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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역사속의 여성 |
1997년07월03일 제 16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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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안방극장에서 눈길을 끄는 여인이 있다. 바로 이방원의 아내 민씨다 . 텔레비전 속의 그는 야심만만하고 자부심 강하며 빈틈없는 여인이다. 그런가 하면 남편의 사랑을 받는 첩과 그 소생에게는 서릿발 같은 차가움 을 보이는 냉혹한 여인이기도 하다. 왕위를 향한 그의 열망은 방원보다도 더 뜨거운 것 같다. 그러나 이는 문학작품이나 드라마 속에서 형상화된 모습일 뿐이다. 그의 참모습이 어떠하였는지 알 수 있는 기록은 오늘날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실록>은 그저 그의 성품이 딱딱하고 사나우며 투 기가 심했다고 쓰고 있을 뿐이다.
민씨는 1365년에 태어나 18세 때 두살 아래인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방원 과 결혼했다. 이성계가 아직 새 왕조를 개창하기 전의 일이다. 그의 집안 영흥 민씨는 왕실과 혼인할 수 있는 재상가로 손꼽히는 명문가였으며 이 성계의 집안은 떠오르는 신흥세력이었다. 민씨의 아버지 민제는 이성계와 함께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세워 개국공신이 되고, 왕조개창의 험난 한 과정을 방원과 함께 겪었다.
민씨는 방원이 왕위에 오르는 데 적지 않은 공을 세웠다. 1차 왕자의 난 때 여러 왕자들과 태조 이성계의 병환을 지키며 숙직하던 방원을 불러내 주의를 준 게 그였고, 왕자들이 거느리고 있던 사병을 혁파하고 군기를 모두 불태울 때 몰래 무기를 감춰두었다가 거사에 쓰도록 내준 것도 그였 다. 민씨뿐만 아니라 그의 가족이 방원을 적극 지원했으며 그 공로로 친 형제인 무구와 무질이 공신칭호를 받았다.
그러나 민씨는 왕비가 된 뒤 태종으로부터 점차 소외당했다. 민씨의 네 형제, 무구와 무질, 무홀, 무희는 역모죄로 몰려 죽고 태종은 민씨를 폐 출하려다가 조강지처라 차마 버리지 못하겠다면서 민씨를 대신하여 궁궐 안을 다스릴 여자를 새로 뽑아 1명의 빈과 2명의 잉실을 맞아들였다.
<실록>은 민씨가 워낙 투기가 심해 태종의 마음이 떠났으며 무구 형제의 죽음 또한 민씨의 투기가 영향을 미친 탓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태종의 주도면밀한 의도 아래 이뤄진 일이라고 보는 게 사실에 가깝 다.
태종은 왕권강화를 위해 대단히 노력한 왕이다. 그는 수많은 정적을 물리 치고 왕이 되었고, 집권한 뒤에는 공신세력과 외척세력이 비대해지는 것 을 막으려 했다. 그래서 그는 외척인 민씨 형제를 제거하고 더불어 이무 를 비롯한 일부 공신을 숙청했다. 민씨 형제를 제거한 태종으로서는 이들 과 긴밀한 관계인 왕비 민씨를 어떤 식으로든 견제해야 했으리라. 민씨 대신 궁궐 안을 다스릴 여자 를 맞아들인 태종의 처사에는 이런 사정이 숨어 있다.
민씨는 분명 다소곳하고 고분고분한 여인은 아니었다. 조선의 여인하면 얼른 삼종지도와 칠거지악을 떠올리며 매사에 참고 견디는 인종의 여성상 을 그리는 게 우리네 생각이다. 그런데 이런 여성상은 성리학이 일반화된 조선 후기에 들어서야 비로소 정착된 것이다. 조선 전기, 좀더 거슬러올 라가 고려 때의 여성은 이와 달랐다. 결혼하면 남편이 아내의 집에 가 살 고, 딸도 아들과 똑같이 부모의 재산을 나눠받으며 제사를 지냈다. 여성 이 결혼 후에도 자기 재산을 별도로 가질 수 있는 것이 고려의 관습이었 으니 고려 여성의 지위는 조선 후기에 비해 상당히 높았다고 할 만하다. 여성 생활을 규제하는 여러 관습도 훨씬 덜했다. 이러한 고려의 유풍은 조선 전기까지 그대로 이어졌다. 그러니 민씨가 매사에 고분고분 참고 순 종하는 여인이 아니라, 사나울 만큼 강인한 여인이었던 건 당시로선 자연 스러운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민씨가 타고난 총명함과 날카로운 판단력을 지닌 평범치 않은 인물이었다는 점은 <실록>도 인정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민씨의 투기는 단순한 질투가 아니라 자신이 열정을 바쳐 이 룬 것으로부터 인정받기는커녕 오히려 밀려나는 데 대한 절망이 아니었을 까? “상감께서는 어찌하여 예전의 뜻을 잊으셨습니까? 제가 상감과 더불 어 함께 어려움을 지키고,같이 화란을 겪어 국가를 차지하였사온데, 이제 나를 잊음이 어찌 여기에 이르셨습니까?” 민씨가 태종의 옷깃을 잡고 내쏟은 울부짖음이다.
동서고금할 것 없이 최고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싸움은 냉혹해서 피를 나 눈 혈연끼리, 고락을 함께 한 아내가, 버림받는 경우가 허다했다. 민씨도 그런 경우다. 1420년 민씨는 56세로 세상을 떠났다. 시호는 원경왕후. 그 가 낳은 4남4녀 가운데 셋째 아들 충녕이 왕위에 오르니, 이가 세종이다.
박은봉/ 역사연구가
© 한겨레신문사 1997년07월0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