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	1997년05월10일 제 156호

러시아의 미아 ‘레닌’

(사진/옛 소련을 상징하는 역사가 송두리째 무너지고 있다. 최근 이전 논란에 휩싸인 레닌묘를 크렘린에서 바라본 전경.)

“총재를 보호하라!”

지난 4월22일 러시아 시내. 시내 행진을 벌이던 겐나디 주가노프 총재가 이끄는 러시아 공산당 일행은 갑자기 날아든 토마토 세례에 당황했다. 몇 몇 청년들이 약 2백명에 이르는 행진 대열에 토마토를 던지고 달아난 것 이다. 핵심당원들의 재빠른 경호로 주가노프가 토마토 세례를 피할 수 있 었다. 하지만 공산당은 이 일이 매우 상징적인 것이라고 판단했다. 왜냐 하면 이 행진은 최근 철거논란이 거센 레닌묘 참배 뒤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1백27번째 레닌 탄생일을 맞아 행해진 이날 레닌묘 참배에서 주가노프 총 재는 “레닌은 우리가 모두 존경하는 분이다. 그리고 레닌 묘소는 우리의 역사다. 우리의 역사를 이곳 붉은 광장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서는 안 된 다”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주가노프의 이런 강조는 오히려 올들어 거세 지고 있는 묘지 이전 목소리를 반증하는 듯했다.

의회서 영구보존 결의안 채택 실패

레닌묘 이전 논란은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이 지난 3월14일 언론사 간부들을 만난 자리에서 붉은 광장 끝에 위치한 레닌묘 폐쇄를 위한 여론 조성을 주문하면서 시작됐다. 이에 공산당 등 좌파는 “옐친 대통령이 ‘ 국부 레닌의 명예’를 훼손하려는 불손한 의도를 갖고 있다”고 규탄하며 의회 차원의 대책마련에 들어갔다. 공산당은 지난 3월21일 레닌묘를 영구 보존하자는 의제를 상정했으나 결의안 채택에 필요한 2백26표를 얻지 못 해 실패했다.

레닌묘 폐쇄 논쟁은 지난 91년 옛 소련 붕괴 뒤 지금까지 끊이지 않아왔 다. 이에 대해 옐친 진영은 레닌의 유해 보존은 독재자 스탈린의 정권장 악 의도에서 비롯된 만큼 이의 폐쇄나 이전이 필요하다는 태도를 취해왔 다. 옐친은 이미 지난 93년 10월 레닌묘의 권위를 상징하는 경비병들을 철수시킨 바 있다. 반면 공산당 등 좌파는 레닌묘가 수천만 인민들의 요 청에 의해 붉은 광장에 마련된 것이라며 옐친 진영의 폐쇄 논의를 정치적 음모라고 반박해왔다.

이렇게 소련 붕괴 뒤 간간이 제기되던 레닌묘 이전 폐쇄 논란이 올해 다 시 확산되는 데는 올해가 모스크바시 탄생 8백50돌이 되는 해라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옐친 진영은 따라서 8백50돌을 맞는 올해 ‘공산독재’의 잔재를 털어버리려는 것이다. 이런 움직임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가 바 로 교회의 복원이다. 올해는 특히 그동안 폐허가 됐거나 아예 허물어버렸 던 수많은 교회들이 잇따라 복원되고 있는 것이다.

지난 4월27일 첫 예배를 시작한 ‘예수재림 성당’의 복원은 그중에서도 대표적 사례라 할 수 있다. 원래 성당이 있던 자리는 스탈린이 소위 ‘스 탈린식 건물’의 여덟번째 건축을 명령한 곳이었다. 그러나 성당을 무너 뜨리고 토대를 위해 땅만 파놓은 상태에서 스탈린이 죽는 바람에 흐루시 초프의 명령에 의해 건축이 중단됐다. 이곳은 그동안 한겨울에도 노천에 서 수영을 할 수 있는 수영장으로 탈바꿈된 상태였다.

현재 소련 해체 뒤 ‘신앙을 되찾은’ 많은 러시아 사람들은 이 성당이 무너진 뒤 러시아가 끊임없는 나락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고 믿는다. 그 렇기 때문에 그들은 옛 러시아 영광의 부활은 바로 이 예수재림 성당의 복원으로부터 시작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사실 크렘린과 붉은 광장 주변만 하더라도 이미 옛 소련시절 허물어졌던 몇몇 건물들이 복원됐다. 카잔성당이 그렇고, 이베르 성모교회와 부활의 문이 그렇다. 레닌묘 이전 주장은 바로 이런 모스크바 새 단장 물결에서 힘을 얻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올해의 이전 논쟁은 결코 예전같지 않다는 데서 공산당쪽의 긴장 감은 높아진다. 논쟁이 예년과 구분되는 가장 큰 특징은 우파로부터 ‘구 체적인 대안’이 제시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제안은 크게 둘로 나뉜다.

