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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
1997년07월24일 제 16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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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만원/ 군사평론가
황장엽 전 노동당비서의 기자회견이 ‘황풍’을 일으키고 있다. 이로 인 해 정치권과 증권계가 긴장하고 국민들은 전쟁을 우려하고 있다. 북한의 남침 가능성과 황장엽리스트 때문이다. 그러나 이 황풍은 자연풍이 아니 라 인조풍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능력도 없는 한국 정부가 왜 법석인가
첫째, 전쟁은 일어날 것인가. 주한미군만 없으면 전쟁은 금방이라도 일어 날 수 있을 것이다. 미군의 개입만 없다면 인민군은 남한을 불과 3일 이 내에 충분히 점령할 수 있다. 북한은 이틀 만에 서울을 포위할 수 있다. 이는 6·25때보다 더 쉬운 일이다. 그러나 북한은 주한미군 때문에 다된 밥을 앞에 놓고도 먹지 못한다며 땅을 치고 안타까워 하고 있다.
김정일의 생각은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를 것이다. 한때는 서울에 있는 수 만명의 미국 및 일본인들을 인질로 삼으면 미국과 일본의 개입을 차단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인질로 잡힌다는 것은 미국으로선 엄 청난 악몽이기 때문에 미국은 북한이 서울을 포위하기 이전에 핵무기를 쓸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지금의 전쟁은 2주일 이상 지속되면 안 된다 . 현대무기의 가공할 위력 때문에 지는 쪽도 이기는 쪽도 모두 폐허가 되 기 때문이다. 이 엄청난 살상과 파괴를 막는 유일한 길은 조기에 핵무기 를 쓰는 길이다. 장기전에 의해서는 수천만의 생명이 절단나지만, 핵무기 를 쓰면 불과 수십만의 인명만 절단나기 때문이다. 더구나 북한은 테러국 으로 지목돼 있기 때문에 초전에 비참한 보복을 받아도 북한을 옹호할 나 라는 없을 것이다.
전쟁이 나면 작전은 미국이 지휘한다. 미국은 자존심과 명예를 걸고 전쟁 을 승리로 이끌어야 한다. 걸프전에서 보았듯이 미국과의 전쟁은 세계와 의 전쟁이다. 이 세상에 미국과 세계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킬 나라는 없 다. 미국과의 핵협상 과정에서 나타난 김정일의 관찰력과 판단력은 클린 턴이나 김영삼 대통령보다는 뛰어났다. 따라서 인민군의 전쟁수행 능력이 아무리 우수하고, 경제적 어려움이 아무리 김정일을 압박하더라도 그가 단기에 전쟁을 일으킬 확률은 매우 적다.
전쟁이 나면 한국군 수뇌부는 할 일이 없다. 정작 전쟁을 떠맡는 미국은 황장엽 전 노동당비서의 진술에 새로운 정보가 없다며 태연한데, 능력도 역할도 없는 한국 정부가 나서서 국민에게 공포감을 주는 것은 우스운 일 이다. 더구나 국민은 인민군 방위비의 4배에 해당하는 세금을 한국군 국 방비로 내주었다. 그 많은 세금을 다 어떻게 하고 이제 와서 전쟁공포 분 위기를 확산시킨단 말인가. 정부가 황풍을 왜 일으켰는지 모르지만 그 황 풍은 다시 정부쪽으로 불게 될 것이다. 인민군 군비의 4배를 사용해온 정 부는 전쟁예방을 위한 확실한 대책을 내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황리스트는 증거인멸의 기회
둘째, 황리스트란 무엇인가. 황리스트는 그 존재 여부까지도 사전에 발설 될 수 없는 성격의 것이다. 황장엽 전 노동당비서는 몇명의 인사를 거명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음지에서 이뤄져야 할 수사단서에 불과하다. 비록 이름은 밝히지 않는다 해도 리스트가 있다고 발표만 해도 간첩들은 꼬리를 감춘다. 꼬리를 감추면 단서와 증거를 잡지 못한다. 결국 리스트 가 있다는 말을 유포시킨 그 자체로 그들에게는 증거인멸의 기회를 제공 한 셈이 된다.
