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점	1997년07월03일 제 164호

미 담배회사 사면초가

(사진/미국 37개주와 합의된 흡연피해 보상 및 의료지원 방안을 발표하는 담배회사 대표들. 금연론자들은 이번 합의가 실질적으론 금연운동을 후퇴시켰다고 비난한다. )

“2009년 이후 미국은 ‘담배없는 세상’이 될 수 있을까?”

지난 6월20일 미국 37개 주 사법당국과 거대 담배회사들이 맺은 ‘합의문 ’의 실효성에 대한 논란이 미국 내에서 확산되고 있다. 이날 주 사법당 국과 담배회사들은 “담배업계가 앞으로 25년 동안 흡연 피해보상 및 의 료지원 명목으로 총 3천6백85억달러(약 3백30조원)를 낸다”는 데 합의했 다. 지난 4월초 협상 시작후 3개월만의 일이다.

니코틴 전면금지는 2009년 이후 결정

이날 발표된 합의문에는 또 실내경기장을 포함한 모든 옥외담배광고와 인 터넷 담배광고를 금지한다고 명시됐으며, 자판기 담배판매도 금지됐다. 또 담배업계는 청소년 흡연을 줄여나가는 데 동의했고, 미국식품의약국(F DA)이 니코틴을 마약으로 규정해 함량을 통제하도록 ‘양해’했다. 마지 막으로 두 진영은 식품의약국이 오는 2009년 이후 ‘니코틴 전면금지’ 여부를 결정한다는 데 대해서도 의견을 같이했다.

합의 발표 뒤 주정부쪽 협상대표였던 미시시피주 검찰총장 마이클 무어 는 “이 합의는 건강과 관련한 이번 세기 최대의 성취물”이라며 협상 결 과를 높이 평가했다. 이로써 미국 담배업계는 사멸의 길로 들어서게 됐다 는 말이다.

이런 시각은 담배업체의 주가에서도 확인된다. 이날 담배업체 주가는 ‘ 합의’ 발표 직후 상승세를 보이다가 구체적 합의내용이 알려지면서 하락 세로 돌아섰다. 지루한 협상이 끝났다는 소식에 투자자들의 투자마인드가 살아나다 담배업계에 ‘가혹한’ 합의문안을 듣고는 투자심리가 얼어붙은 것으로 분석된다.

그만큼 이 합의는 5백년 전 아메리카인디언 문화가 유럽인들에 의해 소개 되면서 시작된 담배 역사에서도 ‘획기적인 일’이 분명하다. 그러면 과 연 이번 합의가 유럽인들에 의해 ‘만병통치약’으로 소개됐던 담배가 ‘ 마약’으로 그 구실을 마감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까? 하지만 미국 내 일 부 금연운동가들은 “아직 멀었다”며 이번 합의에 높은 점수를 주는 데 인색하다.

금연운동가인 전 미국 식품의약국장 데이비드 케슬러 등은 합의문 발표 뒤 한 토론회에서 “이번 합의는 금연을 위한 실질적인 규제를 이루는 데 미흡하다”고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예를 들어 합의문에 명기된 담배 업계의 청소년 흡연비율 감축 의무조항은 실제로는 지켜지기 어려운 조항 이라는 것이다. 거창한 합의에 비해 처벌규정이 약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2009년 니코틴 전면금지 결정’도 빛좋은 개살구에 그칠 가능성 이 높다고 지적한다. 이를 행하기 위해서는 식품의약국이 이런 조처가 건 강 증진에 실질적인 도움이 된다고 입증해야 한다는 단서조항 때문이다.

따라서 금연운동가들은 ‘2009년 니코틴 금지 결정 판단’ 조항이 오히려 “식품의약국의 담배 규제를 효과적으로 방해할 것”이라고 비판한다. 왜 냐하면 이번 합의는 지난 4월25일 노스캐롤라이나 연방법원이 낸 판결보 다도 후퇴한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당시 노스캐롤라이나 연방법원은 “식품의약국이 담배를 중독성 마약으로 규제할 수 있다”고 판결했다. 하지만 이번 조처는 결과적으로 식품의약국의 ‘니코틴 판금조처 결정’ 을 12년이나 연기시켰다. 이런 비판에 대해 협상 참가자들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반응이다. 비록 노스캐롤라이나주에서 그런 판결이 나왔 지만 이런 판결이 미국의 50개 다른 주에서 모두 이뤄지기를 바랄 수는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금연론자 “오히려 담배업계 숨통 텄다” 비판

