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점
1997년07월03일 제 164호 한겨레21

파격으로 빚은 1등은행

(사진/하나은행의 김승유 행장. 수행비서도 없이 다닐 정도로 실리를 추구하는 스타일이 하나은행의 특징을 쏙 빼닮았다.)

하나은행 김승유(54) 행장에게는 시중은행장이라면 누구에게나 딸린 수행 비서가 없다. 차에서 내릴 때 부하직원이 문을 열어주는 예우를 단호히 거절하는 그는, 그래서 차에 함께 타는 부하직원이 있으면 꼭 뒷좌석 옆 자리에 앉도록 한다. 해외출장 때의 비행기좌석도 ‘행장체면’에 아랑곳 하지않고 가까운 거리는 이코노미급, 먼 거리라면 비즈니스급을 이용한다 . 형식보다는 철저하게 실리를 추구하는 김 행장의 이런 스타일은 하나은 행의 특징 그대로다. 지난 71년 한국투자금융(주)으로 출발해 6월25일로 창립 26주년을 맞는 하나은행에는 ‘사훈’이나 ‘사가’가 없다. “직원 들에게 고정관념을 심어주기보다는 시대상황의 변화에 신속하고 탄력적으 로 대응하자”는 뜻에서다.


"고정관념 심는다" 사훈도 없어

하나은행은 실제로 전임 윤병철 행장(현 회장) 시절부터 보수적인 금융계 풍토에서 파격적이라 할만한 경영방식을 계속 도입함으로써 그동안 숱한 화제를 뿌려왔다. 하나은행은 투자금융사에서 은행으로 업종을 바꾼 지난 91년 담보나 보증없이 신용만으로 돈을 대출해주는 제도를 국내에 처음으 로 도입해 금융계를 놀라게 했다. 대출이 확정되기까지 오래 기다려야 하 는 고질적인 불편을 없애기 위해 과장 전결로 48시간 안에 대출이 가능하 도록 하는가 하면, 은행창구의 턱도 크게 낮춰 고객들이 의자에 앉아서 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했다. 지난 95년 부·실·점장을 은행 안에서 공모해 30대의 대리를 지점장으로 임명한 것도 연공서열에 따른 인사체계 를 흔들어놓은 파격이었다.

그리고 그 성과는 홍콩의 금융경제지 <파이낸스 아시아>가 지난 6월호에 서 우리나라 최우수은행으로 하나은행을 꼽은 데서도 확인된다. 지난해 하나은행은 직원 1인당 당기순이익(2천9백10만원)과 1인당 총자산(97억4 천3백만원) 부문에서 국내은행 가운데 1위, 1인당 업무이익과 점포당 예 수금에서는 2위를 차지하는 빼어난 경영실적을 보였다. 은행감독원이 최 근 국내 25개 은행의 지난해말 경영실적을 분석한 바에 따르면 전국 일반 은행의 자기자본잠식도는 평균 17.9%인 데 비해, 하나은행은 은행 가운데 유일하게 마이너스(-2.0%)를 기록해 자기자본이 가장 충실한 은행으로도 꼽혔다.

임영호 하나은행 홍보팀장은 “하나은행의 경영실적이 좋은 것은 무엇보 다 대출심사를 철저히 해 부실여신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한보철 강이 올해초 부도를 내면서 1조1천억원을 물린 제일은행을 비롯해 대부분 의 은행들이 부실채권 때문에 초상집 분위기에 빠져있을 때 하나은행에겐 아무런 풍파가 미치지 않았다. 하나은행도 한보에 6백20억원을 대출해주 기는 했지만 모두 다른 은행에 지급보증을 받아둔 상태였다. 그러나 하나 은행의 대출은 어떤 때는 다른 은행보다 더욱 과감한 면도 있다. 지난 3 월 말 종금사들의 급격한 자금회수로 자금사정이 악화돼 부도설이 나돌기 까지 하던 뉴코아에 3백억원을 전격 대출해 뉴코아의 자금물꼬를 터준 것 도 하나은행이었다. 하나은행 자금부 관계자는 “당시 항간의 소문에 개 의치 않고 자금 흐름을 따져보니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고 말했다. 하나은행은 대출심사를 하는 과정에서 기업총수의 경영철학이 나 의지 등을 매우 중요한 평가자료로 삼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시중은행들이 자주 막대한 부실여신을 떠안아, 결과 적으로 국민에게 부담을 전가시키는 것과는 달리 하나은행이 이처럼 건실 한 실적을 올리는 숨은 비결은 무엇일까? 금융계 일각에서는 “후발주자 이고 규모가 작다보니 정부의 간섭이 그만큼 적었기 때문”이라고 낮은 점수를 주려 한다. 그러나 안정된 전문경영인 체제의 정착이 무엇보다 중 요하게 작용했다는 데는 금융계의 견해가 대체로 일치한다.


어떤 대주주도 모기업에 대출 강요 못해

하나은행은 현재 교보생명을 비롯한 9명의 대주주가 전체 주식의 56% 가 량을 분산 소유하면서, 비상임이사회를 구성하고 있다. 그러나 어떤 대주 주도 모기업을 위해 정상을 벗어난 대출을 강요하지 못한다. 진로그룹이 지난 91년 하나은행의 대주주 가운데 하나가 됐을 때 대출에 영향력을 행 사하려 한 적도 있었지만, 하나은행은 진로그룹에 자금을 거의 대출해주 지 않은 것으로 전해진다. 하나은행 관계자는 “상호견제가 철저하다 보 니 자연스럽게 전문경영인에게 중요한 결정의 대부분을 맡기는 풍토가 조 성돼왔다”고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은행은 주인은 있으면서도 전횡 이 없는, 우리나라에서는 매우 보기 드문 기업 가운데 하나다.


은행 주인찾기가 발목 잡을 수도

하나은행은 최근 또하나의 새로운 실험에 착수했다. 제주도에 점포가 1개 밖에 없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제주은행과 국제업무, 대출, 자산운용, 직원연수, 전산투자 분야 등에서 업무제휴를 한 것이다. 그동안 은행과 보험사, 은행과 증권사 등 이종 금융기관간의 전략적 제휴는 있었지만 은 행간 전략적 제휴는 이번이 처음이다. 21세기 종합금융그룹으로 성장을 꿈꾸는 하나은행의 개선행진은 과연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

가장 큰 변수는 정부의 이른바 ‘은행의 주인찾아주기' 계획으로 보인다. 하나은행의 한 관계자는 “정부가 계획대로 재벌의 은행 소유지분한도를 늘려 소수 재벌기업이 은행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줄 경우 하나 은행의 전문경영인체제도 어떤 형태로든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을 것” 이라고 내다봤다.

정남구 기자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07월0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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