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하는 재벌	1997년05월10일 제 156호

쌍용차, 운명을 건 드라이브

(사진/4월23일 서울모터쇼 행사장에서 인사하는 김석준 회장(가운데). 쌍용차 회생의 강한 의지를 보이고 있다. )

김석준 쌍용그룹 회장은 지난 3월 이후 매주 월요일에는 쌍용자동차 본사 가 있는 평택공장으로 출근한다. 중요한 외부손님과의 약속이나 계열사 사장 전원이 참석하는 그룹 대표이사 회의 같은 특별한 일정이 없는 한 거의 예외가 없다. 김 회장은 평택공장에서 자동차 임원회의를 주재하고, 생산라인을 직접 둘러보며 현장 사원들을 격려한다. 김 회장은 별 사정이 없는 한 하루, 이틀은 공장에서 잠을 잔다. 김 회장의 숙소는 평택공장 내 사원 기숙사. 미래동 201호가 그의 방이다. 모두 4개동이 있는 사원 기숙사는 원래 독신자들이나 서울에서 출퇴근이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마 련됐다. 그룹의 총수라고 특별대우는 없다. 8평 크기의 단칸방에, 시설이 라고는 침대 하나와 목욕탕이 전부다. 다만 4명의 직원이 묵는 방을 혼자 쓰고 있고, 냉장고를 별도로 갖다 놓은 것이 호사라면 호사다. “평택공 장은 서울과 가까워 현대그룹 울산공장이나 포항제철 포항·광양공장 등 에 있는 영빈관 시설이 없다. 김 회장은 식사도 기숙사 식당에서 직원들 과 함께 한다.”

증권가에 쫙 퍼진 악성루머

쌍용차 관계자의 말이다. 김 회장의 평택행은 자신의 약속을 지키기 위한 것이다. 그는 지난 2월 말 쌍용차를 중심으로 그룹의 구조조정을 선언한 뒤 “앞으로 쌍용차가 정상화될 때까지 일주일에 며칠씩은 평택 쌍용차공 장에 상주하겠다”고 다짐했다. 쌍용차 정상화에 그룹의 모든 역량을 쏟 겠다는 김 회장의 의지표현이다. 일종의 ‘배수진’인 셈이다.

지난 2월 중순 쌍용차 사장에 전격기용된 이종규 사장은 아예 1주일 내내 평택공장에 상주하다시피 한다. 지난 69년 신진자동차 입사를 시작으로 3 0년 가까이 자동차 전문경영인으로 외길을 달려 온 이 사장은 쌍용정공 대표이사 시절 사장실에 야전침대를 갖다놓고 일한 ‘독종’이다. 그는 취임 뒤 임직원들에게 “더도 덜도 말고 나만큼만 일하라”고 말한 것으 로 전해진다.

김 회장은 지난 2월 말 “쌍용차를 2-3년 내 흑자로 전환시켜 자동차사업 을 21세기 그룹의 주력업종으로 키우겠다”고 선언했다. 또 그룹 종합조 정실 안에 쌍용차 지원전담 조직으로 자동차팀(팀장 장기택 부사장)과 재 무특별반을 구성해 자동차사업의 장기전략 수립, 재무구조 개선, 해외기 업과의 전략적 제휴 등 당면과제를 추진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최근 증권가에서 다음과 같은 루머가 나돌고 있다. “진로 다음은 쌍용이다.” 루머라고 안심할 수는 없다. 루머에 멍들다가 아예 쓰러져 버린 기업이 한둘이 아니다. “지난 4월 초 증권가에 어음 할인이 안 되 는 기업들의 리스트가 돌았다. 리스트에 올라 있는 20여개 업체 중에는 최근 몇년간 빠른 속도로 사세를 키워 온 ㄱ그룹, ㄴ그룹, ㅅ그룹과 건설 업계의 ㅊ그룹, 김현철씨와의 유착설이 돌고 있는 ㄷ건설 등과 함께 진로 그룹이 포함돼 있었다. 물론 깜짝 놀라면서도 설마한 사람이 많았다. 그 러나 불과 10여일 뒤 진로의 자금난이 현실화됐다.” 정보 관련 업무를 맡고 있는 한 증권사 직원의 말이다.

