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1997년07월24일 제 167호 한겨레21

주검이 밟히는 압록·두만강을 가다

(사진/북한과 중국을 가르며 흐르는 압록강. 20여km의 좁은 폭이지만 허기진 몸으로 건너려면 생명을 걸어야 한다.)

7월8일 오전 11시 압록강 상류 중국 라오닝(遼寧)성 한 국경도시의 강변. 불과 30여m 맞은편에는 북한 병사들과 주민들의 오가는 움직임이 선명하 다. 강은 죽음과 삶을 가르며 무심하게 흐르고 있다.

문득 10m 아래 강변 갈대숲에서 뭔가 시커먼 물체가 눈에 들어온다. 길게 누워 있다. 분명 사람이었다. 그러나 미동도 하지않았다. 바위 위에 걸쳐 있을 뿐이다. 얼굴은 까맣게 부패해 있었고 몸은 고무풍선처럼 부풀어 있 다. 육안으로는 여자인지 남자인지조차 알아보기 힘들다.


주검이라도 발견되면 그나마 다행

강물은 아는지 모르는지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흐른다. 나무토막 비닐봉 지 등이 가끔씩 물살 따라 흘렀다. 4~5백m 더 흘러내린 곳에 2구의 시체 가 강변에 밀려있다. 부패상태는 앞의 주검과 마찬가지였다. 주검 위로 나풀대는 나비떼가 한가롭다. 이렇게 강변 1㎞를 걷는 동안 5구의 주검이 물살에 떠밀려있었다.

이곳 주민들에겐 그리 놀라운 풍경이 아니라고 했다. 최근 북한 식량난민 들이 도강중 힘에 부쳐 익사한 사체로 떠오르는 것은 압록강변 어디서나 흔한 일이라는 것이다. 이 마을 주민들이 하루에 건져올리는 사체는 평균 3구 정도. 강 상류쪽에서도 사체 건져올리는 작업을 한다고 했다. 그러니 기자의 눈에 띈 사체들은 이 여과 과정에서도 걸러지 않은 채 강바닥을 떠내려온 것들이다. 중국쪽 아이들은 한여름 놀이터인 강을 잃었다고 한 다. 미역감다가 사체를 밟고 소스라쳐 나자빠지는 경우가 적지않기 때문 이란다.

탈북 식량난민들의 사체가 발견되는 곳은 압록강변만이 아니었다. 두만강 상류지역 한곳에서도 5구의 시체가 물가에 떠밀려와 있었다. 물에 빠져 숨진 사체들이 보통 일정한 기간 물 속에 흐른다. 상류지역에서 발견되지 않고 물 속에 잠겨 있거나 하류로 떠내려간 사체들까지 합치면 그 수는 도대체 얼마나 될까. 조선족 안내인의 눈가에 물기가 맺힌다.

그나마 사람의 눈에 띄는 곳으로 밀려온 사체는 행복하다. 화장이건 매장 이건 최소한의 존엄을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협곡을 이룬 곳이나 갈대 숲이 우거져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떠밀린 사체들은 굳이 찾아나서는 이 가 없어 그렇게 방치된다. 그곳에서 속절없는 짐승들에 뜯어먹히거나 썩 어간다. 중국에 도피중인 탈북 식량난민들은 이렇게 전했다. 너무 굶어 평지를 걷기도 힘든 사람들이었다. 아무리 강폭이 좁고 물살이 완만해도 이들의 허기진 다리는 물살을 지탱하지 못한다. 그래 양강도와 함경북도 의 압록강이나 두만강 상류 중에서 강폭이 10m 안팎인 얕은 곳에서도 이 팝이 넘쳐나는 중국땅에 오르지 못한 채 많은 탈북자들이 강물에 휩쓸고 있다고. 그들이 바로 지금 저 갈대밭에 썩어간다는 것이다.

탈북 식량난민들의 행렬은 끊임없이 이어진다. 강원도에서 황해도에서 북 으로 북으로 양식찾아 변강지역으로 몰려온다. 그들은 1천2백㎞에 이르는 조-중 국경의 압록강과 두만강 어디서나 휘청이는 다리로 도강을 시도한 다. 그리고 쓰러진다. 이제 압록강과 두만강을 죽음이 흐르는 강으로 바 뀌었다.

