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적	1997년05월10일 제 156호

노동계 깃발이 바뀐다

(사진/지난 1월26일 최초로 열린 한국노총.민주노총의 연합집회. 복수노조가 허용되면서 노동계에는 세력재편의 바람이 거세다.)

“한국노총이 아직도 ‘어용’이란 말이냐?”

얼마 전 서울 여의도 노총회관에는 작은 소동이 벌어졌다. 삼성그룹의 한 관계자가 “민주노총의 노조 결성이 가시화될 경우 노동자협의회를 노조 로 탈바꿈해 ‘한국노총’에 가입시키는 방안을 마련중”이라고 말했다는 `한겨레' 보도에 대해 한국노총 간부들이 일제히 “말도 안 되는 소리” 라며 삼성쪽에 발끈하고 나선 것이다.

한국노총 총파업 이후 급속한 변화

한국노총 조영길 조직사업국장은 “삼성노조 건설은 한국노총도 이미 비 밀리에 추진해오고 있었다”고 말했다. 이종복 사무차장은 “민주노총에 비하면 미약했지만 지난 1월 한국노총 50년 역사에서 처음으로 총파업을 벌였던 의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달라”고 덧붙였다. 한마디로 “아직 도 어용의 탈을 덧씌우지 말아달라”는 항변이다.

한국노총은 최근 노총 내부조직 개편문제 등을 다룰 ‘중장기 노동운동 발전전략 기획팀’을 구성했다. 사무실 자리 배치도 탁 트인 형태로 바꾸 고, 조직국의 전화번호 끝자리를 모두 ‘119’로 바꿔 사업도 현장 중심 으로 펼쳐나가겠다고 말한다. 모든 사업방침 결정도 공개적이고 민주적으 로 하겠다고 강조한다. 물론 여기에는 기존의 사업행태에 대한 반성적인 고백을 바탕에 깔고 있다.

변화의 움직임이 한국노총 안에서도 일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런 변화가 어디까지 이어질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그러나 한 가지 한국노총이 이런 변화를 시도하는 뒤켠에서 노동계의 급격한 세력재편의 바람이 한바탕 불 고 있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지난 3월의 노동법 개정으로 복수노조의 길이 열리면서 노동계에 조직재 편의 회오리가 거세게 일고 있다. 그동안 유일한 합법 상급단체의 지위를 누려온 한국노총을 탈퇴하고 민주노총으로 옮겨가는 노조들이 속속 등장 하는가 하면, 한국노총을 탈퇴해 제3의 길을 걷는 연맹도 생겨나고 있다. 한국노총의 거듭나기를 강제하고 있는 셈이다.

이미 윤곽이 드러난 변화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역시 한국노총에서 민주노총으로의 ‘보따리싸기’다. 그동안 한국노총의 지도노선에 불만을 품어오면서도 한국노총 소속으로 남아 있던 금융·택시·버스노조 일부는 조만간 연맹을 새로 결성해 민주노총으로 상급단체를 바꿀 계획이다.

금융, 버스 등 한국노총 이탈 잇달아

첫 깃발을 들어올린 것은 금융계노조다. 한국은행 신한은행 등 금융계 13 개 노조는 총파업이 한창이던 지난 1월 말, 한국노총의 미온적인 파업방 침에 반발하며 전국민주금융노련준비위원회(위원장심일선 한국은행노조 위원장)를 결성했다.

금융노련은 지난 4월29일 발기인대회를 열고 공식 출범했다. 이로써 한국 은행을 비롯해 신한·한미·수출입은행과 외국계 은행 및 상호신용금고 등 1·2금융권의 73개 노조(조합원 2만5천여명)가 금융계노조로서는 처음 으로 민주노총에 합류했다.

한국노총을 탈퇴한 전국 3백여개 택시노조(조합원 3만여명)는 5·18광주 민주화운동 당시 택시운전사들이 앞장서서 진압군을 물리친 이른바 ‘민 주기사의 날’인 5월20일 광주에서 전국민주택시노련(준비위원장·구수영 인천지역택시노조 위원장) 창립대회를 열기로 했다.

또 ‘전국민주버스노동조합’ 준비위원회도 노동절인 5월1일 노조결성식 을 갖고 민주노총 대열에 합류한다. 추진본부는 “현재 노조 건설에 참여 하고 있는 노동자는 6개 지역 1천여명에 불과하지만 노조가 합법화될 경 우 참가자가 크게 늘 것”이라고 내다봤다.

민주노총 소속으로 지난 4월4일 가장 먼저 신고필증을 교부받은 민주화학 연맹(위원장 오길성)에는 설립신고를 전후해 LG화학노조 등 10개 노조가 한국노총에서 옮겨왔다.

