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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
1997년07월03일 제 16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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켈로부대의 역사는 45년 해방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해방과 함께 38선 이 남에 진주한 미군은 제24군단 정보처 산하에 442CIC라는 방첩부대를 운영 하기 시작한다. 북한의 정치상황과 민심동향을 비롯해 소련군 및 남·북 한의 좌익활동과 관련된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서다.
48년 8월24일 한-미 임시군사협정이 체결되면서, 주한미군 철수와 함께 4 42CIC와 다른 대북 첩보조직이 합쳐져 미군 극동군사령부 정보처 산하에 켈로가 만들어진다. 이들은 반도호텔 2층 202호실에 본부를 설치하고 계 속 대북첩보활동을 벌인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켈로는 새로운 양상을 맞게 된다. 유엔군이 평양까 지 진격했다가 서울로 후퇴하는 등 전선이 중부지역을 중심으로 밀고 밀 리는 접전이 계속되자, 미군은 전선 이북의 전략 요충지를 폭격하는 전략 을 세운다. 북한 각 지역에 대한 첩보활동의 필요성이 대두된 것이다. 미 군은 이에 따라 켈로를 낙하산이나 해상으로 적진에 침투시켜 첩보를 수 집하는 특수부대로 전환시킨다.
켈로부대는 위스키대, 고트대, 선대(대장 전훈) 등 3개대로 편성됐다. 각 대별로 약 2백~3백명 선의 대원수를 유지했으며, 미군 극동군사령부의 명 령을 받아 대별로 독립적으로 활동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이후 켈로는 1951년 9월 북한 도서지역에 남아있던 자생적 유격조직과 합 쳐져 8240부대로 전환된다. 8240부대로 편입된 켈로는 위스키대, 고트대, 선대의 틀을 그대로 유지한 채 용산 선린상업학교에 베이스캠프를 두고 통합운영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52년 5월 중순께 사건이 터졌다. 켈로의 침투 활동을 견학하러 온 미군 정보장교 40명이 침투조 4명과 수송기에 탑승했다가, 비행기가 공중 에서 폭파돼 모두 사망한 것이다. 미군 당국은 켈로에 고정간첩이 침투했 다고 판단하게 된다.
이 사건을 계기로 52년 6월, 선린상고를 기점으로 통합운영되던 켈로의 3 개대는 8240부대 편성에서 이탈해 원래대로 각 대가 독립적인 활동을 하 도록 환원된다. 서울의 각 지역으로 다시 해체된 것이다. 이들은 53년 9 월 공식적으로 해체될 때까지 각 지역으로 흩어져 독립적인 활동을 하게 된다. 그리고 부대원들은 켈로가 해체될 때 첩보부대의 성격상 “보안을 지키겠다”고 침묵을 서약했다.
이용인 기자
© 한겨레신문사 1997년07월0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