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과학읽기 |
1997년07월03일 제 164호
|
|---|
김환석/ 국민대 교수·사회학
지난 2월 말 전세계를 놀라게 했던 복제양 ‘돌리’의 탄생은 인간복제의 가능성을 연 신호탄으로 여겨지면서 많은 윤리적·사회적 논란을 불러일 으켰다. 당시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은 인간복제 연구에 대한 연방정부의 지원을 금지하고 국가생명윤리위원회로 하여금 그러한 연구에 대해 적절 한 통제 방안을 강구하도록 지시한 바 있다. 마침내 이 위원회에서 3개월 의 논의를 거쳐 마련된 ‘제안’이 클린턴 대통령에게 제출되었고, 클린 턴은 지난 6월9일 이 제안을 기초로 의회에 인간복제에 관한 법안을 상정 하겠다고 발표하였다.
그런데 위원회의 이번 제안 내용을 보면 ‘복제인간’이라는 윤리적으로 뜨거운 쟁점은 피해가면서 생명복제 연구라는 과학활동의 자유는 최대한 보장해주고자 하는 복합적 의도가 담겨져 있다. ‘돌리’에 적용한 방법 과 같은 체세포의 핵이식을 이용한 인간 배아의 복제 실험은 허용하되, 이 복제된 배아를 자궁에 옮겨 인간을 탄생시키는 것만 금지한다는 것이 다. 인간을 복제하려는 시도는 인간의 존엄성과 개체성을 파괴하고 기형 아의 위험 등이 크기 때문에 금지해야 하지만, 유전자와 동물의 복제는 그런 윤리적 문제가 없고 의학과 농업의 발달에 큰 기여를 하기 때문에 규제돼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제안 내용을 가장 반긴 것은 과학자와 기업이다. ‘돌리’ 탄생 이후 인간복제에 대한 시민의 비판적 여론으로 인해 혹시라도 자신의 연 구에 규제가 가해지지 않을까 염려했던 생명공학자들은 이번 결정에 매우 안도했을 것이다. 그러나 더욱 환영의 뜻을 나타낸 곳은 다름아닌 생명공 학분야에 종사하는 기업들로서 이들이 모여 구성한 미국의 생명공학산업 협회(BIO)에서는 클린턴 대통령이 상정할 법안 내용에 이미 찬성한다는 입장을 표시하였다. 사실상 대부분의 과학자들이 이들 기업과 깊이 연관 되어 있기 때문에 이러한 입장의 일치는 놀라운 일이 아니다. 생명공학산 업의 번창은 기업에게는 초과이윤과 성장을, 과학자에게는 연구비와 명성 , 그리고 특허 등을 통한 적지 않은 경제적 보상을 약속해 주는 그야말로 ‘황금알을 낳는 거위’인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현재 제안된 형식적인 규제조차도 얼마나 그리 고 언제까지 실효가 있겠느냐는 회의가 든다. 이는 20여년 전 유전공학이 태동할 적에 있었던 사회적 논쟁의 역사를 살펴보아도 드러난다. 1974년 ‘유전자재조합’(recombinant DNA) 연구에 앞장섰던 분자생물학자의 한 사람이었던 폴 버그는, 이러한 연구의 환경적·생물학적 위험이 정확히 밝혀질 때까지 실험을 자진해 중지할 것을 전세계 과학자들에게 제안하는 성명서를 10명의 다른 유명한 분자생물학자들과 함께 발표하였다. 이 중 지 조처는 과학의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사건이었고 과학에 대한 시민의 참여와 논쟁을 자극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과학자만의 논의로 그치려 했던 문제가 시민 참여와 비판으로 번 지자 과학자들은 곧 반대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의회에서 ‘생물재해 ’(災害)가능성을 극소화하기 위해 유전자재조합 연구를 규제하는 법을 제정하려는 움직임이 보이자 과학자들은 이를 강력히 제지하는 로비를 벌 였다. 아울러 세계의 주도적 분자생물학자들은 유전자조작의 가치와 규제 의 최소화를 각국 정부에 설득하는 ‘압력집단’의 구실을 하는 국제위원 회(COGENE)를 결성하였다. 두번에 걸친 석유파동과 1979년 레이건의 대통 령 선출은 유전공학 연구에 대한 정치적 규제를 낮추는 계기들이 되었고, 유전공학은 급속히 산업화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에 따라 본격적인 ‘생 명공학산업’의 시대가 열리게 된 것이다.
생명공학 연구에 대한 관심의 초점이 70년대의 생물재해로부터 완전히 벗 어나 80년대에는 혁신과 경쟁력으로 변화하였다. 신자유주의는 이를 든든 히 뒷받침하는 이데올로기가 되어 왔다. 90년대의 ‘세계화’는 시장경쟁 이라는 논리 앞에 모든 윤리적 고려를 거추장스러운 것으로 만들고 있다. 시장과 굳건히 결합한 과학은 산업경쟁력에 봉사하는 한 근본적으로 규제 하기가 점점 어려워질 것이다. 그렇다면 과학의 현재 모습은 과연 우리의 미래를 맡겨도 좋을 만큼 안전한 것인가?
© 한겨레신문사 1997년07월0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