우파, 독재의 잔재라며 이장비 마련 모금운동

첫번째 제안은 레닌묘를 페테르부르크(옛 소련시절 레닌그라드)의 볼코보 공동묘지에 이전하자는 것이다. 우파들은 이를 “레닌의 유언에 따른 것 ”이라고 밝히고 있다. 물론 ‘볼코보 공동묘지에 묻어달라’는 레닌의 유언은 가짜다. 이는 한 작가가 꾸며낸 것으로 밝혀졌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 레닌 미라를 붉은 광장에서 이장하자는 사람들에겐 관심 밖이다. 왜 냐하면 그들의 관심은 레닌묘를 붉은 광장에서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이 지 어디로 옮기냐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볼코보 공동묘지 이전안’ 은 ‘기독교 민주청년회’ 소속 젊은이들의 ‘레닌 이장비 조성 모금운동 ’으로 벌써 사람들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이들은 관 모양의 모금함을 만들어서 네프스키 거리의 카잔성穗 앞에서 지나가는 사람들로부터 성금 을 받고 있다.

두번째 제안은 레닌 기념관이 있으며 레닌 박물관이 들어서게 될 모스크 바 남부 고리키-레닌스키에로 레닌묘를 옮기자는 것이다. 몇몇 사회평론 가들은 이 제안이야말로 가장 합리적인 것이라고 논하고 있다. 이를 통해 새로운 관광단지를 건설할 수도 있고, 공산주의자들에게 일종의 보금자리 를 제공해서 어느 정도 그들을 무마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산당 등 러시아 좌파들은 자신의 열세에도 이에 강하게 반발해 왔다. 지난 4월1일 벌어진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동상 폭 파사건도 이런 ‘좌파의 노력’과 무관하지 않다. 모스크바주의 한 마을 에 서 있던 이 동상을 파괴했다고 자처한 이들은 한 공산당 간부에게 보 낸 서신을 통해 자신들을 ‘노동자-농민 붉은 군대’라고 불렀다. 이들은 이 폭파가 ‘전 민중의 신성한 기념관인 레닌 묘소’에 대한 경거망동을 경고하기 위해 ‘노동자와 농민의 고혈을 짜낸 인간’ 니콜라이 2세의 동 상을 폭파했다고 밝히고 있다. 이들이 주장하듯이 레닌묘는 단순한 묘소 가 아니라 옛 소련, 그리고 공산당 등 좌파의 정신적 지주인 것이다.

사실 레닌묘 이전계획은 옛 소련시절에도 존재했었다.하지만 취지는 현재 와는 정반대였다. 최근 밝혀진 자료에 의하면, 스탈린 통치시기인 1953년 옛 소련 중앙위원회와 국무회의에서는 모스크바 시내에 위인 묘지 건설계 획을 세웠다. 이 위인 묘지에는 붉은 광장에 안치되어 있는 레닌을 비롯 한 소비에트 위인들의 시신들이 옮겨질 예정이었다. 말하자면 스탈린은 좀더 확고한 ‘신앙’의 대상지를 만들 필요성을 느꼈던 것이다. 하지만 이 계획은 그뒤 정권을 잡게 된 프의 강력한 스탈린격하운동 등으로 사장 됐다. 이와 함께 이전 계획도 같이 사장되었다.

“신앙심으로 소련의 신화 무너뜨린다”

하지만 현재 러시아 우파의 이전계획은 이와는 1백80도 다른 것이다. 이 들은 ‘옛 러시아 회복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옛 소련시절 이데올 로기의 청산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현재 진행되는 교회 신축 등 건물 복 원만으로는 ‘러시아 회복운동’이 완성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때 레닌 묘 이전이 바로 이데올로기 청산의 상징물일 수 있는 것이다.

레닌묘 이전문제는 결국 ‘옛 러시아의 부활’과 ‘ 瀋瀋妻雲련의 유지’ 라는 러시아 양대 이데올로기 중 어떤 것이 대중의 지지를 얻는가에 따라 결정될 전망이다. 하지만 결론이 어떻게 나든 최근의 이전논쟁은 ‘죽은 레닌’이 아직도 현 러시아의 이데올로기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어서 주목된다.

모스크바=강완구 통신원 한겨레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