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1997년05월10일 제 156호

내일의 주인에게 오늘의 권리를

(사진/내일의 보배인 어린이가 무사히 자라기에는 우리 사회에는 너무나 많은 덫이 널려 있다. 어린이들의 맑은 꿈을 지키기 위해선 91년에 가입한 유엔 `어린이.청소년 권리조약'이 반드시 준수되어야 한다.)

서울 ㄷ초등학교 6학년생 영진이(12)는 오늘도 학교에서 가방검사를 받았 다. 검사할 때마다 선생님은 항상 비디오테이프, 담배, 음란만화를 가지 고 다니지 말라는 뜻이라고 설명한다.

“저학년 때는 잘 몰랐는데 일기 검사 하는 것도 이제는 왠지 찝찝해요. 속옷 검사 할 때면 도망가고 싶어요.” 너무 일상적으로 이뤄져 이제는 상식이 되어버린 이런 검사를 아이들에 대한 사생활 침해라고 한다면 교 사와 학부모들은 아마 웃을 것이다. 교육적 차원에서 이뤄지는 일이라는 대답은 언제나 거역하기 힘든 힘을 갖고 있다. 그러나 어른들 세계에서 벌어졌다면 영장없는 수색으로 불법이다.

“걸레자루가 부러지는데 사랑의 매라뇨?”

중학교 2학년 호영이(14)의 불만은 조금 더 심각하다.“학교에서 제일 불 만스러운 일은 뭐니뭐니해도 선생님들이 심하게 때리는 거예요. 쇠파이프 에 검은 테이프를 감아 때리기도 하고, 필드하키 채로 엉덩이를 때리기도 하죠. 대걸레 자루가 부러지는 건 흔히 있는 일이구요. 사랑의 매요? 웃 기지 말라고 하세요. 죽음의 매라면 몰라도. 너무 심하다 싶은 선생님들 은 몰래 실컷 한번 때려주고 싶다는 생각이 가끔씩 들어요.”

그러나 우리 사회는 찬반논란을 벌이긴 하지만 항상 그 수준의 문제로 논 의는 모아진다. 최근 문교부가 법적으로 금지했지만 교육현장에 얼마나 효력을 발휘할지는 미지수다. 교편(敎鞭·가르침의 채찍)을 잡는다는 표 현은 선생님이 된다는 것과 동의어로 쓰이는 게 우리의 현실이기 때문이 다.

ㅂ고등학교 1학년 선미(16)는 요즘 학교 가기가 싫다. 몇대째 내려오는 불교 집안인데 기독교 재단에서 운영하는 학교에 입학하게 된 것이다. 뺑 뺑이를 돌려 배정된 학교라 싫어도 입학해야 했다. 의무적으로 참석해야 하는 채플시간에 엉뚱한 책을 읽다가 야단을 맞은 게 한두번이 아니다. 선미와 같은 처지의 학생들도 많다. 그들은 교육행정의 편의 때문에 종교 의 자유라는 기본권을 제한받고 있다.

어린이와 청소년의 기본적인 권리가 짓밟히는 현장은 이런 곳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남아선호에 따라 이뤄지는 성감별과 낙태 탓에 세상구경도 못하는 여자아이들은 해마다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생명권 훼손에 대한 사회적 속죄는 별로 없다. 교통사고 사망자 가운데 10% 안팎은 14세 미만 의 아이들이다. 아이들은 매일 가정과 학교와 거리에서 폭력에 시달린다. 중고등학교 학생회장에 출마하려면 성적이 일정 수준 이상이어야 한다. 한마디로 우리나라 어린이·청소년들의 삶은 권리라는 단어와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현상은 엄격히 말해 국제법적으로 불법이다. 우리가 가입하고 있는 ‘어린이·청소년의 권리조약’(Convention on the Right s of the Child)에 정면으로 배치되기 때문이다. 조약은 국내법률과 같은 효력을 갖는다.

