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김순경의 우리맛 기행
1997년07월03일 제 164호 한겨레21

우리밀 국수의 구수한 뒷맛

(사진/붉은 갈색이 감도는 우리밀 국수. )

보리와 밀농사를 짓는 농가에서는 장마 전에 타작을 끝내느라 6월 중순까 지 일손이 바쁘다. 지금은 농촌사정이 달라져 보리나 밀 타작이 대단한 일이 아니지만, 옛날 같으면 보릿고개를 넘어서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아주 즐거운 행사였다.

누구에게나 고향의 모습처럼 정겹던 밀밭은 이제는 일부러 찾아나서지 않 으면 쉽게 구경할 수조차 없게 됐다. 동글동글한 우리 참밀은 종자마저 구하기 어려울 정도로 귀해졌다고 한다. 이처럼 여름철 햇곡식에 대한 즐 거움이 추억 속으로 사라져가고 있는 요즘, 햇보리가 밥에 얹히고 햇밀을 빻아 만든 밀국수를 제맛나게 먹는 곳이 있어 그 옛날의 감회를 되새겨볼 수 있다.

충북 제천의 천주교 배론성지와 나란히 자리잡고 있는 배론농원(0443-42- 4828)은 햇밀로 만든 우리밀 국수를 전문으로 내놓는다. 한번 이 맛을 본 사람들이 주말 나들이를 겸해 다시 찾아와 민박집에 머물며 밀국수를 만 들어 먹고, 맑은 계곡에서 더위를 식히고 간다. 주말이면 10여개의 방이 거의 다 찬다고 한다.

주인 이광원(41)씨 부부는 성지를 찾아오는 신도들을 대상으로 민박과 음 식점을 경영하면서 대를 물려오는 산밭에 밀농사를 짓는다. 이들이 밀농 사를 짓게 된 사연도 그럴듯하다. 밀농사는 단순한 농사로만 생각하면 전 혀 채산성이 없지만 농사지은 밀을 직접 밀국수로 만들어 여름내 팔고 나 면 그런 대로 수입도 되고, 보람마저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더욱이 이곳 우리밀 국수는 민박손님들과 주인이 구별없이 둘러앉아 밀반죽을 하고 밀 판에 밀어 함께 나눠먹는 맛이 그만이다.

우리밀 국수는 빛깔이 갈색이고 다소 거칠다. 그나마 이제는 밀을 빻아주 는 방앗간마저 없어, 멀리 원주까지 나가 한가마씩 빻아오지만 완벽하게 껍질을 벗겨내기란 힘든 일이다. 이러니 겉모습이 눈처럼 하얀 밀가루와 는 전혀 다르다.

맛은 옛날 멧돌에 갈아낸 우리 고유의 밀국수 맛과 흡사하다. 연초록 빛 깔의 애호박과 풋감자를 썰어 넣고 푹 끓여놓으면 처음에는 슴슴하고 별 맛을 못 느낀다. 그러나 두세 술 떠먹다보면 밀 고유의 향이 입안에 배어 나면서 은은하고 구수한 뒷맛에 빨려들게 된다. 양념에서 맛이 나고 질감 이 매끄러운 보통 국수에 비하면 우리밀 국수는 질감은 다소 거칠어도 자 체에서 우러나는 깊은 맛이 있다.

우리밀 국수를 먹고 난 사람들은 한결같이 흐뭇한 표정을 짓는다. 주인의 음식솜씨라기보다는 그 구수한 맛에 잠재해 있는 향수라든가 고유한 정서 가 되살아나기 때문이다. 분명 우리밀 국수의 순수한 맛에는 마음에 와닿 는 무엇이 있다는 느낌이 든다. 값은 국수 한 그릇에 3천원이다. 직접 뜯 어다 말려 놓은 산채나 묵나물 무침 등 소박한 반찬들도 나무랄 데 없이 정갈하고 푸짐하다.

방을 미리 예약하고 가서, 하루나 이틀 묵으며 성지의 맑은 정원을 걸으 면 심신이 맑아진다. 저녁을 먹고 농원 앞 냇가에 나가 토종메기를 잡아 다 메기매운탕을 끓여놓으면 즐거운 밤시간을 가질 수도 있다. 해가 지면 계곡에서 불어 내려오는 선선한 바람에 몸이 날아갈 듯 시원하고, 모기들 이 맥을 못 출 정도로 선선해 피서지로도 그만이다.


성지의 맑은 정원에서 정기 회복

중앙고속도로와 영동고속도로가 연결되면서 제천가는 길이 퍽 수월해졌다 . 승용차와 고속버스로 서울에서 별 무리없이 2시간이면 닿는다.

승용차로는 영동고속도로 만종분기점에서 중앙고속도로로 옮겨타고 신림 인터체인지에서 내려 제천방향으로 10km 지점인 탁사정을 지나면서 오른 쪽으로 성지 표지판을 따라 2.5km 들어간다. 고속버스를 이용하려면(우등 고속/편도 7천7백원) 제천터미널에서 택시를 타거나 성지행 시내버스(1일 5회)를 타면 된다. 가족이 함께 가거나 일행이 5명 이상일 때는 전화를 걸면 농원에서 직접 데리러 나온다.

© 한겨레신문사 1997년07월0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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