그러면 정부는 간첩을 잡는 데 목적을 두었는가 또는 선거철에 누구를 겁 주는 데 목적을 두었는가. 황장엽 전 노동당비서 일행의 동시망명은 황풍 의 본질을 분석하는 데 결정적 단서가 될 수 있다. 황씨 일행은 민족을 전쟁의 위험에서 구하기 위해 9명의 직계 가족과 그에 딸린 수많은 식솔 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고 한다. 그 정도 희생이라면 그들은 전쟁이 임 박했다는 데 대한 다급한 논리를 제공했거나, 전쟁을 막을 수 있는 확실 한 방안을 제시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 것도 내놓지 못했다.
전쟁 시기에 대해서는, 언젠가 한번은 꼭 전쟁을 한다거나 남한의 정세가 혼란스럽고 동맹국의 역량이 분산돼 있을 시기를 택할 것이다는 등의 이 미 잘 알려진 원론적 답변이 전부였다. 민족을 위해 가족을 버릴 만큼 시 급성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전쟁을 막고 통일을 이룩할 수 있는 뚜렷한 방안을 가지고 왔는가. 그것도 아니었다. 전쟁 방지를 위해 황씨가 제안한 방안은 너무 나 뜻밖의 것이었다. 안기부를 강화하고 군비경쟁을 촉진시켜 북한을 경 제적으로 조기붕괴시켜야 하고, 데모나 임금투쟁을 하지 말라는 것들이었 다. 이는 공안정국을 형성하고 북한을 자극하여 긴장과 전쟁을 촉진시킬 위험한 발상일 뿐 결코 전쟁을 막기 위한 방안이 아니다. 결국 그들은 두 가지의 망명 명분 중에 단 한개도 증명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면 그들의 진짜 망명동기는 무엇일까. 김덕홍씨는 황비서를 따라다니 는 부속실 요원처럼 비쳐지고 있지만 사실상 황 비서는 70줄의 ‘지는 해 ’고, 김덕홍씨는 50줄의 ‘뜨던 해’다. 더구나 황 비서의 논문을 보면 지리하고 앞뒤가 정연하지 않다. 그러한 논리를 가지고 어떻게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 결정적인 공헌을 할 수 있으며, 뜨던 해인 김덕홍씨 로 하여금 가족을 버리고 따라오게 할 만큼의 힘을 줄 수 있었겠는가. 그 래서 동시망명의 기회는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이러 한 의구심을 더욱 짙게 하는 것은 선거철마다 나타나는 안보 신드롬 때문 이다.
황장엽의 판단력은 쇠퇴했다
전쟁 가능성에 대해 황장엽씨가 알려준 내용들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들 과 모두 일치한다. 그러나 그의 판단력에 구멍이 감지된다. 북한은 인민 군에게 아군복장을 입혀 북침을 조작할 것이라고 했다. 아무리 인민군에 게 국군복장을 입혀 사건을 조작한다 해도 미군의 세계적 공신력을 의심 할 나라는 없다. 미국 항공모함에 가미가제식 육탄돌격을 통해 미국의 전 쟁의지를 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김정일은 제정신이 아니다. 일본을 초토화시킨다고 위협한다 해서 미일의 전쟁의지를 꺾을 수 있다고 생각했 다면 그것도 제정신이 아니다. 제정신이 아닌 그가 어떻게 북한을 장악할 수 있으며, 미국과의 핵협상을 그렇듯 절묘하게 주도했을 수 있었을까. 이러한 함량미달의 발언들이 황씨 생각이라면 그의 판단력은 이미 쇠퇴한 것이다. 만일 당국이 이러한 발언들에 가치를 부여해서 스크린하지 않았 다면 당국의 판단력에도 상당한 문제가 있다.
