사태 키워

경찰의 내부지침은 집회신고는 한번에 하루씩만 받아주도록 되어 있다. 그리고 그런 지침이 지켜지는 동안에는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경찰 이 집회신고를 한꺼번에 길게 할 수 있도록 점차 법해석을 달리해온 것이 다. 공교롭게도 그 시기는 신한국당이 지난해 정기국회에서 “집회를 할 경우 장소 소유자의 허가서를 받도록” 집시법을 개정하려다 무산된 이후 다.

경찰의 한 관계자는 “내부지침은 외부적으로는 효력이 없다. 경찰로서는 이런 장소 선점을 노린 집회·시위 신고에 대해 규제할 방법이 없는 만큼 , 집회·시위 기간을 일주일로 제한하는 등의 법적 보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문제는 집회를 보호하기보다는 집회라면 무 조건 나쁘게만 보는 경찰 간부들의 태도인지도 모른다. “현 집시법은 집 회를 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주는 피해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잖아요.” 취재과정에서 만난 몇몇 경찰 간부는 오히려 집회를 더욱 철저히 규제할 수 있도록 법을 개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남구 기자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07월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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