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리재에서
1997년07월03일 제 164호 한겨레21

우리도 차라리 치부책을 만들자

사회적 건망증은 어제오늘 제기된 문제가 아니다. 큰 사건이 터질 때마다 감초처럼 등장했다. 그것이 이제 중증 치매 상태로 접어든 것 같다.

밥을 먹고 있으면서도 밥 먹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린다는 상태를 두 고 중증치매라 한다니 이같은 비교가 과연 적절한지에 대해서는 논란은 피할 수 없어 보인다. 그러나 ㅈ아무개 교사의 ‘촌지 치부책’ 발견을 둘러싸고 수사기관, 언론, 정부 그리고 학부모들이 질러대는 경악을 지켜 보면서 자신감을 갖게 된다. 오히려 한편으론 경련을 일으킬 정도로 경악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여름방학을 앞두고 선생님께 전할 정성’을 놓 고 심각한 고민에 빠져있을지도 모를 학부모들에 생각이 미치면 이 정도 의 비교는 오히려 안이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하게 된다.

‘촌지 치부책’이 보도된 뒤 이를 조사하던 사직당국이나 사회의 목탁이 라는 언론 그리고 교사들을 관리 감독하는 행정당국 그리고 대다수 학부 모들은 마치 외계인이 지구를 공격하기라도 한 것처럼 난리법석이었다. 특히 당사자라 할 교육 관계자 중 서울지역 초등학교 교장 5백20명은 지 금까지 몇번째인지도 ‘잊어먹은’ 자정결의를 다시금 발표했고 서울교육 청은 이미 설치해둔 ‘교육부조리 고발센터’에 더하여 ‘촌지수수고발 전담센터’를 본청과 각 지역교육청에 설치하도록 지시했다. 언론을 통해 나타난 각계의 반응은 ‘어떻게 이럴 수가’라는 어조의 비분강개 일색이 었다.

법석은 그러나 특별한 일이 있을 때나 봐줄 만한 법. 물론 ‘촌지 치부책 ’은 특별했다. 하지만 그 내용은 대개의 학부모가 익히 알만한 것이었다 . 때마다 현금이건 상품권이건 아니면 선물을 주고받았으며 학부모 중에 예외가 없었다는 내용이지만 새삼스런 사실은 아니었다. 문제의 ‘촌지 치부책’이라는 형식 또한 따져보면 도덕적으로나 법적으로 가중처벌할 사유는 되지 못한다. 도덕적 불감증만을 놓고 본다면 촌지를 받고도 당연 한 일로 치부해, 혹은 들킬지도 모르는 물증을 남기는 게 두려워 받는 즉 시 '잊어버리는' 사람이 더 심각하다고 할 것이다. 법석의 원인을 그 기 막힌 건망증에서 찾으려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촌지는 이제 아이를 갖고 있는 부모에게 피할 수 없는 ‘양육비’의 일부 가 되어버렸다. 적극적인 사람은 투자로 생각하기도 한다. 때문에 상당수 의 학부모는 번번이 촌지 때문에 시달림을 당하면서도 결론은 대개 비슷 하며 일단 결정이 내려지면 가슴을 쓸어내리며 깨끗이 잊어버리는 과정을 되풀이한다. 촌지 척결에 앞장선 사람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촌지 수사에 참여했던 한 수사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촌지요. 사회적 으로 문제가 되니까 수사하는 거죠. 제 집사람도 때되면 남들만큼 촌지를 전한다고 합니다.” 학기초 등 학부모들이 촌지 문제로 집단 노이로제에 빠질 때마다 이에 대해 '직필'을 휘둘렀던 언론사의 한 간부도 마찬가지 였다. “해서는 안 된다고 써댔지만 내 아이의 문제가 되니까 어쩔 수 없 더군요. 아이가 기죽어 지내는데 어떻게 합니까.” 그는 '한 장'을 주었 다고 했다.

현실이 그러니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이다. 사실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말 속엔 교사에게 책임을 온전히 떠넘기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스스로 도덕적 자책 따위에서 자유로와지고 언제든 잊어버릴 수 있기 위해선 그 렇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때문에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가 할 일은 그 편한 선택적 건망증을 쫓아 버리고 치부에 대한 기억력을 회복하는 것이 아닐까. 병세가 치료 불능 상태라면 ㅈ아무개 교사처럼 치부책을 하나씩 만들어 두는 것은 어떨까. 마음에 켕기는 일들을 꼬박꼬박 기록해 반성의 치부책으로 삼자는 것이다 . 그리고 비단 촌지 문제뿐 아니라 삼풍백화점이나 성수대교 붕괴, 대통 령 아들을 포함한 친인척 문제, 한보 금융비리 및 뇌물수수, 노동법 안기 부법 날치기사건 그리고 각급 공직선거에서의 잘못된 선택 등을 낱낱이 기록해 건망증으로 인한 그런 파렴치 사건의 재발을 막는 경종으로 삼자. 물론 건망증을 극복한다면 귀찮은 기록은 필요치 않을 것이다. 이번 법석 은 특히 세계적인 재벌의 2세로서 삶을 거부하고 빈민굴의 학교에 투신했 다가 살해된 미국의 조너선 레빈 선생 사건과 비교돼 더욱 착잡하다. 그 럴수록 잊지 말자.

한겨레21 편집장 곽병찬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07월0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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