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엽서
1997년07월03일 제 164호 한겨레21

`한겨레21' 162호를 읽고


한국정치, 좌우의 날개 달아라

표지이야기 ‘유럽, 좌파대행진’은 최근 유럽에서 몰아치고 있는 ‘좌파 열풍’을 분석하고 여러 각도에서 재조명해 시대적 상황에 적잖은 의미를 부여했다. 전지구적 탈냉전 국제정세 구도 속에 유럽에서 나타난 좌파의 열풍은 기존의 정치 메커니즘을 깨는 새로운 흐름의 등장이란 측면에서 그 분석은 더욱 뜻깊다 할 수 있다. 그러나 한가지 아쉬운 점은 그것이 유럽에서 나타나는 현상의 분석에만 집착했을 뿐 우리의 현실정치와의 연 계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전세계적 진보정치의 흐름과 달리 그 어디에서도 진보적인 정치 행태를 찾아볼 수 없다. 요즘 의 대선 열기는 순수(?)한 보수정당들의 잔치일 뿐이며 새로운 진보정당 의 출현은 쉽게 기대하기 어렵다. 유럽의 좌파 열풍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할 것인가, 그것이 고민스럽다.

길정수/ 서울시 관악구 신림4동 239-21


‘프락치’의 진실을 알고 싶다

특집 ‘학생대중에게 신임을 물어라’는 시의적절한 것이었으며 공감이 가는 내용이었다. 분명 한총련은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나야 한다. 출범식 에 참가했던 어느 학생의 고민처럼 학생운동은 사람이 사람답게 살고 인 권이 최고의 가치로 존중되는 세상을 열어가야 한다. 소중한 목숨을 함부 로 여겼다는 것은 어떤 이유로도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끊임 없이 떠오르는 의문이 있다. 이석씨의 불투명한 행적에 대한 이야기다. 프락치라면 죽여도 된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프락치를 때렸다는 것과 무고한 시민을 때렸다는 것은 분명 의미가 다르다. 누구도 밝히려 들지 않은 것은 죽은 자에 대한 예의일까. 그러나 생명이 소중한 만큼 진실도 수중한 것이다. 그의 정체는 과연 무엇이었는지 그것을 알고 싶다.

장지영/ 부산시 연제구 거제1동 150-7 2/2


누가 한총련을 고립시켰는가

이철상씨의 ‘국민 속으로 돌아가야 합니다’를 읽으며 흐르는 눈물을 주 체할 수 없었다. 한총련이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떠나 질 않는다. 모두들 자신의 몸만 사리다 떠나간 것은 아닐까. 스스로가 과 연 얼마나 많은 고민을 가졌던가에 대해 반성도 해본다. 중요한 것은 학 생운동 간부들의 헌신성만도 아니고 반짝이는 자기고백적 비판도 아닐 것 이다. 사회에서 자신의 자리를 잡고, 혹은 찾으려는 선배들과 학교에서 깃발을 치켜든 후배들이 서로 얼마나 애정을 갖고 함께 고민을 나누어 보 았을까. 섣불리 상대방을 재단하고 비난하려 들지는 않았는지 모를 일이 다. 이젠 진정으로 서로 마음을 열고 후배들과 대화를 나눠야 한다. 서로 에 대한 애정을 확인하려 들지도 않는 이들은 비난의 화살을 일방적으로 날리지 않는 게 옳을 것이다.

최선영/ 경북 포항시 흥해읍 마산리 현대강관맨션 나-308


신빙성 부족한 맹렬 참가자의 고백

한총련에 대한 특집에 할 말이 있다. 물론 한총련은 학생들에게 신임을 물어야 하지만 기사는 그야말로 ‘한총련 죽이기’와 별반 다름이 없었다 . 우리가 접하는 제도권 언론들의 주장과 너무나 유사한 것이다. 물론 < 한겨레21>이 학생운동의 대변자는 아니다. 그런 기대 자체가 헛된 것인 줄 안다. 이 기사는 너무나 편집의도대로 짜여졌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 다. 더구나 한총련 출범식을 참가하고 나서 회의를 느끼는 한 학생의 글 은 신빙성이 없다. 도대체 그는 누구란 말인가. 적어도 필자에 대한 약간 의 언급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설사 대부분 참가한 학생들의 정서가 그 렇다고 판단이 되더라도 이런 식으로 기사를 쓸 수 있는지 묻고 싶다.

