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리뷰	1997년05월10일 제 156호

`경제적 공포'

(사진/소설가이며 문학비평가로 활동하는 비비안느 포레스테는 `경제적 공포'에서 인간을 공포와 절망에 빠뜨리는 `경제제일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비비안느 포레스테 지음·김주경 옮김, 동문선 펴냄

프랑스의 문학비평가 비비안느 포레스테의 에세이 <경제적 공포>(김주경 옮김, 동문선 펴냄)는 이른바 세계화 시대의 ‘경제제일주의’에 대한 신 랄한 비판서이다. 무엇보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대량 실업문제가 바로 자유시장경제의 필연적 산물임을 공격적으로 묘파하고 있다. 어떤 점에서 이 책은 경제에 관한 철학적, 문명사적 고찰이라고 할 수 있다.

경제학에 관해서는 거의 문외한이라고 밝힌 지은이의 이 에세이는 많은 경제학자와 기업가의 비판에도 프랑스 독자들로부터 뜨거운 관심을 불러 모았다. 지난해 10월 출간된 이래 프랑스 비소설분야 베스트셀러 1위 자 리를 27주 동안 고수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르몽드>가 ‘사회적 현 상’으로 평가할 정도로 <경제적 공포>가 폭발적 관심의 대상이 된 배경 에는 유럽사회 최대의 문제인 실업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올해도 독일과 프랑스 이탈리아 등 유럽 각국의 정부와 야당들은 점증하는 실업문제의 해결을 최대의 사회적 과제로 내세우고 있다. 연 10%선을 웃도는 실업률 은 지은이의 말대로 노동자·월급쟁이들에게는‘공포’의 대상일 것이다.

‘노동의 가치’에 속는 시장의 노예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지난해부터 불황과 함께 불어닥친 명예퇴직과 감원 바람이 실직에 대한 불안을 가중시켰다. ‘실업대란’이라는 표현이 나올 정도로 실업률이 증가하고 있다. 이는 단순히 일시적인 경기침체에 따른 것인가, 아니면 우리나라도 이제 대량 실업시대로 접어드는 구조적 징후일까.

포레스테는 선진 자본주의국가들에서 나타나는 실업은 단순히 산업구조 측면에서만 이해하기 어려운 원인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그는 실업의 숨 겨진 본질적인 원인을 ‘자본주의가 낳은 노동 소멸의 과정’에서 찾는다 .

<경제적 공포>는 그 어떤 통계수치나 경제학 이론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변화의 예감’을 대전제로 하고 있다. 그 ‘예감’은 바로 자유시장경 제의 발달, 기계화·자동화 등 첨단 전자문명의 발전을 통해 노동은 소멸 하고, 아주 소수의 지배층을 제외한 대부분의 인간들은 인류 역사상 처음 으로 “경제적으로 불필요한 존재”, 즉 잉여인간들이 되리라는 것이다.

지은이에 따르면 서구의 대량실업사태는 그런 문명사적 변화의 단초이다. 따라서 대량실업은 결코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발달의 필연적 결과이며, 미래의 절망적 질서”이다. 그러나 지은이가 보기에 이런 ‘미 래’보다 더 나쁜 것은 “자명한 예상에도 자본가와 정치가들은 이를 감 추기에 급급하다. 이들은 교묘한 통계의 조작으로 수많은 인간을 언제든 지 노동시장으로 내몰 수 있는 ‘구직 대기소’에 집결시켜 놓고 싶어한 다. 그러기 위해 이들은 노동의 가치를 선전하고, 고용의 재창출에 대한 환상을 지속적으로 유포하면서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면 누가 이 ‘비극’을 대가로 이익을 챙기는가. 두말할 나위없이 그 것은 자유시장경제체제의 보이지 않는 네트워크를 따라 ‘움직이는 힘’ 들, 즉 다국적 초국적 기업들이다. 그리고 그 ‘움직이는 힘’들에 충실 히 복종하는 소수의 국가적 국지적 기업들뿐이다. 이들에게 적당한 공포 의 유지야말로 이윤을 극대화하는 최적의 시장이다. 이곳에서 인간은 오 직 경제적 효용가치로 평가된다. 이곳에서 인간은 착취당할 기회조차 상 실한 ‘시장의 노예들’일 뿐이다.

지은이가 보기에 우리는 이런 “위대한 속임수의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자신도 그 속임수에서, 고용과 노동의 순환감옥에서 나오려는 노력을 제대로 하지 않는 데 있다.

“우리는 무엇 때문에 아무 보람도 없고 위험스럽기 짝이 없는, 그렇게도 많은 고통을 일으키는 노동의 시대에 집착하는가? 왜 노동의 부재, 노동 의 소멸을 부인하고, 이런 것들을 단순히 일시적인 현상으로 제시하면서 차라리 고통을 감수하는 쪽을 택하고 있는가?”

지은이는 공포 때문이라고 말한다. 자본가와 고용주들이, 그리고 정치가 들이 유포하는 은근한 위협과 환상의 그늘 속에 우리가 있기 때문이다. 아르티르 랭보의 시편 <일뤼미나시옹>에서 제목을 따온 <경제적 공포>는 실직 그 자체가 주는 두려움이며, 노동하지 않는 자의 슬픔- 무능력자이 거나 낙오자라는 따돌림이 주는 소외- 이며, 나를 제발 좀 부려먹어 달라 며 직장을 애걸해도 사실 일자리를 다시는 구하지 못할 것이라는 절망의 집합이다. 한마디로 인간으로서의 의미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이 다.

“인간을 이용하려는 불행보다 더 끔찍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이용 당할 기회마저 상실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수익성’을 올리는 데 이용할 만한 가치가 없는 자들의 삶도 과연 유용한 것이냐는 질문이 되풀 이 된다. 그런데 이 질문 또한 살아갈 ‘권리’를 갖기 위해서는 살아남 을 수 있는 ‘자격’이 필요한가, 라는 질문의 반향이다. 이 질문에서는 뭔가 두려움이 새어나온다. 걷잡을 수 없는 확산을 통해 정당화된 공포는 , 쓸모없는 잉여 존재라고 인정된 수많은 인간들을 보지 않으면 안 된다 는 데서 오는 공포”라고 지은이는 말하고 있다.

인간에 대한 예의만이 절망 이겨낸다

정말 이것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일까? 지은이는 반문한다. “공포의 본질 이 이러한데 왜 우리는 애써 모른 척하는가”, “공포와 절망에 대해 두 려움을 갖는 것이야말로 바로 공포와 절망에 공갈 협박의 길을 열어주는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왜 대항하려 하지 않는가?”

물론 이 책 역시 스스로가 던진 질문에 대해 어떤 구체적 대안을 말하지 는 못하고 있다. 다만 한가지, 지은이가 독자들에게 호소하는 것은 ‘인 간에 대한 예의’이다. 제 살길 바빠 남 돌볼 겨를 없는 사회야말로 착취 자가 원하는 사회이다. 그런 사회일수록 인간에 대한 존중심이 최대의 저 항이다. 그것만이 노동이 소멸한 뒤, 인간이 ‘기계만도 못한’ 쓸모없는 쓰레기로, ‘잉여존재’로 전락하는 것을 스스로 막는 길이라고 지은이는 호소하고 있다.

비비안느 포레스테는 소설가이자 에세이스트로 <르몽드>의 문학비평가로 도 활동하고 있다. 이 책은 프랑스에서만 25만부가 팔렸으며, 17개 국어 로 번역됐다.

이인우 기자 한겨레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