국내에서는 그 존재를 아는 사람이 얼마 되지 않을 정도로 푸대접받고 있 지만, 조약이 지니는 세계사적 의의는 결코 적지 않다. 이 조약은 역사상 처음으로 어린이·청소년을 보호와 수혜의 대상이 아니라 권리의 주체로 인정했다. 조약은 지난 78년 폴란드의 제안이 있은 뒤 79년부터 10년 동 안의 작업 결과 89년 11월20일 유엔총회에서 체결되고 90년 9월2일 비준 국이 20개국을 넘어 발효됐다. 올해 초까지 1백90개국(3개 나라만 미가입 )이 가입해 유엔 조약 가운데 가장 많은 나라가 참여한 세계 최대의 국제 조약이다.

한국은 세계 최대 국제조약에 위배

한국은 지난 91년 국내 비준 절차를 마쳐 정식회원국이 됐다. 비준한 지 올해로 7년이 흘렀건만 한국 정부는 이 조약에 대한 교육과 홍보를 거의 하지 않고 있다. 그 결과 조약이 체결되어 국내에도 적용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곳은 아동 관련 민간단체와 학계, 일부 정부부처 당국자뿐이다 . 정부는 이 점에서부터 조약을 위반하고 있다. 조약 42조는 “당사국은 조약의 원칙, 규정을 어른과 어린이에게 적극적으로 알려야 한다”고 못 박고 있다.

(사진/도시 곳곳에 어린이 생명을 위협하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차도와 인도가 구분이 안 된 도로를 따라 어린이들이 집으로 돌아가고 있다.)

조약은 만 18세 미만의 어린이·청소년의 권리를 규정하고 있다. 조약은 ‘어린이 권리에 관한 제네바선언’(1924년), ‘어린이의 권리선언’(19 59년) 등 지금까지 나왔던 어린이 권리에 관한 국제적 동의 수준과는 질 적으로 다른 내용을 담고 있다. 지금까지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개념은 특별한 보호와 어린이에게 최선의 것을 제공한다는 원칙이었다. 그리고 조약이 아니라 선언이라는 점에서 분명 한계가 있었다.

법적 구속력이 없어 현실에서 적용될 가능성이 없었던 셈이다. 그러나 이 번 조약의 가장 큰 특징은 어린이를 권리의 주체로 보는 원칙이 모든 조 항에 녹아있다는 점이다. 즉, 그 어린이에게 영향을 줄 모든 사항에 대해 자유롭게 자신의 견해를 밝힐 권리를 정당한 것으로 못박은 것이다. 이에 따라 사법적, 행정적 절차에 청문을 보장(12조)하고 있다. 이를 현실에 적용한다면, 부모의 이혼에 대한 반대권이나 불합리한 학교 교칙에 대한 반대권 등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조약은 이와 함께 생명과 생존에 관한 권리, 학습과 문화에 관한 권리, 시민적 권리와 자유, 양육과 보호를 받을 권리,신체의 자유 등을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특별한 상황에 있는 어린이, 즉 난민, 장애아, 소수민족, 마약, 성적 착 취와 학대 등 최근의 인권상황을 반영해 조약의 현실적 적용가능성을 높 여놓았다.대한민국 정부는 91년 조약 비준 뒤 2년 안에 이뤄져야 할 최초 보고서 제출을 지난 94년에야 마쳤다.

지난해 1월 ‘유엔 어린이·청소년 권리위원회’(Committee on the Righ ts of the Child)는 한국의 어린이 권리 상황에 대한 집중적인 심사를 마 친 뒤 ‘한국에 대한 최종의견’(Concluding Observations)을 채택했다. 32개항으로 된 이 보고서는 대한민국 어린이의 권리상황에 대한 전체적인 평가와 권고안으로 이뤄져 있다. 이 보고서는 특히 개선돼야 할 인권상황 으로 어린이의 의사를 무시하는 입양제도, 어린이를 위한 형사절차의 미 비, 소년노동문제, 소년소녀 가장, 사생아와 장애어린이, 억압받는 어린 이·청소년의 표현의 자유와 집회 결사의 자유 등을 꼽고 있다. 또 한국 정부가 이 조약을 국민에게 널리 알리지 않고 있을 뿐만 아니라 어린이· 청소년 관련 전문가들에 대해 이 조약을 교육시키고 있지 않다는 점도 지 적됐다.