이들 연맹들이 설립절차를 모두 마치면 민주노총 조합원수는 조만간 60만 명을 돌파할 전망이다. 총파업 이전 48만여명에서 몇달 사이에 괄목할 만 한 조직확장이다. 민주노총은 “전국단일노조 결성에 나선 농협노조(조합 원 3만여명)까지 가세하면 맹비를 내는 실질조합원수에서는 한국노총에 결코 뒤지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잇따른 조직이탈에도 한국노총의 반응은 의외로 차분하다. “어차피 옮겨갈 노조들 아니었느냐, 생각했던 것보다는 선방했다”는 것 이다.

한국노총 최대열 홍보국장은 “그래도 한국노총을 택하는 노조가 여전히 많은 것은 한국노총 나름의 강점이 있기 때문 아니겠느냐”며 “하반기 들어서면 분위기가 역전될 수도 있다”고 조심스레 전망한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노총을 탈퇴해 독립적인 연맹을 결성한 채 최상급단체 에는 가입하지 않은 제3세력의 행보가 노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금강개발노조 등 백화점·슈퍼체인·할인점·외식산업 부문의 15개 노조 는 지난 4월12일 상업연맹(위원장 김형근 금강개발노조위원장)을 결성했 다. 조합원수 7천7백여명으로 출발한 상업연맹에는 친민주노총계와 친한 국노총계가 엇비슷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상업연맹은 두 노총 어디 에도 소속되지 않은 채 독립된 연맹으로 활동하겠다고 밝혔다.

화학연맹(한국노총) 소속 대림산업, 대한유화 등이 포함돼 있는 전국석유 화학노조연합도 4월22일 단위노조 대표자회의를 열고 독자적인 연맹건설 준비위원회를 구성했다. 6개 노조 4천5백여명의 조합원을 가진 석유노련 은 한국노총을 탈퇴하긴 했지만 민주노총에 거부감을 가진 조합원도 상당 수 포함돼 있어 총연합단체에는 당분간 가입하지 않을 방침인 것으로 전 해지고 있다.

이들 연맹이 향후 독자적인 최상급단체를 결성하거나, 어느 한쪽을 선택 할 경우 노동계는 그야말로 거대한 지각변동을 다시 한번 겪게 된다. 그 런 만큼 앞으로 이 두 연맹을 놓고 두 노총 사이에 벌어질 물밑 줄다리기 도 큰 관심사다.

전임자 임금 규정 조직률 높이기 큰 벽

신규노조도 관심거리다. 노동법 개정으로 노조전임자 임금 규정이 바뀌면 서 “신규노조에 대한 전임자 임금지금은 불법”이라는 노동부의 유권해 석은 신규노조가 넘어야 할 큰 벽이다.

그럼에도 한국노총 은 “노동조합의 조직률이 13%대에 불과한 상황인 만 큼 앞으로는 신규노조 건설에 총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라고 강조한다. 여기에는 신규노조 건설에 어느 정도 자신이 있다는 뜻도 포함돼 있다. 한국노총은 “실제로 지난해 말부터 최근까지 2만여명의 조합원이 한국노 총에 가입했다”고 밝혔다.

민주노총은 전교조의 합법화에 주력하면서 일부에서 일고 있는 공무원노 조 건설 움직임에도 불을 지피고 있다. 합법화가 이뤄질 경우 엄청난 조 직력과 파괴력을 발휘할 수 있는 부문이기 때문이다. 국제노동조직의 압 력에 밀려 정부의 노사관계개혁위원회가 공무원 교원 단결권 문제를 2차 개혁과제로 재검토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것도 민주노총으로서는 희망 적이다.

그러나 양대노총으로서는 당장 눈앞에 닥친 올해 임단투가 발등의 불이다 . 주변 여건이 총파업 직후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열악하기 때문이다. 민주노총의 김태현 기획국장은 “지난 1월의 총파업 이후 아직까지 단위 노조들이 조직력 약화 등 상당한 후유증을 앓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노 총 소속 단위노조의 한 간부도 “극심한 경기침체에다 고용불안까지 겹쳐 개정노동법에 대한 불만이 상급단체로 향하고 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결국 이번 임단투의 성패가 두 노총의 세력관계를 다시 한번 흔들어 놓을 가능성도 커 보인다.

세력재편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그럼에도 두 노총은 한결같이 “연대”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총파업기간 중 양대노총 위원장 이 명동성당 농성장에서 손을 맞잡은 순간을 기억하는 노동자들은 두 노 총이 조직재편의 와중에서 어떻게 연대의 새틀을 마련해 갈지 관심을 집 중하고 있다.

정남구 기자 한겨레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