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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단 |
1997년07월03일 제 16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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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광진구청 정문 안내실에는 단아한 한복차림의 여성 두명과 말끔한 남성 한사람이 항상 민원인을 친절하게 맞이한다.)
“돈은 없는 데 쓸 곳만 많은 흥부네 집.”
재정 규모가 서울시 25개구 가운데 22번째로 밑바닥 신세를 벗어나지 못 하고 있는 광진구는 흔히 이렇게 불린다. 지난 95년 3월 변변한 살림살이 하나 마련하지 못한 채 성동구에서 분리됐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해 6·2 7 지방선거로 뽑힌 정영섭 구청장 등은 다른 누구보다 곱절의 노력이 필 요했다.
“전국에서 가장 나아진 구”
광진구의 시작은 정말 보잘것없었다. 구 청사가 없어 지난 67년 만들어진 공화당 연수원 건물을 청사로 사용하고 있고 구민회관은 물론 구의회 청 사조차 없다. 지역의 부를 창출할 수 있는 생산기반 또한 열악하기는 마 찬가지. 종업원 3백명 이상의 기업은 모토롤라(주) 1개뿐이고 나머지는 대부분 영세한 섬유업체들뿐이다. 그 흔한 백화점은 고사하고 도매시장도 없다. 바로 옆 송파구가 대규모 백화점과 롯데월드, 가락동 농수산물시장 등 재원을 확보할 수 있는 수단들 덕분에 96%의 재정자립도를 자랑하며 번창하는 데 비하면 광진구는 그야말로 절대빈곤 상태다. 연간 1천35억원 의 예산 가운데 겨우 52%만을 자체조달하는 형편이다.
하지만 ‘흥부네 집’ 광진구는 이런 빈한한 살림과 취약한 생산 기반에 도 민선자치 2년을 성공적으로 이끈 자치구 가운데 하나로 손꼽힌다. 95 년 7월부터 96년까지 내무부와 서울시가 주관한 분야별 행정심사에서 세 번이나 전국 최우수구로 뽑히는가 하면 지난 6월11일 한 일간지가 실시한 ‘지방자치 2년평가’ 결과에서도 전국에서 ‘가장 나아진 구’로 조사됐 다. 물론 갑자기 돈벌이가 쏠쏠해진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무슨 비결이 있는 것일까.
“돈 대신 아이디어로, 많은 건수가 아니라 피부에 와닿는 정책으로 구민 에게 다가서려는 힘겨운 노력이 인정받고 있는 것 같다.” 광진구청 문화 공보담당관 김성현 과장은 이렇게 말했다. 바로 주민 편익을 최우선에 두 고 펼쳐온 정책들이 구민들의 생활을 변화시켰다는 것이다.
구민에게 다가서려는 광진구의 노력은 구청 정문에 들어서면서부터 확인 된다. 정문 안내실에는 단아한 한복차림의 여성 두명과 말끔한 남성 한사 람이 항상 민원인을 기다리고 있다. 바로 종합민원안내 도우미들이다. 비 록 재정은 열악하지만 거동이 불편한 노인이나 장애인을 해당부서까지 직 접 안내하기 위해 채용됐다. 방문조차 어려운 민원인들의 일을 도맡아 처 리해주기도 한다. “모든 게 너무 편해졌어.” 구청에 주민등록등본을 떼 러 왔다는 김분순 할머니는 웃음을 짓는다.
하지만 도우미는 광진구가 자치 2년 동안 추진한 구정 개선작업의 아주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주민자치의 진전과 삶의 질 향상을 목표로 ‘내고향 광진’이라는 민선 자치 3개년 계획을 추진해 온 광진구는 재정 이 탄탄한 다른 구에서도 상상하지 못했던 혁신적인 제도를 개발해 지방 자치에 꾸준히 접목시켜 왔다. 따라서 현재 광진구에서 시행하는 대부분 의 제도에는 ‘전국 최초’라는 꼬리표가 붙어 있다.
