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1997년07월24일 제 167호 한겨레21

갈곳은 남쪽 뿐입니다

(사진/북한국경경비대. 밤이면 탈북자를 쫓아 국경을 넘기도 한다.)

탈북자 중에는 국경을 건너면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공민증을 찢어 압록강이나 두만강에 버리는 이들이 많다. 북으로 다시 돌아가지 않겠다 고 결심한 이들의 공통점이다. 그리고 이렇게 외친다고 한다. “조선아, 잘 있거라.”


반역자가 되었다는 고통에 몸부림

식량난민들이 탈북을 결심할 때 심리적으로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조국 반역자’가 된다는 죄책감이다. 북한의 현행 헌법 제86조는 “조국과 인 민을 배반하는 것은 가장 큰 죄악이며 조국과 인민을 배반하는 자는 법에 따라 엄중히 처벌한다”고 규정하고 있고 그들은 그렇게 배워왔다. 또 북 한형법은 ‘조국반역죄’를 국가주권과 사회주의제도의 대외안전을 침해 하는 반혁명범죄로 분류한다. 북한은 반혁명범죄를 “쟁취된 노동자, 농 민의 혁명정권과 사회주의제도를 전복하고 착취계급으로서 잃어버렸던 옛 지위를 되찾으려는 목적 밑에 사회주의경제제도를 파괴하며, 부패한 부르 주아 반동사상을 유포시킴으로써 사회주의적 근로자들이 나라의 체제를 침해하는 범죄행위를 감행하도록 책동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사회적 위험 성이 가장 크고 극악한 범죄로 취급된다”고 못박고 있다. 북한에서 조국 반역죄를 저지른다는 것은, 북한사회에서 다시는 사회구성원으로 권리를 누리기 힘들다는 뜻이다. 한 식량난민은 “북한사회에서 조국반역이나 민 족반역이라는 말을 듣는다는 것은 사회정치적 생명에 대한 사형선고나 마 찬가지”라고 말했다.

실제로 북한으로 돌아가지 않으려고 결심한 많은 탈북자들은 “내가 조국 을 반역했다”며 괴로워 한다. 대학을 졸업한 한 탈북자는 한국의 한 월 간지에 나온 김일성 주석의 사진을 보자마자 눈시울이 붉어지며 “이국땅 에 와서 수령님의 영상을 뵈니 두개의 양심을 가진 내가 한없이 부끄러워 집니다”고 말했다. 배가 고파 죽기 직전에 생존을 위해 자식들과 함께 탈출한 이들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다. 어쨌든 이들에게 ‘탈북=조국반역 ’이라는 등식은 신념체계로 굳어져 있었다.

두만강과 압록강을 넘어 중국으로 오는 이들 가운데 90% 이상은 먹을 것 을 구하기 위해 나온 이들이다. 말 그대로 식량난민이다. 그러나 이들이 국경을 넘는 순간 식량(경제)문제는 곧 정치문제로 바뀐다. 그리고 이들 은 조국반역자가 된다. 물론 식량만 구해 곧바로 북으로 다시 들어가는 이들은 경제범으로 인정돼 일정기간 노동교화소에 보내진다는 것이 탈북 난민들의 증언이다.

북한에서 국경을 넘어선 사람은 일단 정치적 색채를 띠기 때문에 국가보 위부(한국으로 치면 ‘국가안전기획부’)에서 취급한다. 국경을 넘은 범 죄자를 일차적으로 가두는 감옥은 정치보위부 집결소라고 부른다. 집결소 는 보통 도청소재지에 위치한다. 집결소는 예심소로 기능하며, 국경을 넘 나든 범죄자 가운데 정치범과 경제범(밀수범)을 확인해 분류하고 정치범 은 관리소(정치범수용소)에, 경제범은 노동교화소에 보내는 구실을 한다.


