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리재에서
1997년07월24일 제 167호 한겨레21

도둑질에 관한 예의

장자의 <도척편>에 나오는 이야기다. 희대의 도둑인 도척이 세계 3대 성 자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공자를 꾸짖는 대목이다. “너는 지금 문황과 무왕의 엉터리 도를 배워가지고 세상의 언론을 장악해서 후세를 잘못된 가름침으로 잘못 인도하고 있다. 큰 옷에 넓은 띠를 두르고 터무니없는 말과 위선적인 행위로 천하 군주들을 속여서 부귀를 얻고자 하고 있다. 도둑이라면 너만한 도둑이 다시 없다. 그런데도 세상 사람들은 너를 도구 (공자의 이름 `구' 앞에 도둑 `도'자를 붙인 것)라고 하지 않고 나만 도척이라고 부르는지 모르겠다.”

공자는 당시 춘추전국의 각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자신의 경륜과 학문을 현실정치에 접목시키려 했다. 사실 그의 철환은 구도자의 수행이 아니었 다. 자신의 정치적 이념을 받아주는 곳에서 뜻을 펼치는 것, 즉 권력을 행사하려는 것이었다. 때문에 그가 현실을 개탄했다면 그것은 자신을 받 아주지 않는데 따른 경우가 많았다. 장자는 빈정댄 것은 공자의 바로 이 런 모습이었다.

공자로서야 무척이나 서운했겠지만 장자의 비유는 요즘 우리 세태에 와서 그 날카로움을 빛내는 듯하다. ‘왕도’이건 ‘패도’이건 국리민복을 다 짐하며 국민앞에 나선 이들이 너나없이 꼭 도척의 일갈을 피할 수 없는 짓들이나 하고 있으니 말이다. 국민의 재산인 정부예산을 이해관계자들의 뇌물에 따라 제멋대로 배정한 관료들부터 여기에 빗대보자. 지금까지 국 회 예산심의 과정에서 정치인들이 개인 혹은 정파적 고려에 따라 이리저 리 찢어붙인 경우는 자주 비난의 도마에 올랐다. 그러나 재경원의 예산편 성 관련 부서 공무원들, 즉 국민의 곳간지기들이 이해관계자의 뇌물에 따 라 멋대로 예산을 나눠준 것이다. 그렇게 하도록 뇌물을 건네며 꼬드긴 자 역시 공무원이었니 기가 찰 노릇이다. 그들은 한편으론 곳간 관리 대 가로 국가로부터 녹을 받고 다른 한편으론 곳간의 곡식을 제멋대로 빼돌 렸으며 게다가 뇌물까지 챙겼으니 도척으로서도 한수 가르침을 청할 수준 이다.

예산편성 부처의 관료가 이러하니 정부출연 연구기관들이 2년동안 서류조 작 등을 통해 정부에서 타낸 1천억원의 예산을 직원들이 나눠먹었다고 해 서 특별히 나무랄 일은 못된다. 기왕에 눈먼 돈, 먼저 먹는 게 임자인데 굳이 원칙을 지키는 게 바보 아닌가라는 반문에 누가 뭐라 할 것인가.

그러다 보니 자연히 곳간엔 빈 곳이 나타나기 마련. 그 때문인지 정부는 공무원이나 군인에게 줘야할 연기금에 대한 정부부담금 7천6백21억원을 떼먹었다. 관리감독자인 정부가 그러하니 특히 아이들에게 정직과 땀의 소중함을 그리고 거짓과 요행의 부도덕함을 가르치는 학교의 관리자들도 물들지 않을 수 없다. 사립학교 법인들은 사학연금 부담금 1천3백41억원 을 빼돌렸다.

이들은 누가 뭐래도 사회의 지도층이다. 천하에 뜻을 펼치고자 했던 공자 는 아닐지라도 각 부문에서 자신의 경륜과 학식으로 세상을 밝히겠다고 다짐했던 이들이다. 그리고 공자의 고행에 버금가는 각종 시험을 통과한 인물들이다.

사실 장자가 오늘날 살아 있다면 이 정도의 도둑질쯤은 가소롭게 웃어 넘 겼을 것이다. 탐욕엔 옛날과 오늘이 다르지 않구나 정도의 소회 밖에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권력에 의해 저질러지는 ‘큰 도 둑질’과 이를 위해 벌이는 엄청난 투기를 본다면 입장은 달라질 것 같다 . 92년 대선자금에 대해 어느 정도 윤곽을 알고 있는 한 관계자는 당시 뿌려진 선거자금이 1조6천5백억원 정도라고 전한다. 투자가 이 정도니 이 로부터 거둬들이려는 수익은 얼마나 될까. 아무리 세속의 계산에 굼뜬 장 자라도 쉽게 계산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 또 세상에 왕도를 실현하겠다는 이들이 쟁투를 벌이고 있다. 연말 대선은 아직 멀었으니 92년과 비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신한국당 경선과정에서 불거지고 있는 돈질과 관련한 갈등은 ‘그래도 92년이 나았 다’라는 지레짐작을 가능케 한다.

김종필 자민련 총재는 95년 초 집권당에서 내쫓기면서 이렇게 말했다. “ 인생이란 게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지 못할 정도로 짧은 것은 아니다.” 돈과 권력 문제로 전직 대통령을 두 명씩이나 감옥에 쳐넣은 사람들이니 최소한의 예의나마 지켜 그 이름 앞에 ‘도’자가 붙여지지 않길 바란다 면 헛된 기대일까. 그렇다면 삼국지의 간웅 조조의 총애를 받아 후계로 지목됐던, 그러나 형 조비에게 모든 것을 넘기고 초야로 돌아간 조식의 ‘단장가’ 한 대목이라도 읊어볼 일이다. “술을 대하니, 바로 노래로다 . 인생이란 얼마나 덧없는 것이더냐.”

<한겨레21> 편집장 곽병찬

© 한겨레신문사 1997년07월24일


커버스토리 포커스 문화시대 특집 지난호 전체보기 처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