25개 계열사를 거느리며 재벌랭킹 6위(자산 기준)에 올라 있는 쌍용이 악 성루머에 시달리고 있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결정적인 것은 그룹의 간판기업인 쌍용자동차의 부실이다. 지난해 쌍용차의 매출은 1조3천6백94 억원. 처음으로 1조원대를 돌파하는 개가를 올렸다. 그러나 속은 마치 수 수깡과도 같다. 지난해에만 2천2백84억원의 적자를 냈다. 93년 이후 누적 적자가 4천9백61억원에 이른다. 금융기관 대출금과 외상매입금 등을 포함 한 전체 부채액이 3조7천3백16억원(96년 말 현재)으로 부채비율이 1만%를 넘는다. 쌍용그룹은 지난해 25조원의 매출을 올렸지만 그룹 전체로는 적 자를 면치 못했다. 쌍용차 때문이다. 일부에서는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는 국내 자동차산업 현실을 감안할 때 쌍용차의 올해 적자도 2천억-3천억 수 준에 이를 것이라는 예상을 하고 있다. 쌍용은 97년 매출목표를 29조원으 로 늘려 잡았지만 자동차의 적자가 개선되지 한 ‘속빈 강정’ 신세를 면 할 길이 없다. 자동차 하나로 그룹 전체가 휘청거리고 있는 것이다.

신형차 ‘체어맨’에 기대 걸지만…

그러나 쌍용그룹은 이런 외부 시각에 불만이 많다. “95년 말 기준으로 쌍용그룹의 자기자본비율은 25.2%로 30대 그룹 가운데 네번째로 높다. 현 재는 20% 안팎으로 다소 낮아졌지만 다른 그룹들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견실하다고 볼 수 있다.” 쌍용그룹 종합조정실 재무팀장인 최명호 이사 의 말이다. 자동차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올 들어 자동차의 자본금 을 늘리고 부채를 줄이는 작업이 꾸준히 진행돼 부채비율이 2천% 수준으 로 뚝 떨어졌다. 또 자동차를 제외한 다른 계열사의 경영은 견실하다. 그 룹 전체로는 전혀 문제가 없다.” 쌍용차는 올 들어 전환사채(CB)를 주식 으로 전환해 자본금을 2천2백36억원에서 2천9백99억원으로 크게 늘렸다. 또 금융기관 대출금을 중심으로 빚을 갚아 부채를 3조원 수준으로 줄였다 . 또 자동차할부 관련 채무를 할부금융쪽으로 넘기고 애프터서비스 부문 을 별도 회사로 독립시키는 방식으로 부채를 털어내면 내년 초까지는 부 채를 2조2천여억원 수준까지 줄일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판매쪽에서도 기대가 크다. 93년부터 투자를 시작한 3,000cc 이상 중대형 승용차 ‘체어맨’이 올 9월부터 시판된다. 쌍용은 첫 승용차 모델로 벤 츠엔진을 탑재한 체어맨으로 내수는 물론 수출시장까지 공략할 계획이다. 김 회장은 지난 4월23일 “올해는 내수시장에서 3천대를 판매하고 내년에 는 1만5천대로 늘린 뒤 2000년에는 3만대를 팔 계획”이고 “수출은 내년 중반기부터 추진해 내년에만 3천대를 팔고, 2000년에는 1만대로 수출물량 을 늘릴 계획”이라고 밝혔다. 김 회장은 동남아를 중심으로 전세계에 진 출해 있는 그룹 계열사 소속 현지법인과 지점에 체어맨 판매 목표량을 직 접 할당할 작정이다. 체어맨에 거는 김 회장이나 그룹의 기대가 얼마나 큰지를 잘 보여준다. 쌍용은 무쏘, 뉴코란도, 이스타나 등 기존 차종의 판매가 호조를 보이고 있어 체어맨까지 가세하게 되면 쌍용차의 올해 매 출이 지난해보다 30% 이상 늘어난 2조원대에 이를 것으로 자신하고 있다. “지난 86년 동아자동차를 인수한 뒤 쌍용차가 독자모델로 내놓은 것은 사실상 93년의 무쏘가 처음이다. 지난 10여년간 거의 투자만 온 셈이다. 그러니 앞으로는 수확을 거둘 차례다. 쌍용차가 어렵다지만 다른 부실기 업과는 그 내용이 전혀 다르다.” 쌍용그룹 종합조정실 김동현 상무의 말 이다. “쌍용차의 기술은 세계 수준이다. 뉴코란도는 없어서 못 파는 형 편이다. 다른 자동차업체들이 내수와 수출부진으로 조업을 단축하는 등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우리는 24시간 교대근무로 풀가동하고 있다.”

