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커스	1997년05월10일 제 156호

대쪽! 원칙대로 붙자

(사진/당직자회의를 주재하는 이회창 대표. 공정한 경선을 위해 경선 전 대표를 사임하라는 압력을 받고 있다.)

여권이 전당대회 시기와 이 대표의 경선 전 대표직 사퇴 여부를 놓고 시 끄럽다. 각 주자 진영이 경기 시작에 앞서 한편으로 공정한 게임을 위해 다른 한편으론 주도권 확보를 위한 샅바싸움에 신경을 온통 쏟고 있는 것 이다.

전당대회 시기에 대한 논란은 박관용 사무총장이 후보 선출을 위한 전당 대회를 7월 초순쯤 개최하겠다는 의사를 지난주 초 슬쩍 밝히면서 불거졌 다. 당시 청와대의 정무수석실에서도 7월 초순 정도라면 적당하지 않겠느 냐는 견해가 조심스럽게 제기됐다. 지난 92년에는 5월 중순에 후보 선출 이 이뤄졌다는 점도 언급됐다. 박 총장과 강인섭 청와대 정무수석간에 시 기에 대한 사전조율이 있었음이 확인됐다.

이 대표 대세론 불부터 끄고 보자

그러나 박찬종 이한동 고문 등 다른 주자 진영에서는 즉각 `‘너무 빠르 다’며 반발하고 나섰다. 이들은 “한보 정국 등으로 인해 제대로 경선 준비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7월 초순에 전당대회를 개최한다는 것은 불 공정의 우려가 크다”고 주장했다.

김덕룡 서석재 김정수 김운환 의원 등 집권 민주계 중진들도 지난 4월23 일 회동을 갖고 `전당대회를 급하게 서두를 것 없다며 7월 초 개최에 반 대입장을 분명히했다. 명분은 당내 대선주자 가운데 상당수가 반대하는 상황에서 당 지도부가 7월 10일 개최를 고집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다.

민주계나 박찬종 이한동 고문 등은 일단 겉으로는 점잖게 반대하지만 실 제로는 `7월 초 전당대회가 ‘이회창 대세 굳히기’로 가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 속에 이를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는 절박한 심정이다. 민주계의 한 소장의원은 “7월 초는 앞으로 두달 정도밖에 남지 않았는데 그동안 특별 한 일이 별로 있을 것 같지도 않은 상태에서 이대로 가면 이 대표가 유리 한 것은 명약관화한 것이 아니냐”며 “민주계로서는 일단 이 대표 대세 론을 차단하고 시간을 벌어보자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대표쪽이 조속 한 대회 개최를 희망하는 것은 이런 면에서 볼 때 지극히 당연하다.

전당대회 시기 문제보다 더 치열한 논란거리는 이 대표의 대표직 유지 여 부이다.

박찬종 이한동 이수성 고문과 김덕룡 의원 등 다른 예비주자 진영에서 일 제히 이 대표의 경선 전 사퇴를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이들은 “대표직 을 그대로 유지한 채 경선에 참가하는 것은 선수가 심판을 겸하는 것이나 다름없다”며 경선 전 대표직 사퇴를 요구했다. 박 고문은 “경선과정과 결과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당직자는 일정 기간 사퇴해야 한다”며 “경 선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당직자가 대표라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고문쪽도 “경선의 공정성을 내세워 이 고문 의 대표 기용에 반대했던 사람이 이 대표 아니냐”면서 “이 대표는 자신 의 말을 지켜야 할 것”이라고 꼬집었다.

이홍구 고문이나 김덕룡 의원 진영도 이 대표의 거취 부분에 대해서는 같 은 의견을 보이고 있다. 김 의원의 한 측근은 “공정한 경선을 위해 대표 직을 사퇴해야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 아니냐”며 “더 이상 언급 할 가치도 없다”고 말했다.

대표라는 자리는 엄청난 프리미엄

다른 주자들의 이런 요구는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이 대표가 대표직을 유지한채 경선에 나가는 것은 절반을 따고 들어가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 이다. 이에 따라 이들 비 이회창 대표 진영은 한때 조기 경선대회 반대, 대표직 사퇴 등을 촉구하기 위한 합동 참모회의도 계획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해 이 대표쪽은 “전당대회 시기도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논란 을 벌일 성질의 문제가 아니다”며 언급 자체를 회피하고 있지만 다른 진 영의 합동 공세에 곤혹스러워하고 있다. 물론 이 대표쪽의 속생각은 대표 직을 유지한 채 경선에 나간다는 것이다.

이 대표는 4월26일 “경선 전 대표직 사퇴 문제는 생각해 보지도 않았고 결정한 바도 없다”면서 “대표직 임면은 총재인 대통령의 고유권한인 만 큼 그 뜻에 따르겠다”고 밝혔다. 이 대표의 한 측근은 그러나 “김 대통 령도 92년 민자당 전당대회 때 당 대표직을 유지하면서 후보에 나섰지 않 았느냐”고 반문하면서 “경선관리기구 구성 등에 이 대표가 전혀 간여하 지 않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이 대표쪽은 특히 다른 주자 들의 요구에 의해 대표직을 내놓을 경우 엄청난 세 위축을 가져올 수 있 다는 판단 아래 대표직을 고수한다는 내부 방침을 세운 것으로 알려졌다.

대표직 고수 여부는 단순히 전당대회의 공정성 문제에만 관계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상 이회창 대세론을 굳히느냐 마느냐 하는 핵심적인 문제와 직결돼 있다고 볼 수 있다. 각 주자 진영이 사생결단의 태도를 보이는 이 유가 여기에 있다.

그만큼 이 문제는 조만간 가닥이 잡히기는커녕 막판까지 논란이 계속될 가능성이 크다. 어느 한쪽이 양보할 가능성이 별로 없는데다가 중재자가 되어야할 청와대의 입장도 명확하지 않다.

김 대통령은 현재 `난국 극복을 위한 대표 중심의 단합을 강조하고 있을 뿐 후보 문제와 관련해서는 아직 중립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중립적 이다 못해 오히려 모든 것을 방치하는 듯한 모습이다.

여권의 한 핵심관계자는 “이제는 김 대통령의 직계인 민주계조차 내 갈 길을 가겠다는 것 아니냐”며 “청와대의 권위나 힘이 현실적으로 완전히 빠진 상태”라고 말했다. 김 대통령은 현재 어떻게 손을 써볼 수 없는 처 지에 놓였다는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는 분쟁을 해결할 수도 없으며, 섣 불리 중재자 역을 자임할 경우 일은 성사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상처만 입 을 것이라는 판단이 뒤따른다.

정국 수습되면 김 대통령 나설 것

그러나 반론도 만만치 않다. 현재는 김현철씨 문제 등으로 인해 김 대통 령이 다른 것에 신경을 쓸 여지가 없지만, 한보 정국에서 벗어나게 되면 적극적으로 개입할 것이라는 분석이다. 퇴임하기 직전까지는 물리적인 힘 을 갖고 있는 자리가 대통령이며, 특히 김 대통령의 성격상 자신의 후계 문제를 수수방관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판단인 것이다.

서울출신의 4선 의원은 “전당대회 시기와 이 대표의 거취 문제에 대해 김 대통령이 어떠한 입장을 취하느냐 하는 것은 앞으로 김 대통령의 후계 구상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바로미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종철 기자 한겨레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