협상참석자들은 “담배로 인해 죽어가는 미성년자들이 지금 현재도 발생 하고 있다”며 이번 합의로 미국 전체에서 일괄적으로 이를 실현할 수 있 는 기틀을 마련한 것은 큰 성과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비판론자들은 목소리를 낮추지 않고 있다. 그간 미국 담배업계가 처한 위기를 고려할 때 이번 합의가 담배업계의 숨통을 터준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담배업계는 지난 94년 니코틴에 중독성이 없다고 발표했다. 그 리고 담배가 각종 암을 유발한다는 의학계의 지적도 부정해왔다. 그러나 이런 담배업계의 태도가 명백한 거짓말임이 밝혀진 사건이 올해 초 일어 났다. 지난 3월 미국 내 담배판매순위 5위인 리겟그룹이 “담배가 중독적 이고 암을 유발한다”고 결론지은 내부문건을 공개했기 때문이다. 리겟그 룹은 또 미성년자에게 담배판매를 확대하기 위한 마케팅전략을 세웠다는 사실도 시인했다.

지난 6월20일 타협에 이른 마라톤 협상은 바로 리겟그룹의 공개 이후인 지난 4월 초부터 진행돼온 것이다. 담배업계는 이런 ‘리겟그룹의 변절’ 과 2백여건에 이르는 흡연관련 소송에서 패소판결이 잇따르자 궁지에서 벗어날 필요에 따라 ‘합의’를 택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번 합의에서 담배업계는 이전의 흡연관련 피해에 대해서는 면책특권을 따냈다.

이번 협상에 대한 이런 의구심은 지난 96년 8월 담배를 마약으로 규제하 려는 조처를 취하겠다고 발표했던 클린턴 대통령의 유보적 태도에서도 잘 드러난다. 클린턴 대통령은 “흡연은 우리 국민이 처한 가장 중요한 건강 문제”라면서도 이번 합의에 대해선 “행정부에 좀더 깊이 연구하라고 명 령했다”고 밝혔을 뿐 이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어떤 말도 하지 않고 있 다. 혹시 있을지도 모를 담배업계의 ‘함정’을 피하기 위해서다.

이번 합의와 관련해 민주당 상원의원 3명이 해외판매를 규제하는 내용이 없다는 비판을 제기한 것도 주목거리다. 이들은 이번 합의에 따라 담배가 ‘국내에서는 마약, 국외에서는 훌륭한 수출상품’으로 취급되는 것은 도 덕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비판한다. 이번 조처로 국내에서 고전이 예상되는 미국 담배업계가 해외판매를 늘리는 방식으로 이를 만회하려 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실제로 미국 담배시장의 절반을 장악하고 있는 필립 모리스의 경우, 전체 판매수익의 70%는 해외부문에서 거둬들인다. RJR 레이놀스도 수익의 50% 는 해외판매에서 온다. 하지만 이번 조처에 따라 이 비율은 더 높아질 것 으로 예상된다. 미국 담배업계가 아직 담배규제가 미약한 제3세계 등에 대한 판매확대로 ‘3천6백여억달러의 손실’을 보상하려 할 것이 명백하 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양담배 수입이 처음 허용된 지난 88년 이후 양담배의 시장점유율이 꾸준히 높아져 올 들어서는 11.5%에 이르고 있는 실정이다.

제3세계 판매확대로 손실 보전하라

세계 여러 나라에서 이런 미국의 ‘이중잣대’를 비판하고 나선 것은 따 라서 당연하다. 미국의 ‘담배 합의’가 이뤄진 지 하루 만인 지난 6월21 일 대만 등 19개국의 금연단체들은 “미국 담배회사들은 전세계적 금연운 동을 위해 해마다 1백억달러씩을 지원해야 한다”고 촉구한 것도 이런 ‘ 이중잣대’에 대한 비판에서 출발한 것이다. 우리나라의 과소비추방범국 민운동본부도 지난 6월24일 기자회견을 갖고 “대기업편의점의 외제담배 판매금지, 언론사들의 외제담배 광고금지” 등을 촉구했다.

미국이 제3세계 금연운동가들의 “담배 중독성을 염려하는 미국은 자국 이기주의라는 더 큰 중독증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경고에 어떻게 대처할 지 주목된다.

김보근 기자 한겨레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