김경은/ 나우누리 하늘못


미국 상술에 놀아나는 주권국가

포커스 ‘미국이 허락을 안하므로…’는 우리나라의 국제적 위치를 확인 하게 해주는 기사였다. 도대체 ‘안보협력’이라는 말이 무엇인지 모를 일이다. 대미종속의 서러운 단면으로 여기기엔 너무 억울하고 분한 일이 다. 군사적 우월성을 내세워 한 나라를 흔들어대는 미국을 마냥 탓할 수 만은 없는 현실이다. 미국이 우리의 군사력을 온통 틀어쥐고 있으며 정치 와 경제를 좌지우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그렇게 오만하게 나올 수 있 는 것이다. 대북정보를 미끼로 무기 수입을 강요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우리 자주포의 브라질 수출을 막는 것은 단순히 경제적 이익을 방해하는 것만이 아니다. 주권국가를 업신여기며 마냥 가지고 놀려는 처사인 것이 다. 우리에게 미국이란 나라는 어떤 위치인지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 다.

이무용/ 서울시 관악구 신림8동 567-20


‘우리식 환경규제’가 필요하다

과학 ‘지구 덮치는 공포의 질소’를 통해서 환경문제에 대한 경각심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미국 환경규제 정책을 우리 현실에 일 방적으로 적용하는 것에는 찬성할 수 없다. 미국과 우리나라는 자연환경 ·생활방식 등의 차이를 언급하지 않는 가운데 미국은 이러한데 우리는 어떤가라는 식으로 기사를 마무리한 것이 아쉽다는 말이다. 과학적 접근 으로 시작해 현 국내 상황에 대한 흐름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다면 기사가 더욱 빛났으리라 여겨진다. 환경이 미치는 사회적 문제를 뒤늦게 깨닫고 이제서야 제반의 환경정책을 세우는 우리와 미국을 단순 비교할 수는 없는 일이다. 단순히 보고 듣고 생각하는 과학이 아니라 현실에서 실천하는 과학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정했으면 한다.

주홍신/ 대전시 유성구 전민동 세종아파트 109-102


지렁이들은 눈물을 흘려야 한다

만리재에서 ‘용으로 분장한 지렁이들’은 통쾌했다. 용은 미래를 예시하 는 상상 속의 신비로운 동물로, 가뭄이 들었을 때 기우의 중요한 대상신 이 되어 민중의 어려움을 보살폈다고 한다. 그런 용을 신한국당의 대선주 자에게 비유하는 것은 용에 대한 모욕이라 할 수 있다. 그들 가운데 어느 누가 국민과 함께 고난의 길을 걸으며 민중의 대변자 노릇을 했는가. 그 들 대부분은 권력의 편에서 안락한 삶을 꾀했을 뿐이다. 과거의 삶이 미 래를 보장할 수 없다 할지라도 지난날 민중을 외면했다면 거기에 대한 사 죄와 참회의 눈물이 필요하다. 그것도 없이 국민의 지지를 얻으려 한다면 어불성설이다. 국민의 한표를 얻기 위한 술수는 이제 통하지 않는다. 차 라리 지렁이가 되어 국민에게 짓밟히는 일이 있더라도 진정으로 스스로를 책임지고 국민과 함께 하려는 모습을 보여야 마땅하다. 지금은 지렁이의 눈물이 필요한 때다.

이세연/ 전북 군산시 조촌동 현대아파트 104-604

© 한겨레신문사 1997년07월0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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