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1997년05월01일 제 155호 한겨레21

꽃, 그 아름다운 혁명

(사진/국화 `봉안(eye)'.)

국화 ‘봉안’(Eye)은 태어난 지 이제 갓 돌이 지났다. 샛노란 꽃심에 큼 지막한 적갈색 반점을 달고 세상에 나왔다. 그 모습이 꼭 벌의 눈 같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 샛노란 꽃판과 적갈색 반점, 그리고 초록색 잎 이 빚어내는 삼색의 조화가 아름답다. 동갑내기 ‘태양’(Sun)은 꽃모양 이 여름 한낮의 해를 떠올리게 한다. 촘촘한 꽃잎들이 둥글게 퍼지면서 불꽃처럼 이글거린다. 지금까지 거의 쉬지않고 꽃을 피웠다. 꽃을 잘라내 면, 그자리에서 금세 새 꽃망울을 맺었다. 그런데도 잔병치레 한번 없이 튼튼하다.


인간을 부모로 둔 꽃들의 탄생

봉안과 태양은 모두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국화다. 이전에는 세상에 없던 거였다. 유전적으로 최초의 국화이고, 분류상으로도 최초의 이름이 다. 고향도 같다. 경기도 수원에 있는 농촌진흥청 원예연구소 화훼과. 꽃 의 육종을 연구하는 그곳에서 그들은 태어났다. 어렸을 땐 온실에서 자랐 고, 그보다 더 어렸을 땐 시험관 안에 있었다. 사실 그들은 태어났다기보 다 만들어졌다.

신학기 박사(농학)는 봉안과 태양의 실질적인 아버지다. 지난 92년 교배 에 들어가 4년여에 걸친 진통 끝에 이들을 얻었다. “봉안과 태양은 교배 를 통해 창조한 신품종 국화입니다. 기존의 국화 품종을 교배해 꽃 모양 과 색깔이 예쁘고, 병에 강한 신품종을 얻어낸 거죠. 아직까진 농가에 보 급하는 단계지만, 조만간 해외로도 수출길이 열릴 것입니다.”

교배란 아득한 과녁을 향해 화살을 쏘는 것과 비슷한 작업이다. 대부분의 화살은 과녁을 한참 벗어나기 십상이고, 과녁에 맞았다 해도 명중이라 할 수 있는 건 가뭄에 콩나듯 드물다. 꽃이 예쁘면, 색깔이 처지고, 색깔이 좋으면, 병에 약한 식이다. “대개 교배를 통해 신품종을 얻을 확률은 5 백분의 1 정도로 봅니다. 1천개의 씨앗을 뿌려 1~2개의 싹을 보는 셈이죠 . 게다가 봉안은 부모가 모두 흰색 꽃을 피우는 국화여서, 샛노란 꽃을 얻으리라곤 기대하기 힘들었습니다.”

품종을 발견했다고 일이 끝난 게 아니다. 이제 겨우 한고비를 넘은 것에 불과하다. 사람으로 치면 임신 초기에 해당한다. 다음엔 배양실에서 싹을 키워가며 적합한 성장조건을 찾아야 한다. 그만큼 돌보는 이의 정성과 애 정이 필수적이다. 모본이 자라면, 직접 땅에 심어 자연상태에서도 잘 자 랄 수 있는지 시험한다. 특성 검정, 생산성 검정이라는 까다로운 시험이 이어진다. 마지막으로 농가로 보내 재배 실험을 거친다. 그리고 마침내 출산. 지난한 진통을 치르고 태어난 꽃은, 이름을 받아 신품종 목록에 오 른다.

더 아름답고, 더 향기롭고, 더 튼튼한 꽃을 창조하기 위한 연구가 활발하 다. 꽃은 이제 더이상 자연의 조화로만 빚은 생명체가 아니다. 세계 곳곳 에서 사람의 손을 빌려 이제까지 없던 꽃들이 태어나고 있다. 잎까지 노 란 개나리, 개화한 꽃이 하루 반나절을 버티는 무궁화, 가을보다 여름에 활짝 피어나는 국화, 그리고 검은 튤립에 파란 장미. 신의 창조에 버금가 는 ‘꽃의 혁명’이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특허받은 개나리 ‘서울 골드’


(사진/특허청 신품종 목록에 오른 개나리 `서울 골드'(오른쪽). 노란 잎사귀를 가진 덕에 여름에도 노란 개나리 빛을 즐길 수 있다.)

성균관대 심경구 교수(조경학)는 어느 봄날 교정을 거닐다 희한한 개나리 를 발견했다. 마침 노란 꽃이 지고, 초록색 잎이 하나둘씩 돋을 무렵이었 다. 헌데 한 개나리의 가지는 여전히 노랬다. 꽃이 아직도 피어있는 것일 까. 호기심에 가까이 가보니 그건 꽃이 아니라 잎이었다. 다른 가지들이 모두 초록색 잎을 달고 있는데, 이것만은 유독 노란 잎을 뽐내고 있었던 것이다. “일종의 돌연변이였습니다. 잎 테두리는 초록색이었지만, 안쪽 은 노란색이 짙었죠. 자연계에서는 수천만분의 1 정도로 보기 드문 개나 리였습니다.”