어린이 권리이행 최대 장애는 정부의 무대책

위원회의 권고안은 당사국의 이행을 전제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정 부는 권고안이 나온 지 1년이 지난 지금 권고안 이행을 위한 어떤 조처도 취하지 않고 있다. 이행 계획은 고사하고 주무부처가 어디인지를 두고 논 란만 벌이고 있다. 외무부 인권사회과, 보건복지부 아동복지과, 법무부 인권과는 각각 상대 부서를 주무부서로 지목했다. 외무부에서는 다음 보 고서 제출시기에 대해서도 헷갈리고 있었다. 5년마다 보고서를 제출해야 한다는 조약의 내용도 모르고 있었다는 얘기다. 99년 2차 보고서 제출은 이제 불과 2년 앞으로 다가왔는데 권고안을 이행한다든지, 조약의 내용을 법제화한다든지 하는 계획은 전혀 없었다. 보건복지부에서는 법무부의 결 정이 있어야 이행을 할 수 있다며 책임을 미뤘고, 법무부는 보건복지부가 주무부처라고 말했다. 조약 체결 당시 유보했던 3개조항(부모에 대한 어 린이의 면접교섭권, 입양제도, 상소권)을 철회할 계획도 세워져 있지 않 다.

조약의 이행과 홍보를 위해 활동하는 어린이·청소년의 권리 연대회의(실 무대표 이기범 교수, 02-741-5363) 등 국내 아동 관련 민간단체들은 정부 가 유엔 아동권리위원회에 거짓보고를 한 것도 있다고 지적한다. 정부는 위원회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한국의 어린이 권리 국가위원회’(Nation al Committee on the Rights of the Child)는 95년 8월에 설립됐고, 위원 회의 구성원은 한국적십자, 유니세프, 연구기관, 대학, 신문사, 아동보호 기관 등과 같은 민간단체와 외무부, 보건복지부, 교육부, 법무부와 같은 정부부처로 되어 있다고 명시했다. 그러나 국가위원회는 결성된 적이 없 는 것으로 밝혀졌다. 정부는, 유엔 어린이 인권위원회가 민간단체와의 협 조를 강조하는 것과는 달리 20여개 민간단체가 모인 연대회의와의 협조요 청에도 응하지 않고 있다.

정부의 무대책과 무계획은 어린이·청소년 권리의 이행을 결정적으로 가 로막고 있다. 이와 함께 우리 사회의 잘못된 아동관에도 문제가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연대회의 간사 류은숙 인권운동사랑방 인권교육실장은 “조약을 근거로 국내법률을 정비하는 작업과 함께 어른 을 무조건 앞세우는 장유유서(長幼有序)나, 아이를 부모의 소유물로 생각 하는 잘못된 이데올로기가 바뀌어야 한다”고 말한다.

아동권리가 온존한 사회가 진보적인 사회

국내에는 정부의 움직임과 관계없이 조약에 대한 관심이 높아가고 있는 실정이다. 조약과 관련한 본격적인 연구를 목적으로 하는 아동권리학회( 회장 이재연 교수·숙명여대)도 창립될 예정이다. 여기에는 교육학과, 아 동학과, 아동복지학과 등 관련 학과의 교수들이 참여한다. 이들은 오는 5 월2일 창립 기념 학술대회를 열 예정이다.

인권운동가 서준식씨는 “사람들은 흔히 여성이 마지막 해방 대상이라고 말한다. 곧 아동이 그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아동의 권리가 온존하게 실 현되는 사회가 진정한 진보사회로 평가받는 날이 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