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커스	1997년05월01일 제 155호

전·노 사면 없이 대선도 없다?

(사진/4월18일 신한국당사 앞에서 열린 전-노 사면 반대시위. 재야단체들은 사면이 이뤄질 경우 정권퇴진운동까지 벌이겠다는 강경자세를 보이고 있다.)

한보 사태에 이어 국민들의 심사를 혼란스럽게 하는 또다른 논란이 돌출 했다. 이미 예상됐던 것이긴 하지만 최근 대법원에서 확정 판결을 받은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의 사면 문제가 정치적 쟁점으로 떠오른 것이다. 두사람은 지난 17일 대법원에 의해 각각 무기징역과 징역 17년을 확정판결받았다.

정치권 다수의 주장은 간단하다. 국민화합 차원에서 전·노씨를 용서하자 는 것이다. 그러나 전·노씨에 대한 사면론을 지켜보는 국민들은 혼란스 럽기 그지없다. 역사의 단죄를 기록한 법원 판결문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 에 사면론이 거론되는 것에서 ‘역사바로세우기’의 실종을 목격해야 하 기 때문이다.

대선후보들 대부분 사면에 대해 긍정적

정치권과 일반국민 사이의 이런 인식차는 자칫 또다른 국론분열로 이어질 수 가능성이 짙다. 김 대통령이 취임 초 `광주문제를 ‘역사에 맡기자’ 며 전·노씨 처벌불가론을 주장하는 바람에 `전·노처리문제를 둘러싸고 1차 국론분열이 야기됐다. 이번에 사면론을 둘러싸고 제2차 국론분열이 우려되는 상황이다. 대선을 앞두고 지역간 대립으로 발전할 수 있는 문제 이기도 하다.

정치권에서는 여야를 불문하고 대부분 전·노씨 사면에 대해 긍정적이다. 신한국당과 자민련이 상당히 적극적인 데 반해 국민회의는 당사자 사과와 국민적 여론을 전제조건으로 달고 있다는 차이만 있을 뿐이다.

신한국당내의 논의는 “오는 12월 대선에서 여권후보가 승리하려면 반드 시 대선 전에 사면이 돼야 한다”는 사면불가피론이 대세다. 물론 당이 대변인을 통해 사면과 관련한 공식입장을 밝힌 적은 없다. 그러나 대선에 서 `‘반김영삼 정서’가 팽배한 TK(대구·경북)민심을 돌리기 위해서도 사면을 해야한다는 것이 당내 전반적인 분위기이다.

이를 반영하기라도 하듯 당내 대선후보들도 대부분 사면에 대해 긍정적이 다. 이회창 대표는 “사법부의 판단이 내려진 직후에 사면하라 마라 하는 것은 사법부를 존중하는 태도가 아니다”며 현 시점에서 사면을 논의하는 것은 시기적으로 적절치 않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사면여부에 대해서 는 명확한 태도를 밝히지 않고 있으나 이 대표 측근들은 “대통령이 국민 대화합과 결자해지 차원에서 결단을 내리지 않겠느냐”며 대통령에게 전 적으로 떠맡겼다. 이 대표를 밀고 있는 김윤환 고문은 “김영삼 대통령이 적절한 시점에서 두 전직 대통령을 사면해 과거청산문제를 매듭짓는 게 바람직하다”며 사면론을 거침없이 주창하고 있다. 이수성 고문의 경우 아예 “빠르면 빠를수록 좋고 국민의 대동단결을 위해 한번쯤은 대대적인 사면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고 한발 앞서갔다. 박찬종 고문과 이 홍구 고문도 국민적 합의를 내세우고 있으나 사면 자체에 대해서는 반대 하지 않는다.

국민회의는 국민여론에 따라야 한다고 유보적이나 국민적 합의만 있으면 수용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김대중 총재는 “먼저 당사자들이 과거를 반 성하고 사과해야 한다”고 전제하고 “국민 사이에서 용서하자는 분위기 가 조성되면 그때 가서 여론을 봐가며 추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앞뒤문 을 모두 열어놓았다. 역사적 단죄라는 명분과 TK 및 보수층 표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자민련은 하루라도 빨리 사면해야 한다며 정치권에서 전·노씨 사면에 가 장 적극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다. 애초부터 전직 대통령에 대한 사법처리 를 반대해온데다 TK세력이 당의 한축이기 때문이다. 자민련은 원내교섭단 체 정당으로서는 유일하게 안택수 대변인의 논평을 통해 “앞으로 적절한 시기에 두 전직 대통령을 용서해 주자는 여론이 훨씬 더 많아진다면 사면 조치를 할 수도 있을 것”이라며 사면문제를 공식 거론했다.

전·노 사면은 정권퇴진운동 부를 것

한편 사면에 대한 최종 결정권을 갖고 있는 청와대는 여론의 향배에 촉각 을 세우며 매우 신중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신한국당이 대선전략 차원에 서 압박해오고 있는 사면 요구와 대통령의 유일한 치적이라 할 `‘역사바 로세우기’를 스스로 부정해야 하는 딜레마 속에서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 때문에 김 대통령은 아직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고 있다. 한보사태로 최악의 불신을 받는 상황에서 또 다시 불신과 반발을 보탤 수도 없고 그 렇다고 당내 요청을 한사코 외면할 수도 없다.

시민단체 등 일반 국민들의 여론은 정치권과 달리 전·노 사면에 매우 부 정적이다. 시민·재야단체들은 “대법원의 확정판결이 있자마자 전·노씨 에 대한 사면 논의를 본격화하는 것은 반역사적 죄악행위”라며 반발하고 있다. 이들 단체들은 사면이 이뤄질 경우 정권퇴진운동까지 벌이겠다는 강경자세를 보이고 있다.

사면권자인 김 대통령이 정략과 대의명분 가운데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 주목된다. 자존심과 국민적 반발도 생각하고 정치적 ‘후환’도 걱정해야 할 입장이니 김 대통령으로선 딱한 처지다.

김성호 기자 한겨레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