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커스	1997년05월10일 제 156호

한국유통시장 조종 울리나

“요즘 할인점업계는 전쟁터를 방불케한다. 한달이면 전국적으로 서너개 의 대형 할인점이 우후죽순처럼 들어서고 있다.”

한 할인점업체 관계자의 말이다. 가히 할인점의 전성시대라 할 만하다. 지난해말 현재 국내 할인점수는 48개(17개 업체)로 시장규모만 1조2천억 원에 이른다. 올해는 점포수가 1백개에 육박하고 시장규모도 지난해의 2. 5배인 3조원으로 늘어날 전망이다. 2000년에는 할인점이 2백개를 넘어 10 조원 규모의 시장을 이룰 것으로 업계는 보고 있다. 전체 소매시장(96년 96조5천억원)에서 차지하는 매출비중도 2000년에는 올해의 3%선에서 7.9% 로 크게 높아질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식품전문, 재고전문 등 형태도 다양

할인점 형태도 갈수록 다양해지고 있다. 식품류를 제외한 일반 상품을 싸 게 파는 디스카운트스토아, 식품류까지 취급하는 슈퍼센터와 하이퍼마켓, 회원제 창고형매장부터 스포츠, 완구용품 등 한정된 품목만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카테고리킬러, 철이 지난 재고상품을 파격적으로 깎아 파는 아 웃렛에 이르기까지 어지러울 정도다.

할인점에 가장 적극적인 업체는 신세계(E마트·프라이스클럽), 뉴코아(킴 스클럽·뉴마트) 등 기존 유명 백화점들이다. 백화점의 매출증가율이 크 게 둔화되면서 할인점을 불황탈출의 비상구로 삼고 있다. 4월29일 E마트 남원점을 오픈한 신세계는 2002년까지 할인점을 현재의 9개에서 50개로 늘릴 계획이다. 지난 4월25일 분당점(올 들어 네번째)을 오픈한 뉴코아도 2000년까지 킴스클럽을 16개에서 50개 정도로 늘릴 예정이다. 동아마트( 동아건설), 엘지 슈퍼마트(엘지), 나산클레프(나산), L마트(롯데), 메가 메트(농심가), 해태슈퍼마트(해태) 등이 이들 뒤를 맹렬히 뒤쫓고 있다. 삼성, 대우, 현대, 한화, 제일제당 등 대기업들도 이미 할인점 시장 진출 준비를 끝냈거나 기회만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삼성은 삼성홈플러스를 2 005년까지 30개, 현대는 H마트와 H클럽을 2001년까지 5개씩 오픈할 계획 으로 알려져 있다.

지난해에는 까르푸, 마크로 등 외국계 할인점이 상륙했다. 이들은 뛰어난 매장관리 기법, 풍부한 자금력 등으로 무장해 있어 국내 할인점업체들에 게는 공포의 대상이다. 그러나 지난해부터 막이 오른 유통시장 완전개방 시대에서 외국업체와의 경쟁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100% 프랑스 자본 인 까르푸는 일산, 부천 중동, 대전 둔산에 3개 점포를 열였다. 2000년까 지는 매장수를 30개까지 늘릴 작정이다. 국내업체와 합작한 네덜란드계의 마크로는 지난해 1월과 12월 인천점과 일산점을 오픈했다. 올해는 용인시 구성면에 남부점을 7월에, 대전점을 9월에 열 계획이다. 부산점과 대구점 을 내년 하반기 오픈을 위해 한창 준비중이다. 2000년까지는 점포가 10개 까지 늘어난다.

매출 1천억달러 월마트도 한국진출 채비

국내시장을 노리는 외국 유통업체들은 이들만이 아니다. 지난해 매출이 1 천억달러로 미국 기업랭킹 4위에 올라 있는 월마트의 상륙은 시간문제로 여겨지고 있다. 신세계 유통산업연구소의 김동환 박사는 “월마트는 미국 시장이 포화상태에 도달한 뒤 1차로 남미, 캐나다 지역에 진출한 데 이어 아시아 지역을 다음 타깃으로 삼고 있다”고 말한다. 월마트는 지난해 중 국 심천지역에 두개의 매장을 열었다. 월마트는 장차 중국에만 1천개 정 도의 매장을 열 계획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 유통시장의 경쟁심화로 월마 트의 진출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도 있지만 다음 목표는 한국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일본의 생활용품전문점인 도큐핸드즈, 미국 의 완구전문점인 토이져러스, 프랑스의 하이퍼마켓인 프로모데스 등도 이 르면 올해, 늦어도 내년까지는 진출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할인점이 인기를 얻고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가격이 싸다는 점 때문이다. 백화점이나 재래점포에 비해 최소 10~20%는 싸다는 것이 할인점업계의 분 석이다. 물건을 하나 사더라도 싼 것을 찾는 합리적 구매행태가 정착되고 있어 소비자의 호응도가 높을 수밖에 없다. 가격경쟁력은 불경기에는 더 욱 위력을 발휘한다. 다양하고 풍부한 상품, 깨끗한 매장, 편리한 주차여 건 등도 빼놓을 수 없는 요소다. 맞벌이 가정의 증가와 자동차 보급 확대 로 주말 쇼핑이 보편화되고 있는 세태에서 할인점은 안성맞춤이다.