그러나 상황이 마냥 낙관적인 것만은 아니다. 현재 3,000cc 이상 중대형 승용차의 연간 내수시장 규모는 3만대 수준이다. 차 한대 값이 4천만원을 넘는 3,000cc 초대형 승용차는 월 몇백대 정도 팔리고 있을 뿐이다. 완성 차업체의 한 임원은 “체어맨이 벤츠엔진을 달아 관심은 끌겠지만 워낙 내수시장 규모가 적은 데다 현대, 대우, 기아 등 다른 업체들의 경쟁도 치열해 체어맨이 쌍용차의 효자 노릇을 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 했다.

계열사 불만 갈수록 높아져

쌍용차의 자구노력도 기대만큼 진전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 쌍용차는 서 울 도곡동의 기술연구소와 자동차 휠 디스크를 생산하는 부평공장을 매각 해 1천억원 이상의 자금을 마련할 계획이었다. 도곡동 기술연구소는 현재 쌍용해운, 중공업, 엔지니어링 등 3개 계열사가 매입해 쌍용제지에 임대 해 주는 방안이 추진되고 있지만 자금사정 등으로 여의치 않다. 부평공장 매각건도 아직 유동적이다. 미국의 GM, 말레이시아의 프로톤 사가사 등 해외기업으로부터 자본을 들여오는 것도 별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다. GM 은 자본참여 대가로 쌍용차의 국내 판매망을 통해 자사 차량을 판매한다 는 계산이지만 쌍용은 부정적이다. 김 회장은 애초 취임 2주년이 되는 지 난 4월25일 기자회견을 갖고 구체적인 쌍용차의 회생방안을 발표할 예정 이었지만 내놓을 게 마땅치 않아 일단 5월 중순으로 미뤘다.

나머지 계열사를 중심으로 한 군살빼기도 크게 기대하기 힘든 형편이다. “중공업의 특수엔진 생산부문을 없애는 등 수익성이 떨어지는 한계사업 은 정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계열사 매각이나 통폐합은 버스임대업을 하는 동성고속관광 정도를 제외하고는 없을 것이다. 특히 항간에 나도는 쌍용제지 매각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룹 종합조정실 관계자는 잘라 말했다. 오히려 정보통신 등 첨단사업에 대한 투자는 더 늘릴 전망이다. 그렇다고 다른 계열사의 사정이 좋은 것도 아니다. 쌍용정유를 제외하고 는 양회, 제지, 건설, 중공업 등 그룹의 간판기업들 모두 지난해 수십억 원대의 이익을 내는 데 그쳤다. 연간 매출액이 적게는 3천억원에서 많게 는 7조원에 이르는 기업이 수십억원의 이익을 냈다는 것은 사실상 적자를 낸 것과 별 차이가 없다. 과거 이들은 쌍용차의 젖줄 구실을 해왔다. 계 열사 임직원들의 불만도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계열사의 한 관계자는 “ 쌍용양회의 경우 최근 과장급 이상 중간 간부들 40여명이 회사를 떠났다 ”면서 “쌍용차의 부실로 다른 계열사들까지 임금이 동결되고 인원이 감 축되는 등 고통을 겪고 있다”고 못마땅해 했다.

김 회장, 두마리 토끼 잡을까?

결국 그룹 차원의 좀더 근본적인 구조조정과 자구노력이 없는 한 쌍용차 의 부분적인 재무구조 개선만 가지고는 역부족일 수밖에 없다. 쌍용그룹 관계자들 스스로 쌍용차를 ‘그룹의 암’이라고 부른다. 암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그만한 고통이 따르게 마련이다. 좋은 나무라도 당장 보기에 좋 다고 가지치기를 제때 안 하면 뒤에 좋은 결실을 보기 어렵다. 진로그룹 의 경우에는 내실은 신경쓰지 않고 사업다각화를 무리하게 추진하다 장진 호 회장의 경영권마저 위협받는 처지에 몰리고 있다.

김석준 회장은 지난 2월 말 “내가 회장으로 있는 한 쌍용차를 매각하는 일은 없다”고 공언했다. 삼성그룹의 쌍용차 인수설을 불식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쌍용차의 정상화에 실패하면 김 회장 자신이 경영권을 계속 유지한다는 보장도 없다. “좀더 근본적인 구조조정과 자구노력이 있어야 할 것으로 보이지만 실무자들이 감히 김 회장에게 건의를 못하는 것 같다.”

쌍용그룹 한 임원의 독백이다. 쌍용차와 그룹 전체를 정상화시키겠다는 김석준 회장의 ‘승부수’가 성공할지 관심거리다.

곽정수 기자 한겨레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