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1997년05월10일 제 156호

현대조각의 걸작들

이주헌/ 미술평론가

난해하기로는 추상화로 대표되는 현대회화뿐 아니라 현대조각도 마찬가지 다. 하지만 현대미술 속에서 두 장르가 동일한 변천과정을 겪어오기만 한 것은 아니다. 두 장르는 때로 각기 다른 양식적 지향을 보였는가 하면 서 로 통합돼 무엇이 회화이고 무엇이 조각인지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섞 이기도 했다. 특히 최근의 조각은 심지어 건축과의 경계마저 허물려는 듯 전혀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고 있다. 서울 소격동 국제화랑에서 5월10일까 지 열리고 있는 ‘현대조각 걸작전’은 현대조각의 그같은 다양한 양상을 부분적으로나마 잘 보여주고 있다.

조각의 고정관념 벗어난 당대의 이단아

‘현대조각 걸작전’의 출품작가는 도널드 저드와 칼 안드레, 루이즈 부 르주아, 사이 톰블리 그리고 안소니 카르 등 다섯명이다. 모두 저명한 예 술가들이기는 하나 이들을 하나의 범주로 묶을 수는 없다. 제각기 다른 방식으로 기왕의 조각에 대한 관념을 벗어난 작가들이다. 먼저 칼 안드레 가 70년대 초 겪은 에피소드를 통해 그 ‘탈 고정관념’의 단면을 더듬어 보자.

영국의 유명한 국립회화관 테이트 갤러리는 72년 칼 안드레의 <등가 8>을 구입했다. 그러자 벌집을 쑤신 듯 미술계 안팎에서 불만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런게 어떻게 예술작품이 되느냐”는 것이 그 항의의 주된 목소리였다. 특히 저널의 공격이 심했고 국민의 세금을 낭비하지 말라는 질타가 쏟아졌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였을까?

<등가 8>은 하얀 내화벽돌을 직사각형꼴로 바닥에 깐 작품이었다. 가로 세로 각 변이 10개, 6개씩이고 두 층으로 깔았으니 모두 1백20개의 벽돌 이 들어간 작품이었다. 마치 공사장 한 구석에 쌓여있는 벽돌의 모습 그 대로였다. 이와 관련해 <데일리 익스프레스>는 한 건설노동자가 벽돌 하 나를 들고 “이 작품의 정숙하고 고요함은…”이라고 눈을 감고 되뇌이는 동안 다른 두 노동자가 별 미친 놈 다 봤다는 듯 그를 째려보는, 그리고 공사장 뒤편 테이트 갤러리로 벽돌 하나가 크레인에 실려 조심조심 옮겨 지는 그런 내용의 만평을 실었다. 이같은 신랄한 조소는 <등가 8>이 처음 전시됐을 때 구매자가 없어 작가가 산 벽돌을 공장에 되팔았다가 테이트 의 구입 계획 때문에 부랴부랴 다른 공장에서 벽돌을 되산 일(먼저 공장 은 그새 문을 닫아버렸다)로 인해 더욱 큰 사회적 반향을 얻었다.