김덕홍씨는 통일에 대한 주옥 같은 명언을 남겼다. 평화론자는 애국자이 고, 통일론자는 비애국자라는 말이다. 형은 잘살고 동생이 못살면 매번 다 형님이 밥을 산다. 이는 형님 입장에서나 동생입장에서 다 재미없다. 동생도 형님만큼 잘살아야 만남이 재미있다. 둘 다 비슷하게 살면 합의에 의해 울타리를 터놓고 살 수 있을 것 아니냐는 것이 그의 통일 지론이었 다. 이 말에는 엄청난 지혜가 담겨 있다. 통일의 길이 열려 있는 한, 남 침의 길도 항상 열려 있고, 남침의 길이 열려 있는 한 한반도에 평화가 정착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휴전선은 적대관계를 가로지르는 장벽이다. 김덕홍씨가 말한 울타리는 이 웃간의 경계선이다. 휴전선을 단번에 트느냐, 또는 휴전선을 먼저 울타리 로 바꾼 다음 피차간에 울타리가 불편하다고 느낄 때 울타리를 트느냐에 대한 절차 문제는 남북한 관계를 풀어가고 통일의 길을 여는 데 가장 중 요한 전략이 된다. 이제까지 우리는 전자만을 고집해왔다.
통일을 인위적으로 이뤄야 하느냐, 또는 순리에 따라 자연적으로 이뤄야 하느냐에 대한 선택은 매우 중요하다. 이는 통일 이전의 남북한 위상을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 좌우된다. 통일 이전의 남북한 위상은 두 가지 로 설정될 수 있다. 첫째는 현재처럼 두개의 ‘불법집단’으로서의 위상 이다. 현재는 남북한 서로가 서로를 불법집단이라고 생각하여, 하루라도 빨리 다른 반쪽을 흡수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북한이 통일을 소리높이 외치면 남한이 긴장했고, 남한이 통일을 외치면 북한이 긴장해왔다. 이러한 상태가 지난 50년간 지속돼 오면서 우 리는 늘 긴장 속에서 엄청난 행복과 삶의 질을 희생당해왔다. 이것이 바 로 통일이 평화를 깨고 있는 모습이었다. 따라서 김덕홍씨가 통일론자는 비애국자라는 말은 역설적으로 엄청난 명언이다.
둘째는 두개의 주권국가로서의 위상이다. 지금 국제적으로는 남북한이 엄 연한 두개의 주권국가다. UN에도 동시 가입돼 있지 않은가. 국민정서는 통일이라는 최종의 그림만 생각한 나머지 통일 이전 두개의 주권국가를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는 미래의 통일을 앞당기고, 현재의 긴 장을 해소하는 거의 유일한 방안이라는 사실에 우리는 하루 빨리 착안해 야 한다.
두개의 주권국가에 사는 하나의 민족은 마치 미국과 캐나다 국민들처럼 마음대로 왕래할 수 있다. 그래도 간첩이 아니다. 이렇게 해야 대량교류 가 이뤄지며, 대량교류는 통일의 지름길이 아닌가. 한 민족이 자유롭게 왕래하면 그것이 바로 통일이 아닌가. 그렇게 살다 보면 언젠가 두개의 국가는 울타리가 거추장스럽다고 느낄 것이다. 그래서 유럽 대륙이 하나 의 울타리로 통일되고 있지 않은가.
지금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다. 가장 확실한 통 일 방법은 지금의 두개의 범죄집단간의 대립 시스템을 두개의 독립국가간 의 평화공존 시스템으로 전환하는 길이다.
이는 두 가지 변화를 수반한다. 하나는 주변국의 중재와 UN의 보장하에 현재의 휴전선을 국경선으로 전환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UN 감시하에 상호감군을 추진하는 것이다. 얼핏 보아 이는 영구분단 같지만 현실적으 로는 가장 빠른 통일의 지름길인 것이다.
© 한겨레신문사 1997년07월2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