민원인 피해에 물질적·정신적 보상
광진구청 민원실 입구에는 특이한 안내문이 2년째 붙어 있다. “공무원의 착오나 실수로 민원인이 2번 이상 구청을 방문하거나 하루 이상 민원이 지연되면 물질적·정신적 보상을 해드립니다.” 지난 95년 9월1일부터 실 행하고 있는 ‘행정 리콜제도’를 알리는 문안이다. 정영섭 구청장은 관 선시대의 옛 행정에 대한 불만을 해소하고 공무원들이 같은 실수를 반복 하는 것을 막기 위해 민간기업이 실수나 착오로 소비자에게 손해를 끼쳤 을 때 그 손해를 보상하는 ‘리콜’ 개념을 구청 행정에 처음으로 도입한 것이다. 공무원의 실수로 민원 지연 등의 피해가 생겼을 때 구청은 민원 인에게 1만원씩 현금 보상을 한다. 그리고 구청장이 민원인에게 직접 사 과하고 재발 방지를 약속하는 정신적 보상이 뒤따른다. 지난 96년 한해 동안 모두 35건의 민원 실수에 대해 이런 보상이 이뤄졌다. 구청 직원들 은 “담당자에게 책임을 묻지는 않지만 민원 처리에 더욱 최선을 다하게 된다”고 입을 모은다. 광진구의 혁신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과거 노 인교통수당 등 주로 생활이 빈곤한 사람들에게 구청에서 지급하는 사회복 지수당은 장부정리 등 업무처리량이 많아 보통 10일 이상 걸려야 수혜자 들에게 돌아갔다. 하지만 광진구는 16개 동사무소까지 설치된 주민 전용 컴퓨터를 통해 돈이 급한 이들에게 무통장 입금시키는 ‘복지뱅킹 서비스 ’를 최초로 도입해 단 하루 만에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또 열악한 재정 조건에도 주민 복지를 향상시키려는 노력도 속출했다. 역 시 전국 최초로 지난해 6월 도입된 노인복지카드가 대표적이다. 구청은 관내 65세 이상의 노인 1만4천6백97명에게 노인복지카드를 지급하고 병· 의원, 식당 등 66개 업소와 연계해 이 카드를 가진 노인들에게 50%의 할 인 혜택을 부여해 노인들의 경제적 부담을 덜어주고 있는 것이다. 구청은 최근에 이들 업체를 더욱 확대하기 위한 장려수단으로 쓰레기 봉투를 무 료로 제공하는 등 동기 부여에 애쓰고 있다. 장애인을 위한 복지사업기금 확보를 위해 카드사와 연계해 구민을 상대로 ‘광진 복지카드’를 발매한 뒤 카드 이용 금액의 0.1%를 기금으로 적립하는데 이웃과 사랑을 나누는 제도로 주목받고 있다.
자치실시 뒤 광진구의 16개 동사무소가 3백65일 내내 열려 있다는 것도 다른 자치구와 비교되는 시민생활의 큰 변화다. 자치구가 출범한 직후인 95년 7월23일 광진구는 동직원 2명과 자원봉사자 2명을 한조로 동사무소 일요근무를 시험 운영했다. 처음에는 업무량이 많은 동직원들에게 또다른 업무를 부과한다는 비난도 일었지만 96년 8월1일부터는 자원봉사자로 위 촉된 3백72명의 지역주민들이 번갈아가며 휴일근무를 하는 주민자치로 정 착됐다. 이것은 지방자치제 실시 뒤 행정서비스의 새로운 장을 연 조치로 평가받고 있다. 여기에 최근에는 광진구 능동사무소에서 주민등록 등·초 본 등 11개 민원서류를 전화로 신청하면 공무원이 직접 배달하는 서비스 에 들어갔다.
구 현안에 ‘주민투표’ 도입
(사진/광진구청은 구청 녹지대 `푸른쉼터'를 일반인들에게 개방해 호평을 받고 있다. )
광진구의 이런 시도들은 단지 주민들에게 최선의 행정서비스를 제공하는 차원을 넘어서고 있다. 이제 주민을 직접 행정에 참여시키려는 노력으로 까지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먼저 주민들의 이해가 상충되는 지역 사업을 구청이 나서 일방적으로 처리하는 것을 지양하고 이해가 걸린 주민들의 직접투표를 통해 결정하도록 하고 있다. 실제 지난 96년 4월26일부터 31 일까지는 성수동 주민을 상대로 동명 변경을 묻는 투표를 실시해 노유동 을 탄생시켰고 동 경계 변경 등에도 주민투표를 실시했다. 광진구청쪽은 “앞으로 쓰레기 봉투 가격 인상 등 구 현안에까지 주민투표를 확대해 주 민의 직접민주주의를 발전시킬 계획”이라고 밝혔다.
