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적	1997년05월10일 제 156호

뜨거운 여름이 온다

(사진/노동법이 개정되고 처음 임단투를 맞는 노동계는 투쟁의 열기를 돋우고 있지만 경영진의 경제 위기 공세로 분위기가 위축되고 있다.)

“위기를 기회로 바꾼다.”

올해 임단투(임금 및 단체협약 개선투쟁) 전선에 끼어 있는 짙은 먹구름 을 걷어내고 어떻게든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보려는 노동계의 몸부림이 어 느 때보다도 뜨겁다.

“총파업 투쟁 결과가 고작 이거냐”

날치기 노동법에 맞서 총파업을 벌일 때만 하더라도 노동계는 올해 획기 적인 도약의 전기를 마련할 수 있을 것처럼 들떠 있었다. 그러나 노동법 재개정을 일궈낸 승리감을 맛보기도 전에 개정노동법의 독소조항이 곳곳 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다. 이에 따라 “도대체 총파업으로 얻은 게 고작 이것이냐”는 불만의 목소리도 여기저기서 터져나온다.

경제위기를 설파하는 경영계와 정부의 공세 또한 거세다. 민주노총 사무 실에서 만난 한 노동자는 “경제는 정부가 망치고, 걱정은 노동자가 하고 , 정부와 기업은 걱정하는 노동자들을 이용하려고만 한다”고 불만을 터 뜨렸다. 하지만 그들? 고용이 불안하다 보니 고용안정과 임단투를 맞바꾸 려는 분위기가 곳곳에서 눈에 띈다.

그런 와중에 경총이 최근 내놓은 단협지침은 노동계의 속을 더 태우고 있 다. 핵심 사안은 역시 노조전임자 문제와 정리해고다.

경총은 올 단협에서 전임자 급여를 해마다 20%씩 줄이도록 하는 내용을 뼈대로 한 단협지침을 최근 회원사에 일제히 내려보냈다. 개정노동법의 무력화를 선언한 노동계에 대한 맞불이다.

개정노동법은 노조전임자의 임금과 관련해 “2002년부터는 노조전임자에 게 임금을 지급해서는 안 되고, 지급하는 사용자는 부당노동행위로 처벌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경총은 여기에 한술 더 떠서 “전임자 급여와 전임자수를 매년 20%씩 감축하도록 협약에 명시”하라고 지침을 내렸다. 또 전임자 급여 축소를 보전하기 위해 노조가 복지매장이나 자판기의 운 영권 등을 요구하더라도 이를 절대 수용하지 말 것도 함께 지시했다. 노 조 사무실 운영비와 집기, 차량지원 출장비 등 노조에 대한 우대조치도 줄여 나가고, 노조 사무직원 급여는 반드시 노조가 지급할 것 등의 내용 도 포함됐다. 돈줄을 막아 노조를 무력화하라는 것이다.

이미 조폐공사가 지금까지 20명이던 노조전임자를 3명으로 줄이겠다고 일 방통보함에 따라 노사간 갈등이 첨예화되는 등 전임자 문제는 이번 임단 투의 핵심사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그러나 노동계는 “노조의 조직체계가 기업별로 돼있는 우리나라 현실에서 노조전임자의 급격한 축소는 노조활 동의 무력화를 뜻한다”며 호락호락 양보하지 않겠다는 각오다.

전임자 임금, 정리해고 등 누적과제 첩첩

한국노총은 특히 최근 노동부가 신규노조에 대해 전임자 임금을 지급할 수 없다고 해석한 부분에 대해 강력히 문제를 제기하면서 ‘노조전임자에 관한 특별법’을 지난 4월25일 국회에 입법청원했다. 한국노총은 또 소속 노조에 내려보낸 모범단체협약안에서 “전임자에게 지급하는 평균임금의 10배에 해당하는 금액을 회사가 출연해 노조 재정자립기금으로 적립하도 록 하라”고 시달했다. 민주노총도 “전임자 임금지급 금지는 입법 자체 가 아예 잘못됐고, 노동부의 법해석도 상식에 어긋난다”고 강력히 반발 하고 있다.