현재 점포수면에서는 국내업체들이 압도적이다. 그러나 실속은 외국업체 들이 챙기고 있다는 지적이 많다. 할인점 경쟁이 가장 치열한 곳은 새 도 시인 일산지역. 94년 9월 E마트가 첫발을 내디딘 데 이어 지난해에는 킴 스클럽과 까르푸, 엘지마트, 마크로가 들어왔고 올 들어서는 킴스클럽(화 정점)이 가세했다. 인구 30만명의 도시에 6개의 대형 할인점이 밀집해 있 는 것이다. 내년이면 이 지역의 할인점과 백화점수가 15개 정도로 늘어나 게 된다. 선발업체인 E마트는 96년 4월 킴스클럽이 문을 열면서 약간 영 향을 받기는 했지만 하루 평균 매출액이 지난해까지는 3억5천만원에 달했 다. 그러나 지난해 말 까르푸와 마크로가 잇따라 가세하면서 요즘 들어서 는 3억원을 채우기도 어려운 형편이다. 후발인 킴스클럽의 사정도 마찬가 지이다. “초기에 2억원선에 이르던 하루 매출이 1억~1억5천만원선으로 떨어졌다. 최근 들어 매출확대를 위해 할인행사를 자주 열면서 2억원선 가깝게 회복됐지만 그만큼 채산성은 나빠졌다.” 킴스클럽 관계자의 설명 이다. 까르푸는 문을 연 지 반년 밖에 안 됐는데도 하루에 3억5천만원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마크로는 점포위치가 외진 곳에 있는 약점을 안고 있지만 하루 매출이 1억5천만~2억원에 달한다. “얼마 전까지는 주로 E마 트를 이용하면서 킴스클럽과 엘지마트를 가끔씩 찾았다. 그러나 최근 들 어서는 E마트와 까르푸를 반반씩 이용한다. 까르푸는 규모가 커 물건이 다양한데다 상품진열이 장보기에 편하게 돼있다. 주변에서는 마크로를 찾 는 사람이 부쩍 늘고 있다. 가격이 다른 곳보다 싸다는 평이다.” 일산시 일산2동 중산마을에 사는 이미원(37)씨의 지적은 이 지역 할인점간의 최 근 전황(戰況)을 잘 보여준다.

적응기 끝나면 시장 내줘야 할 판

외국계 할인점들이 국내업체들에 비해 가격경쟁력이 높은 이유에 대해 업 계에서는 금리문제를 꼽는다. E마트 관계자의 말을 들어보자. “보통 한 개 할인점을 낼 때 2백억~3백억원의 자금이 들어간다. 우리 은행금리는 1 2~13% 수준이다. 외국업체들은 본국 자본을 그대로 들여온다. 통상 연간 금리가 5~6% 이하인 저리자금이다.”

그나마 지금은 외국업체들이 한국시장에 적응이 덜 돼 우리 업체들이 반 사이익을 누리고 있다. “외국업체들의 약점을 굳이 꼽자면 상품구성에서 소비자들의 취향을 잘 못 맞추는 점과 생(生)식품을 중심으로 상품구매 노하우가 국내업체에 뒤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보면 이런 약 점들은 곧 사라지게 된다. 널찍한 점포와 주차공간, 뛰어난 매장관리 능 력 등을 감안하면 국내업체들의 생존은 갈수록 어려워질 것이다.” 김동 환 박사(신세계 유통산업연구소)는 2~3년 안에 국내 할인점 업체들의 위 기가 가시화될 가능성이 높다고 진단한다. 한국마크로(주)의 김광서 이사 도 비슷한 생각이다. “마크로가 창고형 할인매장을 연 지는 30년이 됐지 만 원칙에 충실한 영업을 하고 있다. 주차공간도 최대 이용차량 대수를 기준으로 충분하게 확보한다. 그러나 국내업체들은 그렇지 않다. 매장 운 영면에서도 보이지 않는 노하우가 많다. 앞으로 2~3년 뒤에는 국내업체들 의 선점효과가 사라질 것이다.” 일부에서는 외국업체들의 공세에 맞서 살아 남을 국내업체들이 얼마 안될 것이라는 비관론까지 나오고 있다. 유 통업계의 판도가 할인점으로 급격히 옮겨가고 있는 점을 감안할 때 할인 점에서의 국내업체 퇴조는 곧 국내 유통시장의 안방이 외국업체들에 넘어 가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기존업체들의 점포늘리기 경쟁과 재벌그룹들의 신규진출 움직임도 할인점 의 과포화상태와 부실화를 부추길 위험성이 크다. 뛰어난 인적자원과 자 금력, 전국 곳곳에 퍼져 있는 보유 부동산 등으로 무장해 있는 재벌그룹 과 외국업체의 공세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업체는 다른 업체에 인수 당하거나 문을 닫을 수밖에 없다.

재래상가 보호대책 마련도 시급

할인점은 기존 재래상가에도 큰 타격을 안겨주고 있다. 슈퍼나 동네 구멍 가게 등 재래점포를 찾는 이용자들이 갈수록 줄고 있는 것이다. 전국 2천 7백개 슈퍼마켓을 회원사로 하고 있는 한국슈퍼마켓협동조합연합회가 최 근 벌인 설문조사 결과는 사태의 심각성을 잘 보여준다. 올 1/4분기 매출 과 이용고객수가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각각 20.4%와 17.6%씩 감소했 다. “경기침체로 인한 소비심리 위축도 문제지만 대형 할인점들이 수도 권에서 지방으로 급속히 확산되고 있어 슈퍼마켓 등 재래점포들은 절박한 상황을 맞고 있다. 지난해 5백억원의 유통시설대화자금이 배정됐지만 담 보 부족으로 한건도 대출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슈퍼마켓연합회의 문학 휘 관리실장은 정부차원의 대책마련이 시급하다고 호소한다. 외국 유통자 본과 국내 재벌그룹의 안팎 공세에 무장해제될 위기에 놓인 것이다.

곽정수 기자 한겨레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