중국쪽에 생존하고 있는 일단 지옥의 강을 건넜다는 것에 안도한다. 그러 나 그들 앞에는 또다른 죽음의 강이 널려있다. 그들 대부분은 국경지대 산 속에서 움막도 없이 숨어산다. 그들에게 있어 발각은 죽음 이상의 공 포다. 그토록 탈출하려했던 곳으로의 강제송환을 의미하며 송환은 죽음보 다 두려운 기아와 학대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송환의 공포… 울지도 못한다

두만상 상류 중국쪽 국경마을의 산에서도 그들을 여럿 만날 수 있었다. 바로 앞에는 너비 10m 안팎의 두만강물이 흐르고 있고 강 건너편으로는 북한의 국방경비대들이 손에 잡힐 듯하다. 고산지대라서 그런지 새벽 5시 인데도 어둠이 서서히 걷히고 있었다. 숲 안에서 갑자기 한 여자가 뛰어 들며 무릎을 꿇고 기자를 붙들며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강건너 북한 국 경수비대의 귀에 들릴까 소리내 울지도 못하며 오열할 뿐이었다.

“가족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어. 아이들도 아직 조선에 있는데 어떻게 됐 는지….”

온몸은 비와 이슬에 젖었고 옷은 물과 흙 범벅이었다. 30대 중반의 나이 라지만, 쭈글쭈글해진 얼굴 피부와 이마에 깊게 패인 주름은 50대 중반을 넘긴 모습이었다. 함께 있던 동갑내기 남편도 마찬가지였다.

부부는 한달째 이곳 숲 속에서 살고 있었다. 낮에는 중국 변방부대에 쫓 기고 밤에는 중국쪽으로 건너와 잠복근무하는 북한의 국경수비대에 쫓겨 다녔다. 낮에는 근처 중국 조선족마을에 내려가 농사일을 거들어주거나 동냥을 해서 양식을 얻거나 산나물과 풀을 뜯어 허기를 달랬다. 거의 매 일 비가 내렸지만 밤에는 비닐 한장 덮지 못했다. 빗방울이나 나뭇잎에 뭉쳐 있다가 떨어지는 물방울이 비닐에 떨어질 때 나는 소리 때문에 붙잡 힐까봐 새벽 5시가 넘어서야 비닐을 덮을 수 있었다. 추위와 허기와 공포 와 모기는 한달내내 그들 곁을 떠나지않았다고 했다.

이들에 따르면, 거의 매일 밤 10여명의 북한 사람들이 양식을 구하러 도 강하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어떤 날은 30여명이나 되는 1개 인민반 전체 가 넘어오기도 했다. 산중을 헤매며 이들 부부가 한달 동안 본 탈북자들 의 수는 수백명에 이른다고 전했다.

부부가 한달 동안 터잡고 지낸 곳을 떠나려는 순간 풀숲 어디선가 놀란 짐승이 후다닥 튀어 일어서는 소리가 들렸다. 역시 여자 식량난민이었다. 잠을 자다가 떠들썩한 소리에 소스라쳐 깬 것이다. 눈빛이 마주치자 극도 의 공포에 질려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입이 열리지 않는지 목에 감은 젖 은 목도리로 입을 틀어막는다.


송환되는 50대 발걸음엔 절망과 체념만

이들을 만나고 내려오다 조선족 마을에서 또 한명의 식량난민을 만날 수 있었다. 50대 남자인 식량난민은, 그러나 중국 변방수비대에 붙잡혀 끌려 가고 있었다. 얼굴은 초조와 두려움, 체념과 절망으로 가득 찼다. 주민들 에 따르면, 그는 두만강을 건너기 전 꼬박 나흘을 굶은 데다 강을 건너다 물살에 밀려 30여m를 떠내려가 바위에 부딪혀 온몸에 상처를 입었는데 강 을 건넌 뒤에도 사흘을 굶고 쓰러져 있는 것을 주민들이 발견하고 밥을 먹였다고 한다. 그러나 끝내 기운을 차리지 못하고 쓰러지자 마을 사람들 이 병원으로 옮기다 중국 변방수비대에 발각됐다는 것이다. 북한 난민들 에 동정적인 중국의 변방수비대는 다그치지 않았다. 최대한 그의 걸음에 맞추려는 듯했다. 그는 이미 도망칠 여력을 모두 잃었는지 기어가듯이 수 비대의 뒤를 따랐다.

산속의 숨어지내는 식량난민들의 전체적인 상황을 알기란 거의 불가능했 다. 낮에는 마을로 내려갔다가 밤에 산 속으로 들어오기도 하고, 산에 숨 어 있다가 식량이 생기면 북으로 돌아가는 등 이들의 움직임은 너무나 유 동적이었다. 돌아가는 이들에겐 북에 부모나 아이들이 있었다. 어느 정도 식량만 모이면 조만간 또다시 건너게 될 강을 넘어 조선의 부모 자식 곁 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중국쪽의 국경 수비는 여전히 허술하다. 굶주린 북한 국경수비대도 식량 만 주면 눈감아 준다. 때문에 강은 탈북 식량난민들에게 생명을 이어주는 유일한 젖줄이기도 하다.