정리해고 문제와 관련해서도 경총은 “그 이유를 포괄적으로 열거하도록 하며 노동계쪽이 ‘합의’를 전제로 정리해고 할 수 있도록 요구해 올 경 우 ‘노조와의 성실한 협의’에 의해 가능하도록 규정하라”는 지침을 내 렸다. 개정노동법은 99년 3월부터 ‘긴박한 경영상의 이유’에 한정해 정 리해고를 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노동계는 “정리해고는 벌써 시작됐다”고 말한다. 삼미특수강이 포철에 인수되면서 고용승계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것이 대표적인 예다 . 노동계는 이에 따라 정리해고의 사유를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정리해고 시에는 노조와 반드시 협의하도록 단협에 명시한다는 방침이다.

이 밖에 노동자들의 임금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줄 변형근로시간, 단체협 약의 유효기간 2년강제, 퇴직금 중간정산제 등도 이번 임단투에서 노사간 에 첨예하게 맞설 사안들이다.

그러나 문제는 경제위기, 기업도산 위험 등을 앞세워 위협하는 경영진의 공세 속에서 노동계의 분위기가 크게 위축되고 있다는 점이다. 민주노총 의 한 관계자는 “경제위기에 대한 인식이 알게 모르게 작용해 임금인상 요구율이 대부분 한자리수로 낮다. 경영쪽도 개정노동법을 빌미로 예전보 다 훨씬 후퇴한 단협안을 내놓고 있다”고 말했다.

박석운 노동정책연구소장은 “우리 경제의 팽창속도가 현저하게 떨어지면 서 고용불안이 대두하는 것은 필연적”이라며 “이제 전통적인 투쟁방법 으로는 밀릴 수밖에 없다”고 진단했다. 현재의 어려움을 산별체제로 전 환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주문이다.

민주노총은 일단 교섭권을 상급단체에 위임해 공동교섭을 벌이는 방식으 로 돌파한다는 전략이다. 중심노조의 선도적 투쟁에 기대는 방식에서 벗 어나 처음부터 중앙의 장악력을 높이는 전국적인 대응전선을 형성하는 전 략이다. 특히 공동교섭은 단위노조를 넘어 노동자들 사이에 서로 신뢰를 구축해 산별체제로 건너가는 징검다리가 된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실험이 다.

민주노총은 이를 위해 임단투에 앞서 재벌개혁·경제개혁 싸움에 먼저 나 섰다. 경제위기를 노동자의 책임으로 전가시키는 이데올로기에 맞서는 한 편, 앞으로 민주노총이 추구해나갈 사회개혁운동의 서막을 연 것이다. 민 주노총은 6월 초순에 쟁의조정신청을 집중시키고 6월 하순 총파업으로 배 수진을 칠 계획이다.

현재까지 자동차연맹의 완성차 4사 노조와 몇몇 지역지부, 전문노련의 과 기노조가 공동교섭을 추진중이고, 금속 등 다른 연맹에서도 다양한 형태 의 공동교섭을 추진할 예정이다. 현총련과 대노협은 그룹 차원에서 공동 교섭을 강력히 요구하기로 했다.

한국노총쪽 사정은 더 열악해 보인다. 한국노총 관계자들은 “현장의 분 위기가 파업은 엄두도 내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털어놓는다. 물론 한국 노총도 공동교섭을 추진한다. 그러나 상급단체에 대한 불신의 골이 깊어 교섭위임이 폭넓게 이뤄지기는 여의치 않을 전망이다.

선거국면에 노동법 재개정에 총력 모을 것

최대열 홍보국장은 “노동법 재개정이 미흡할 경우 엄청난 총파업으로 이 어질 것이라는 전망은 크게 잘못됐었다”며 “상반기에는 사실상 뚜렷한 돌파구가 없다”고 말했다. 한국노총은 임단투를 거친 뒤 대통령선거 국 면에서 노동법 재개정 싸움에 초점을 맞춘다는 방침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숨고르기가 지나가야 물줄기가 트일 것 아니냐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노총도 임단투시기는 5월 말께로 최대한 집중시켜 힘을 모을 방침이 다.

노동계에 불리하게 개정된 노동법이 적용되자마자 곧바로 밀려온 경기침 체의 짙은 먹구름이 자칫 노동자들의 사회적 지위를 급격히 떨어뜨릴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는 가운데 임단투의 본격적인 막이 서서히 오 르고 있다.

정남구 기자 한겨레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