심 교수는 그때부터 이 개나리에 매달렸다.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는 방 법을 찾아 조직을 배양하고, 재배법을 연구했다. 그로부터 8년 뒤, 이 개 나리는 ‘서울 골드’(Seoul Gold)라는 이름으로 특허청 신품종 목록에 올랐다. 세상에서 오직 하나밖에 없는 개나리로 인정받은 것이다. “지금 까지 개나리는 봄에 노란 꽃만 감상하는 게 고작이었습니다. 그러나 ‘서 울 골드’는 봄에는 노란 꽃을, 여름에는 노란 잎을 즐길 수 있습니다. 봄부터 여름까지 개나리의 노란 빛이 살아 있는 셈이죠.”

밤에도 꽃이 지지 않는 무궁화 ‘심산’(Shimsan)도 심 교수의 작품이다. 지난 94년 개발된 심산은 배수체 육종이라는 좀더 복잡한 과정을 거쳐 태 어났다. 미국에서 들여온 무궁화 2종을 교배해, 염색체수가 3의 배수인 신품종을 찾아낸 것이다. 심산은 아침 5시께 꽃이 피어, 다음날 저녁 6시 께까지 시들지 않는다. 날씨가 따뜻하면, 밤 11시께까지 피어 있기도 한 다. 한나절을 넘기지 못하고 시들어 밤에는 꽃을 볼 수 없었던 기존의 무 궁화와는 딴판이다. 심 교수는 “심산이야말로 무궁화라는 이름에 걸맞은 무궁화”라고 자랑한다.

새로운 꽃은 계절도 넘나든다. 가을의 여왕이라는 국화도 여름에 피어나 자태를 뽐낸다. 품종개발 막바지 단계에 이른 ‘B1-43’이 바로 그런 국 화다. 가을에 피는 품종과 봄에 피는 품종을 교배해 만든 이 국화는, 봄 부터 여름까지 꽃을 피운다. 게다가 병에도 강하다. B1-43은 국화에는 치 명적인 흰녹병에도 끄떡없다. 잎에 반점이 생겨 전체적인 꽃의 모양을 해 치는 환녹병을 이김으로써 조화와 아름다움을 유지한다.

최근의 꽃 품종개발은 꽃 색깔의 변화를 추구한다. 유전자 조작이나 방사 선 처리를 통해 자연에는 없는 새로운 색깔의 꽃을 창조하는 것이다. 유 전자를 이식하거나 방사선을 쏘아 꽃의 염색체를 변형시킴으로써 다채로 운 색깔을 얻는 것이다. 얼마 전 뉴질랜드에서는 검은 튤립이 만들어졌고 ,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자주색 카네이션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모두 완벽한 검정, 자주색은 아니지만, 이전의 것보다 한층 원색에 다가선 품 종이었다.


세계를 휩쓴 한국산 선인장

한국과학기술원 생명공학연구소 민병환 박사팀은 6개월째 파란 장미를 창 조하는 일에 도전하고 있다. 파란 장미는 1천년이 넘는 장미육종 역사에 서도 극히 드문 품종이다. 지난 64년 독일에서 교배를 통해 ‘블루 문’( Blue Moon)이라는 파란 장미를 개발하긴 했지만, 색깔은 보라에 가까웠다 . 이후 파랑에 더욱 가까운 장미를 만들기 위한 사람들의 노력이 이어졌 으나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 육종학자들에게 파란 장미는 하늘의 꽃으 로 여겨질 정도다.

연구진은 그 신비에 유전공학이라는 첨단기법을 들이댔다. 야생도라지에 서 파란색을 내는 유전자를 찾아내, 이를 장미 유전자에 주입하기로 한 것이다. 도라지는 흰색과 파란색 두 가지 색깔밖에 없어, 후대에서 유전 인자가 발현되면서 엉뚱한 색깔이 나올 가능성이 적기 때문이다. 현재 도 라지의 파란색 유전인자를 아그로박테리움이라는 세균의 유전자에 끼워넣 는 데 성공했다. 남은 과제는 이 세균을 장미의 유전자에 끼어들게 하는 것이다.

효성여대 유순남 교수(식물육종학)는 카네이션의 색깔을 바꾸는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역시 유전자 조작을 통해 색깔의 혁명을 일으킬 작정이다 . 유 교수는 “카네이션은 꽃색깔이 많지 않아 이를 다양화할 경우 상품 성을 크게 높일 수 있다”고 강조한다. 그의 머리 속에는 언제나 파랗고, 검고, 하얀 신품종 카네이션이 어른거린다. 꿈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다양한 색깔의 카네이션에 병충해에 강한 성질까지 가미할 계획이다 .