대개의 난민은 중국에 건너왔다가 돌아간다고 한다. 물론 일부는 돌아가 지 않는다고 한다. 최근엔 이들 탈북난민들의 범죄문제로 중국 공안들이 바짝 눈에 불을 켜고 있다. 배가 고픈 나머지 밤에 조선족이나 한족의 집 을 밤에 털기도 해 국경지역 주민들도 이들에 대한 동정심 대신 경계심을 앞세우고 있다. 일부는 감정이 격앙돼 이들을 적대시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압록강 상류의 한 중국도시의 경우 맞은편 북한의 국경도시를 통해 들어오는 식량난민들이 산 속에 숨어 있다 밤에 마을로 내려와 식량과 가 재도구들을 훔쳐가 평균 한 가구에 한번 이상 절도사건을 당했다는 통계 도 있다.

장기간 산 속에 숨어 있는 식량난민들은 일찌감치 북으로 돌아갈 생각을 버린 이들이 대부분이다. 이들은 조선족마을에 숨어살거나 중국대륙 안으 로 깊숙이 숨어들어가게 된다. 이들은 지린(吉林)성, 랴오닝(遼寧)성, 헤 이룽장(黑龍江)성 등 이른바 동북3성 농촌 곳곳으로 깊숙이 퍼져 나가고 있다.


눈을 뜨는 순간 확인되는 살아있음의 행복

최동권(36)씨도 그들 중 한명이다. 그는 지난해 3월 중국으로 건너왔다. 굶주린 데다 부부간에 사이도 나빠져 탈북을 결행했다. 중국으로 들어온 이래 그는 안 해본 일이 없고 안 가본 데가 없다로 했다. 동북3성 곳곳에 서 닥치는대로 일을 하며 그날그날 목숨을 이어왔다. “아침에 일어나는 순간 살아 있구나 하는 걸 느낄 때가 가장 기뻤다”는 게 그의 고백이다. 농촌에 들어가 돼지우리를 키워보기도 했고 도시에서 막노동을 하기도 했 다. 일이 없을 때는 구걸을 하기도 했다. 때론 눈보라 치고 차가운 북방 의 칼바람이 속살을 헤집어도 바깥에서 잠을 청해야 했다. 말뜻 그대로 “하늘이 이불이고 땅이 구들이었다.” 중국인한테 뭇매를 맞을 때는 “ 나라를 잃은 설움이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에 눈물을 흘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라고 했다.

이런 생활을 통해 나름의 원칙도 세워나갔다. 가장 중요한 원칙은 한번 간 곳에는 절대로 다시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주인을 속이고 밥이나 먹 으려고 하는 사람으로 비쳐지기 때문이다. 가장 싸게 지내면서 신변의 안 전을 보장받는 잠자리도 개발해냈다. 병원 2층에 있는 침대나 걸상이 그 만이라는 사실을 알아낸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제나라가 아니 라서 느끼는 신변의 위협에 따른 불안은 줄일 수 없었다. 죽도록 일해놓 고도 월급을 받지 못한 억울한 경우도 있었지만 따질 수가 없었다. 신분 의 문제 때문에 드러내놓고 싸우지 못했다. 그랬다가는 졸지에 중국공안( 경찰)들에 붙들려 북한으로 송환될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참수 수밖에 없게 되어 있다.

그의 가장 큰 소망은 남쪽으로 가서 사는 것이다. 단 하루를 살아도 다른 나라에서 도망자 신세로 사는 것보다 마음 편한 곳에서 한번쯤 배불리 먹 고싶다. 어렵게 용기를 내어 청도영사관을 찾았다. 그러나 그가 들은 얘 기는 “영사관은 그런 업무를 하지 않습니다. 한국교포의 여권 업무만 담 당합니다. 일단 교회나 농촌 깊숙이 들어가 기다리십시오”라는 것이었다 .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홧김에 술이나 마시는 것뿐. “세상을 자꾸 삐딱하게 보게 되는 제자신이 싫어집니다.” 꿈을 잃은 사람의 넋두리였 다.


훈장까지 받은 인민군 출신 “나는 조국을 버렸다”

김병훈(32)씨 역시 동북3성 농촌에 깊숙이 숨어있는 식량난민이다.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0년 동안 집에도 한번 못가고 훈장을 3개나 받아가 며 인민군으로 복무했다. 지난 95년 제대한 뒤 누이동생이 실종되고 어머 니가 만성질환으로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자, 탈북을 꿈꿨다. 제대로 먹지 못하는 환자가 치료를 제대로 받을 수 있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어 머니의 병이 깊어지자 그는 어머니를 들쳐업고 두만강을 건넜다. 광산에 서 농촌으로, 또 공장에서 식당으로 옮겨다니며 막노동을 해 어머니를 살 려보겠다고 갖은 애를 썼지만 올해 4월 어머니는 결국 눈을 감고 말았다. 매장을 할 수 없다는 중국 당국의 규정 때문에 몰래 화장해야 했다. 어머 니의 뼛가루를 중국의 강물에 뿌리던 날 그는 조국을 버리기로 했다.