‘박해로 인한 공포…’난민대우 마땅

1967년 국제적으로 마련된 ‘난민지위에 관한 의정서’에 따르면, 난민(r efugees)은 “인종·종교·국적·특정사회 집단의 구성신분 또는 정치적 의견을 이유로 박해받을 우려가 있다는 충분한 이유가 있는 공포로 인해 국적국 밖에 있는 자로서 그 국적국의 보호를 받을 수 없거나, 또는 그런 공포로 인해 그 국적국의 보호를 받을 것을 원하지 아니하는 자 및 상임 국 밖에 있는 무국적자로서 종전의 상주국으로 돌아갈 수 없거나, 또는 그 공포로 인해 종전의 상주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원하지 아니하는 자” 로 규정돼 있다. 이 규정에 따르면, 난민이란 무엇보다 먼저 박해로 인한 공포를 가진 자이다. 여기에서 공포란 주관적 요소로서의 ‘주관적인 느 낌’(subjective feeling)과 객관적인 요소로서의 ‘합리적인 이유’(goo d reasons)가 있어야 한다.

순전히 경제적인 이유로는 난민이 될 수 없다는 게 국제 법학자들의 일반 적인 견해다. 탈북자 대부분의 경우, 원인은 식량문제로 시작됐지만 탈출 이 이뤄지는 순간 생명이 위협받는 심각한 정치문제가 된다. 그런 점에서 탈북 식량난민들에겐 난민의 자격이 주어져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 이다. 이는 탈북난민들의 증언에서도 쉽게 확인된다. 또 이들은 조국반역 죄로 처벌을 받는다는 주관적인 느낌과 북한 헌법과 형법의 규정이 객관 적인 요소로 합리적인 이유가 된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식량난민들은 중국에서 지내면 지낼수록 북한체제로 볼 때는 점점 받아들이기 힘든 비판적 의식에 물든 정치범으로 변해간다. 북한사회에서 진실로 믿고 있던 논리와 지식이 한꺼번에 무너지면서 북한체제를 위협하 는 요소로 바뀐다는 것이다.

실제로 대학을 졸업한 한 식량난민은 “내가 조선에서 교육받을 때는 ‘ 정치는 경제의 안받침’이나 ‘사회주의는 쌀이다’는 구호를 귀가 따갑 도록 들었고, 또 50년 동안 ‘이팝에 고깃국’을 실현하자고 노력해왔는 데 이곳 중국에 와보니 이팝에 고깃국을 먼저 실시하고 있더란 말입니다 ”고 말했다. 게다가 남쪽에 호의적인 중국 조선족들의 얘기를 자주 듣게 되면 이들의 의식상태는 더욱 큰 괴리로 시달리게 된다. 회의가 비판이 되고 비판이 비난으로 바뀌는 과정을 밟게 된다.

그러나 중국 정부나 한국 정부는 탈북 식량난민에게 난민으로서의 지위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중국은 북한과 맺은 ‘민·형사 문제에 있어서 호상 법적 조력에 관한 조약’에 따라 적발되는 북의 식량난민들을 북으로 강 제송환하고 있다. 조약에 따르면 ‘1년 이상의 징역에 해당하는 범죄’를 저지른 자는 서로 인도하게 돼 있다. 중국 정부로서는 북한주민이 일반적 인 범죄를 저지르고 중국으로 도망해 왔다면 ‘범죄인 인도협정’과 같은 효력을 나타내는 이 협정을 적용해 송환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리고 이것 은 주권국 사이에서는 당연한 국제관례다.

그러나 식량난민에 대해 이 조약을 들이대는 것은 국제 관례나 협약에 어 긋난다는 게 중론이다. ‘난민의 지위에 관한 협약’ 제33조 1항은 ‘난 민의 강제송환 금지’ 원칙을 규정하고 있다. 식량난민의 문제는 정치적 시각이 아니라 인권의 시각에서 보는 게 국제적인 관례이기 때문이다.


탈북은 생사와 관련된 인권문제

한 난민은 탈출의 목적을 “죽기 전에 계란이 들어간 고깃국에 이팝을 말 아 한 3일만 먹어보려고 나왔다”고 말했다. 그들의 탈북은 식량이라는 단순 경제문제가 아니라 생사와 관련된 인권의 문제인 것이다.

탈북자 가운데 한국의 대사관이나 영사관을 찾은 뒤 북으로 강제송환되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것은 알려진 지 이미 오래다. 20세의 한 청년은 한국영사관을 3번이나 찾아갔지만 확실한 대답을 듣지 못하고 있다가 중 국 공안에게 잡혀 북으로 강제송환됐다고 한다. 남으로 가려는 많은 탈북 식량난민들은 “살기 위해 목숨을 걸었다가 강제송환과 함께 목숨을 잃을 처지”에 놓여 있는 것이다.

김창석 기자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07월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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