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1997년06월19일 제 162호

‘사랑받는 학생운동’을 열망하는 한 선배의 고언

이철상/ 91년 전대협 의장 권한대행·전국연합 대변인실

어렵고 힘든 펜을 듭니다. 저는 서울대 87학번이고 91년에 총학생회장을 했으며 제5기 전대협 의장 권한대행을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민주주의 민족통일전국연합 대변인실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아, 우리가 후배들을 외롭게 했구나

저는 요즘 제가 학생운동을 했을 때와 크게 다르지 않은 감정에 휩싸여 있습니다. 당시는 여기저기서 정부를 비판하는 소리가 넘쳐나고 학생들은 그 목소리를 대변하기 위해 직접행동에 나섰습니다. 그 속에서 꽃다운 젊 은이들이 죽어갔습니다. 강경대 학우를 시작으로 계속되는 학생들의 죽음 앞에서 저는 엄청난 무력감과 슬픔을 느껴야만 했습니다. 오열하는 부모 님 앞에서 머리를 떨구고 아무런 위로의 말도 할 수 없었던 시절! 누구의 책임이라고 말하기조차 부끄러운 참담한 현실 앞에서 할말을 잊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그때와 똑같은, 어쩌면 더욱 당혹스러운 상황을 맞으면서 이 제 저는 ‘우리가 도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가’ 하는 막막한 심경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정부는 출범식을 원천봉쇄했고, 학생들은 이에 맞섰습니 다. 그리고 한 사람이 죽어갔습니다. 그가 학생이든 전경이든 시민이든 한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면서 변함없이 굴러가는 현실이 혐오스럽습니다. 저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들이 잠시 눈을 피해있다가 화들짝 달려들었 던 것입니다. 우리 사회가 아직도 6년 전 그곳에서 한발자국도 벗어나질 못했구나!

저는 텔레비전을 통해 경찰서 유치장에서 포승줄에 엮여 이리저리 밀리는 후배를 보며 흐르는 눈물을 멈출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저의 모습 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막 스무살을 넘겨 희망에 부풀어 있을 나이에 몸의 자유를 빼앗긴 후배들의 모습은 31년을 살아온 제 인생에 철퇴가 되 어 날아왔습니다. 재방송에 재방송을 거듭하는 보도를 더이상 볼 수가 없 었습니다.

저는 사실 후배들에게 차마 할말이 없습니다. 후배들에게 쏟아지는 비난 과 고통은 사실 저에게도 똑같이 쏟아질 수 있었던 것이며 처지와 상황만 조금 다를 뿐 제가 겪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후배들이 겪고 있는 정신없이 어지러운 상황이 어떤 것일지 조금은 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

후배들이 거리로 나서 우리 때보다 더 길어진 진압봉에 맞설 때 그저 뒷 짐지고서서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 정말 후회스러웠습니다. 후배들이 정부 를 비판하고 규탄할 때 그래도 한번 두고보자며 정부를 두둔했던 일도 마 음에 걸립니다. 명동에서 한양대로, 한양대에서 다시 다른 학교로 이리저 리 옮겨다니며 단식농성조차 맘편히 못할 때 편하게 밥을 먹으며 시국을 논하던 제 모습이 부끄럽습니다. 화염병을 던지던 대학시절을 자랑스러운 추억으로 떠들어대다가도, 후배들의 폭력시위 장면이 텔레비전에 나오면 시위방법이 잘못되었다는 친구들의 말에 변변한 항변조차 하지 못했던 저 의 이중적인 사고가 부끄럽습니다. 학생운동을 비판하는 주위 사람들이 있으면 80년대에는 전두환 노태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며 정당성을 주 워섬기기에 급급했던 제가 어쩌면 후배들을 외롭게 했는지도 모릅니다. 내가 후배들을 막다른 길로 몰아넣었구나. 내가 후배들을 고난의 길로 밀 어보냈구나. 후회로 속이 쓰립니다. 학생들에게 돌을 던지려는 사람이 있 다면 저에게 돌을 던져주십시오, 제가 바로 주범이요, 폭행가담자요, 배 후조종자입니다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제가 생활 속으로, 그래도 조금씩 나아지는 재미에 산다며 자리잡아 떠나갔을 때 후배들은 외롭게 깃발을 들었습니다. 정부를 비판하며 민주주의를 해보자고 깃발을 들었습니다.