장애인이 자신들이 이용할 공공시설물을 직접 점검하는 장애인 공공시설 물 평가제도도 광진구의 돋보이는 작품이다. 광진구는 전국 최초로 ‘장 애인 평가 조사단’을 만들어 구청사 등 공공건물과 교통 보행 시설 등 모두 49개 장소에 대한 편리성과 안전성을 장애인이 직접 이용하고 평가 하도록 하고 있다. 그리고 이 평가를 바탕으로 개선작업이 한창이다. 구 청 건물 가운데 엘리베이터가 없는 곳에 장애인 민원 호출기를 설치한 것 도 이런 평가의 결과다. 이 호출기는 장애인 민원자가 입구에서 버튼만 누르면 해당 부서직원이 즉시 달려나올 수 있도록 돼 있다.
지난 96년 5월부터는 구청이 일방적으로 행사하는 것으로 인식됐던 예산 편성에 주민을 참여시키기 시작했다. 16개동 30명 안팎으로 구성된 ‘동 예산 반영위원회’에서 주민들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사업을 심의·의결 해 구청장에 제출하면 구청장이 이를 반영하는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다. 실제 이 제도가 시행된 뒤 지금까지 모두 25건이 제출됐고, 이 가운데 12 건(13억2천만원)의 예산이 집행됐다. 구청 관계자는 “한정된 재원을 좀 더 실효성있게 꾸려나가는 책임행정과 세금 부담자가 실질적인 선택권을 행사하도록 한다는 효과가 있다”고 말한다. 이 밖에도 지난 96년 1월부 터 구정과 관련한 아이디어를 제공할 경우 그 내용에 관계없이 5천원짜리 공중전화카드를 제공하고 ‘아이디어 보상제’ 등 주민의 참여를 유도하 기 위한 제도를 발굴해 시행하고 있다.
민선자치 2년의 성과는 구민들의 삶에만 나타나는 게 아니다. “튀면 공 연히 일만 많아진다”는 관선시대의 오랜 관행에 젖어 있던 구청 직원들 도 변화하고 있다. 구정에 창의성과 적극성을 발휘하는 공무원들을 위한 인센티브제를 도입한 때문이다. 예산 절감이나 경영수익사업, 잘못된 관 행 개선 등에 공헌한 직원들에게 1백만원의 포상금을 지급하고 6급 이하 직원들에게는 승진시험 자격까지 부여하면서 공무원 사이에 변화의 바람 이 일고 있다. 특히 구민이 직접 추천 선발하는 ‘친절공무원 제도’는 공무원들에게 대단한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구청중심의 사고’ 비판 목소리도
구청과 동직원을 상대로 한달에 한번씩 1명의 친절공무원을 선발해 공로 휴가를 주고, 연말에 이들 가운데 ‘올해의 친절왕’을 선발해 특별 승진 과 10일 동안의 해외 연수 기회가 주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지난 95 ,96년 모두 2명이 특진했다. 광진구청 홍보계장 마석희씨는 “과거처럼 민원인에 군림하고 지시하려는 직원들은 이젠 없다”며 “오히려 업무와 서비스를 개선하려는 경쟁이 치열하다”고 설명한다.
광진구는 민선자치 2년 만에 재정과 시설 부족 등 신생구로서 부닥치는 많은 한계들을 극복하고 이처럼 주민자치를 꽃피우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 고 있다.
하지만 이런 적극적인 노력에도 한편에서는 비판의 목소리도 들린다. 광 진구 노유동에서 동부문화센터를 운영하고 있는 전종배씨는 “다른 구에 비해 주민자치를 실현하려는 노력은 인정된다”면서도 “지역 사업 전체 를 구청이 주관하려는 고집 때문에 실질적인 주민참여가 가로막히고 있다 ”고 비판한다. 진정한 주민자치의 실현을 위해서는 주민들의 다양한 자 치 활동을 구청이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형식으로 이뤄져야 하는데 아직 구청 중심의 사고에 빠져 주민 고유의 활동까지도 모두 주도하려 한다는 것이다. 모진동에서 동부교육정보센터라는 주민도서관을 운영하는 김기범 씨도 “시민단체와 주민이 함께 할 사업계획을 내면 타당성을 면밀히 검 토하기보다는 단체의 성격을 규정하고 사업을 함께 할 수 없다고 말한다 ”며 “광진구의 자치가 아직 형식적인 면에 그치는 느낌”이라고 충고한 다.
정 구청장은 이에 대해 “구민이 행정의 중심이자 주인이 되는 인간 중심 구를 지향해 풍요로운 삶을 이웃과 더불어 나눌 수 있는 21세기형 자치구 를 만드는 데 초점을 맞춰 나갈 생각”이라고 말했다. “더 열심히 노력 할 테니 지켜봐 달라”는 것이다.
신승근 기자
© 한겨레신문사 1997년07월0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