(사진/글라디올러스 신품종 `홍광'과 `홍은'. 기존의 품종에 비해 꽃색깔이 한층 뛰어나다.)

원예연구소에서 최근 개발에 성공한 글라디올러스 ‘홍광’(Pink Glory) 과 ‘홍은’(Princess Rose)도 색깔혁명에 성공한 신품종이다. 교배와 방 사선 처리를 결합해 창조한 홍광은 선홍빛 꽃색깔이 여는 품종에 비할 바 아니고, 홍은 역시 은은한 분홍빛이 뛰어나다. 김재영 박사는 “홍광과 홍은은 모두 색깔을 더 선명하고 아름답게 하기 위한 연구의 산물로, 기 존의 품종과 비교했을 때 한층 꽃색깔이 뛰어나다”고 말한다.

꽃처럼 화려하지는 않지만, 소박한 멋을 풍기는 선인장도 신품종 개발이 한창이다. 선인장은 특히 우리나라 화훼수출품의 주력이어서 개발 열기가 뜨겁다. 현재 우리나라는 1백여 농가가 선인장을 생산하고 있다. 여기서 나온 선인장은 전세계 유통량의 65% 이상을 차지한다. 95년의 경우 세계 소비물량 1천2백만개 가운데 8백50만여개가 우리의 수출품이었다.

선인장 신품종 ‘홍일’(Hongil)은 세계무대를 겨냥한다. 수레바퀴 모양 의 홍일은 새빨간 색깔에 하얀 반점이 어우러져 금방 눈에 띈다. 농가에 서는 파란색 몸통에 다양한 색깔의 선인장을 접목시켜 선풍을 일으킨 ‘ 비모란’의 뒤를 이을 신품종으로 기대가 크다.

신품종을 찾기 위한 노력이 꼭 화려한 열매를 맺는 것은 아니다. 꽃잎에 반점이 없어 순결한 아름다움을 풍기는 백합 ‘틈나리’는 품종개발의 어 려움을 웅변한다. 원예연구소에서 지난 92년 만들어낸 이 품종은, 나오자 마자 사장되는 시련을 겪어야 했다. 마침 그보다 더 꽃모양이 아름답고, 색깔이 다양하면서, 흠이 없는 외국산 품종이 밀려들었기 때문이다. 김 박사는 “신품종을 개발하기 위한 경쟁이 워낙 치열하다 보니, 조금만 시 기를 놓쳐도 공든 탑이 무너진다”고 말한다.

신품종 개발에 따른 윤리적 문제도 만만찮다. 교배나 유전자 조작, 방사 선 처리를 통해 자연에 없는 신품종을 창조하는 것은, 신의 영역에 사람 이 뛰어들었음을 뜻한다. 비록 꽃 품종개발의 역사가 길어 사회의 거부감 이 덜하긴 하지만, 윤리적인 문제는 사라지지 않는다. 게다가 식물의 품 종개발은 동물에 비해 쉬워 무분별한 변종이 생길 가능성도 있다. 요즘처 럼 유전자 조작이 성행하는 현실에서 그런 우려는 더욱 커진다. 원예연구 소 구대회 박사는 “식물의 품종개발도 엄격히 말하면 동물복제에 따르는 윤리적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고백한다.


품종뿐만 아니라 색도 개량 대상

꽃은 자연이 빚은 걸작품이다. 화려한 색깔과 은은한 향으로 사람들의 마 음을 움직여왔다. 동서고금의 문학 속에서, 수많은 연인들의 밀어 속에서 , 그리고 현대의 영상매체 속에서 꽃은 항상 피어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 은 더 아름다운 꽃을 찾아 연구실의 불을 밝힌다. 더 탐스러운 꽃, 더 좋 은 향기, 그리고 더 튼튼한 줄기를 만들기 위해 많은 시간과 돈을 투자한 다. 첨단시설을 갖춘 종묘회사를 비롯해 유전공학연구소, 농민단체들이 이 전쟁에 뛰어들고 있다. 물론 단순한 미학적 욕심 때문만은 아니다. 거 기에는 냉혹한 경제논리가 숨어 있다. 새로운 품종의 꽃은 곧바로 시장의 강자로 떠오르고, 개발자는 떼돈을 거머쥔다. 그래서 품종개발에 뛰어든 이들은 “지금 세계는 꽃 전쟁이 한창”이라고 말한다.

5월에는 우리나라에 세계의 꽃들이 몰려온다. 경기 고양시에서 국내 처음 으로 세계꽃박람회가 열리기 때문이다. ‘꽃과 인간의 만남’이라는 주제 로 펼쳐질 이 꽃잔치에서,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꽃은 없다고 봐도 틀림 없다. 꽃과 인간의 만남은 이미 있었고, 지금 그 만남이 혁명으로, 전쟁 으로 번지고 있다.

유강문 기자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05월0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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