요즘 그는 어머니가 생각날 때마다 북한의 시리즈 영화물 <민족과 운명> 에 나온다는 노래 하나로 슬픈 마음을 달래곤 한다. “리별의 술잔에 내 심상 고였나/ 지나온 인생길에 피눈물이 고였네/ 어이하랴 인생길은 두번 다시 못오니/ 이 한잔에 흐린 넋을 씻어주지 못할까/ 낯설은 타향에 성한 몸 태우며/ 나라를 찾는다고 내 한생을 바쳤건만/ 어이하랴 인생길은 두 번 다시 못오니/ 이 한잔에 흐린 넋을 씻어주지 못할까.”

그는 무척이나 고지식해서 힘들다는 말 한마디 없이 고된 노동도 마다하 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자신을 돌봐준다는 생각 때문에 고용주에게 불평 한번 하지 않았다. 한달에 10원(한국돈으로 약 9백원 정도)씩 받기로 했 지만 월급은 아직 한번도 못받았다. 그는 최근 조선족 동포들이 한국에 대해 말하는 걸 듣고 “남조선은 인간이 살지 못할 생지옥”이라는 북의 논리가 사실이 아님을 깨달았다. 기회가 닿으면 남쪽으로 가서 살고 싶다 . 그 이유는 “여기서 살면 중국사람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는 한국의 사정을 알기 위해 연변 조선족작가인 류연산의 수필집 <서울바람>을 탐독 하고 있다.

박성수(39)씨 가족들도 남으로 가기를 원하고 있다. 박씨의 아버지는 광 산으로 유명한 북한의 한 지역에서 30년 넘게 일한 노력 영웅이었다. 영 웅의 집안이라 남들보다 대우가 좋긴 했지만 그러나 지금 박씨의 4촌형제 가족 27명 가운데 8명이 이미 굶어 죽었다.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탈출해 야겠다고 결심한 박씨는 지난해 말 두만강을 건넜다. 부부가 먼저 탈출하 고 아이들은 4달 뒤 돌아간 어머니 김분희(37)씨가 망태기에 싸서 두만강 을 넘었다. 딸 미선(13)이와 아들 호성(10)이는 4달 동안 자기들끼리 강 냉이 가루로 죽을 만들어 먹으며 부모를 기다렸다고 한다.

이들은 현재 남들의 도움으로 안전한 곳에 살고 있다. 하지만 도망자로서 극도의 긴장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아이들이 나가는 것은 물론 부모가 아 이들과 함께 외출하는 것마저 상상할 수 없다. ‘안 보는 듯하면서 모든 것을 보는’ 중국 공안당국 감시시스템의 촉수에서 벗어나려면 어쩔 수가 없다고 했다. 남으로 가고 싶지다. 그러나 방법이 있는지 없는지 애만 태 울 뿐이다.


탈북자들이 55번째 소수민족 될 판

중국의 수도 베이징(北京)에도 탈북난민들은 몰려든다. 천안문광장에서 외국관광객들이 먹다 버린 플라스틱병을 모아 팔기도 하고, 구걸하기도 하며 근근히 생계를 꾸려간다. 이들은 베이징에 있는 한국대사관을 찾아 가는가 하면 베이징에 주재하는 한국언론사의 특파원들에게 연락해 도움 을 청하기도 한다.

이런 식으로 중국내 탈북 식량난민들의 숫자는 급격히 늘고 있다. 한 조 선족동포는 “이러다가는 탈북자들이 중국의 55번째 소수민족이 될지도 모른다”며 한숨을 지었다. 그러나 이들을 국민으로 규정하고 있는 한국 정부는 이들에 대해 아무런 대책도 마련하지 않고 있다. 그냥 내버려두고 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 중국 당국은 북한과의 관계만을 의식해 탈북 자들을 발견하면 주저없이 북한으로 강제송환하고 있다.

“세상에서 굶어서 제나라 땅을 버리는 것만큼 슬픈 일은 없다.” 북경에 서 만난 한 탈북자의 말이다. 중국대륙에 울려퍼지는, 그러나 아무도 들 어주지않는 탈북 식량난민들의 망향가는 언제나 끝날 것인가.

중국=김창석 기자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07월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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