그 매질을 함께 맞으려 합니다

(사진/"텔레비전을 통해 경찰서 유치장의 후배를 보며 흐르는 눈물을 멈출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저의 모습이었습니다." )

지금은 온갖 기획기사에 특집까지 동원해 한총련에 대해 보도하고 있는 언론들이 불과 몇주 전 여러분들을 얼마나 냉담하게 대했는지 저는 기억 합니다. 삼팔선보다도 더 깊은 심연이 학생들과 국민들 사이를 가로지르 고 있었습니다. 어디에서도 학생들의 주장과 이야기를 찾아볼 수 없었습 니다. 그 속에서 공허한 메아리처럼 느껴졌을 후배들의 구호!

이제 부끄러운 선배의 모습을 넘어 함께 역사의 그 자리에 서려 합니다. 여러분들에게 쏟아지는 그 매질을 함께 맞으려 합니다. 그래서 후배들에 게 저도 이제 여러분과 똑같은 처지가 되겠다는 결심으로 몇마디 이야기 하고자 합니다. 이제 후배들에게 떠밀어 놓은 짐을 함께 지려는 심정으로 몇 가지 당부의 말을 하고자 합니다. 후배들이 집회결사의 자유를 제한당 하고 쫓긴다면 그 앞에 제가 서겠다는 각오로 말입니다.

모든 우연은 내재화된 필연임을 깊이 통찰할 때 역사가 보인다고 합니다. 후배들은 이번 사건을 결코 재수없는 우발적 사고로 돌려서는 안 됩니다. 강철과 강철이 부닥쳐 불꽃이 튄 것입니다. 제발 더이상 홀홀단신 정부에 맞서기 위해 칼을 벼리지는 말아주십시오. 지난 봄 날치기 노동법을 폐지 하기 위한 노동자들의 투쟁을 한 번 되새겨봅시다. 몇 차례나 자체의 투 쟁을 연기하면서라도 종교계 지도자들과 전체 국민들이 그 뜻을 납득할 때까지 완강하게 기다렸습니다. 더구나 학생운동은 작년 연세대 사건 이 후 각계 각층의 사회세력들과 옳고 그름을 떠나 소원해져 있는 상태입니 다. 하지만 그들 모두는 이 땅의 민주주의와 통일을 위해 고민하는 사람 들입니다. 국민 모두가 단결하여 날치기 노동법을 무력화시킨 것처럼 후 배 여러분은 혼자만의 대결이 아닌 국민 모두가 함께하는 실천을 해야 합 니다. 여러분이 주장하는 대선자금 공개와 김영삼 하야의 주장이 결코 여 러분들만의 생각은 아닐 것입니다.

그 사람들과 함께 다시 차분하게 이야기를 시작해야 합니다. 그들과 머리 맞대고 숙의하고 함께 움직여야 합니다. 학생운동은 교정 곳곳에서부터 수많은 학생들과의 고민과 토론 속에 다시 세워가야 합니다. 바로 그곳에 서부터 신뢰와 정당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학생들의 활동과 조직이 합법 적이고 대중적인 모습으로 거듭나는 데 총력을 기울여야 하는 것입니다. 민주주의를 가로막는 사람들과 싸우려면 먼저 우리가 바르게 서야 합니다 .

쓸개를 씹는 반성과 혁신으로

옛말에 적을 치기 전에 나를 세우면 적은 제풀에 쓰러진다고 했습니다. 어둠은 불을 밝혀야 물러나는 법입니다. 어둠을 휘젓는다고 어둠이 사라 지지는 않습니다. 다시 들어가십시오. 학생들의 작은 모임부터 진지하고 건강한 이야기로 가득 채워내십시오. 모든 국민들과 학생들로부터 지지를 획득해내겠다는 각오로 임하십시오. 상황이, 정세가 극도로 악화돼 더이 상 희망을 찾기 어려울 때 역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역사 속 에서 장강으로 살아가는 국민을 믿어야 합니다. 쓸개를 씹는 반성과 혁신 의 노력으로, 한번의 죽음으로 억만년을 살아가는 불사조처럼 여러분은 그렇게 다시 일어서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