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야기	1997년05월10일 제 156호

인종화합에 이르는 ‘저녁만찬’

미국 샌프란시스코 오클랜드 패닐 자선선교회 강당. 날이 어둑해지자 꾀 죄죄한 모습을 한 흑인, 라틴계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들기 시작한다. 볶음밥 그릇 앞에 선 마이클 한(17·고2)의 손길도 바빠진다. 큰 그릇의 비닐랩을 벗기자 모락모락 김이 올라온다. 마이클 옆으로도 10여명의 한 인교회 봉사자들이 자신이 맡은 음식그릇 앞에서 손님을 기다린다.

매주 목요일마다 ‘집없는 사람들’(Homeless)들에게 저녁식사를 제공하 는 자선현장이다. 벌써 3년째다. 한인들이 준비하는 이 저녁만찬에 대한 소문이 샌프란시스코 홈리스들 사이에 퍼져 그 수가 점점 늘고 있다고 한 다. 이날도 1백여명이 넘는 ‘손님’들로 좁은 강당 안이 꽉 찼다.

이 식사의 호스트는 샌프란시스코 근교 알라메다에서 주유소를 경영하는 한명복(48)씨, 마이클의 아버지다.

마이클은 15년 전 동생과 함께 아버지의 손을 잡고 미국 땅을 밟았다. 부 모님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했다. 온 식구가 한 자리에 모여 저녁식 사를 한 날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물론 다른 집 아이들처럼 어리광 한번 부리지 못했던 그다. 그래서인지 마이클은 아직 우리 말이 서툴다.

마이클의 집이 어느 정도 여유를 갖게 된 건 지난 93년, 아버지 한씨가 그간 모은 돈으로 주유소를 차려, 점원에서 자영업자로 변신한 뒤부터다. 아버지 한씨는 자신이 살고 있는 미국사회에 기여할 방법을 찾다 지역선 교회를 통해 이 저녁식사를 마련하게 됐다. 식사제공에는 온가족이 나섰 다. 마이클이 참여한 건 당연했다.

“아버지 세대들은 정말 열심히 살았지만, 미국사회에선 한국사람들이 이 기적이고 돈만 아는 사람들로 인식돼온 게 사실입니다. 집없는 이들에게 음식을 대접하면서 인간에 대한 신뢰의 소중함을 많이 배웁니다. 먹는 것 만큼 사람과 사람 사이의 벽을 허무는 게 없지 않습니까”

‘조그마한 봉사가 행여 자랑으로 비쳐질까 두렵다’며 사진촬영을 마다 하는 아버지 한씨와는 달리 마이클은 “이 작은 사랑이 많이 알려져 한인 들과 다른 인종들이 함께 어우러지는 사회를 만드는 데 보탬이 됐으면 좋 겠다”며 자세를 잡는다. “이 저녁상을 처음 차린 분은 아버지지만 앞으 론 제가 잇게 될 겁니다.”

샌프란시스코=왕주현/ 자유기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