자,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예술일까? 칼 안드레의 행위는 결국 ‘ 예술은 예술가가 어떤 사물을 가리켜 예술이라고 부를 때 예술이 된다’ 는 현대미술의 ‘반예술적’입장을 극단적으로 드러내보인 것이었다. 그 러니까 작가가 무엇을 꼭 손으로 직접 그리거나 만들어야 예술이 되는 것 이 아니며, 결과물보다 그 결과물을 낳은 정신이 좀더 중요한 까닭에(창 조의 근원이 피조물이 아니고 조물주인 것처럼), 생활 속의 평범한 사물 도 예술가의 정신을 거치면 얼마든지 훌륭한 예술이 될 수 있다는 입장이 었다. 매우 기만적이고 자의적인 해석을 한 것 같은 이같은 입장은 그러 나 곧바로 ‘예술과 삶은 둘이 아니다’는 진취적인 해석을 낳고, 거기서 이분법적 또는 이원론적 세계관을 거부하고 세상의 모든 차이와 차별을 분쇄하려는 현대미술의 한 중요한 양상이 나타나게 됐다. 특히 조각은 여 기서 한발 더 나아가 우리의 구체적인 생활환경을 예술로 환원하고 예술 을 생활환경으로 환원하려는 노력을 실제적이고 적극적인 양상으로 펼치 게 되는데, 이는 옛날 건축물과 조각, 회화가 각기 다른 장르로 분리되지 않고 하나의 통합적인 예술로 존재했던 시기를 상징하게 하는 것이다. 근 래 올덴버그나 세라 같은 조각가들이 건축가와 손을 잡고 설계 당시부터 참여, 건축물의 일정부분을 조각화하는 양상이 나타나는 것도 이런 흐름 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칼 안드레의 이번 출품작 <81 CuFe>(구리와 철, 81) 역시 얇은 구리판과 철판을 체스무늬 형태로 바닥에 깔아 작품인지 바작장식재인지 구별이 안 되게 한 작품이다. 작품을 밟아보면서 관객들은 예술과 사물의 경계가 미 묘하게 흐려지는 데 대해 예의 불안감과 더불어 묘한 쾌감을 맛보지 않을 수 없다. 도널드 저드 또한 칼 안드레와 유사한 시각을 갖고 있는 미국 미니멀리스트인데, 전시장에는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색색의 박스형 작품 이 걸려 있다. 마치 철교를 놓을 때 쓰는 H빔을 연결한 것 같기도 한 그 의 박스들은 레고 장난감처럼 현대사회의 효율성 원리가 어떻게 순간적으 로 미적 원리로 화할 수 있는지 나름의 논리를 제시해주고 있다.

영국의 대표적 조각가 안소니 카로의 최근작 <칼리프의 정원>은 앞서 언 급했듯 조각과 건축의 경계를 허무는 그런 스타일의 작품이다.

금빛 놋쇠로 만든 그 구조물은, 진정한 미는 평면이 아니라 공간에서 나 옴을 웅변해주고 있다. 그 공간이 시각적인 것이든, 음악적인 것이든 또 사유적인 것이든, 사실 건축물은 그 자체가 자연의 모방이 아니라는 점에 서 철저히 추상적인 예술인 것이다. 그러나 그 어느 예술에 비해 기능적 인 목표와 실제적 효용성이 뚜렷하다는 점에서 또 매우 구체적인 예술이 기도 하다. 이처럼 미와 기능이 ‘불가분리’의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 거기서 삶과 예술을 유기적으로 통합시키려는 현대미술의 큰 줄거리는 지 대한 영향을 받는다. 그런 까닭에 현대미술이 모든 조형예술의 어머니, 건축에게로 돌아가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조형예술의 어머니인 건축으로 돌아간다

여성작가인 루이즈 부르주아는 마치 원시미술의 토템 같은 것들을 여러 점 선보이고 있는데, ‘기둥’등의 제목에서 볼 수 있듯 건축적인 지향성 을 어느 정도 과시한다. 하지만 그의 가장 큰 관심은 아무래도 여성성과 남성성 등 성의 사회학이다. 장승이나 솟대가 풍기는 문화인류학적 관심 을 바탕에 깐 그 작품들은 이를테면 연극무대 같은 상황을 느끼게 하는 가운데 여성적 정서의 관통, 그 관류하는 힘의 유장함을 드러내 보인다. 페미니즘의 대표적 작가로 꼽히는 만큼 역시 삶과 예술을 하나로 이으려 는 현대미술의 한 중요한 전통을 이루는 작가라 할 수 있다. 한편 화가로 더 잘 알려진 사이 톰블리는 고대 문명의 유물 같은 소품들을 출품했다. 전체적인 분위기와는 약간 동떨어진 느낌을 주지만, 과거와 고전을 통해 현대를 보는 작가라는 점에서 앞서 언급한 현대 조각의 환언적 흐름과 나 름의 방식으로 관계를 맺는 예술가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