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1997년05월01일 제 155호

업타운과 양파 그리고 리아

(사진/또래에 비해 성국해 보이는 이미지의 리아는 작사 재주가 범상치 않다.)

신현준/ 대중음악평론가

업타운, 양파, 리아. 최근에 가요차트와 ‘길보드차트’에서 높은 순위를 차지하고 있는 뮤지션들이다. 업타운이라는 그룹은 윤미례라는 가수/댄서 를 앞세우고 있기 때문에 오늘의 주제는 ‘최근 뜨고 있는 여가수’이다. 이전에도 ‘여가수 어쩌구.…’하는 주제의 글을 쓴 일이 있어 독자들의 따가운 눈초리가 매섭지만, 변명하자면 오늘 주제는 ‘소녀 가수’로 좁 힐 수 있겠다.

양파와 윤미례는 속된 말로 아직 ‘고딩’들이고 리아는 이제 막 고등학 교를 졸업한 만 19세 소녀다. 이들은 표절시비에 휘말린 주주클럽의 주다 인과 더불어 ‘어린 나이에 한참 잘 나간다.’ 물론 이들의 노래는 여전 히 10대 위주의 수용자를 대상으로 하고 있고, 그 흔하디 흔한 틴 아이돌 중 한명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적어도 내 판단으로는 이들 의 노래가 ‘가요 팬의 원로층’이라고 할 만한 20대 후반~30대 초반의 귀를 잡아당기고 있는 듯하다. ‘서태지와 아이들’이나 듀스 이래로는 이런 적이 별로 없었다.

오빠들의 천국에서 상한가 유지

(사진/`업타운'의 데뷔 앨범은 제대로 된 힙합 음반이다. 귀여운 여동생 이미지를 가진 윤미례의 육감적인 춤과 노래 솜씨가 돋보인다.)

우리가 피부로 느끼듯 지금까지 한국의 가요계는 다른 영역 못지 않게 ‘ 남성지배사회’였다. 즉 키 크고, 잘 생기고, 옷 잘 입고, 춤 잘 추고, 노래‘도’ 잘하는 오빠들의 천국이었다. 이는 거창하게 말하면 90년대 한국사회의 지배적 섹슈얼리티의 반영이었다. 인물좋고 몸매좋고 매너좋 고 재능있는 남성의 향기. 그런데 이때 또하나 필요한 조건은 ‘잘 노는 ’ 것이다. 잘 논다는 것은 물론 ‘열심히 일한다’와 배치되지 않는다. ‘일할 땐 열심히 일하고 놀 땐 열심히 노는’, 즉 노동과 여가를 확실히 구분할 줄 아는 자질이 매력의 조건이다. 달리 말하면 대충 일하면서 딴 생각한다든가, 놀 시간에 일할 걱정하는 것은 ‘궁상’이다.

여자는? ‘그런 멋진 남자와 격의없이 친구처럼 지내면서 잘 노는’ 여자 가 매력있는 여자다. 룰라나 박미경 같은 혼성 그룹 혹은 솔로 여가수가 성공을 거두었던 것은 이점과 무관하지 않다. 그렇다면 룰라가 이미 ‘은 퇴선언’을 해버렸고 박미경은 한장만 더 나오면 ‘노추’라는 소리를 듣 는 판국에서는?

업타운의 윤미례는 여전히 ‘잘 노는 여자애’의 범주에 속한다. 업타운 의 총지휘자인 정연준은 듀스를 비롯해 국내 힙합 음반들의 프로듀서를 담당해 준 적이 있는 인물이다. 미국에 살다 왔고, 음악 실력 있고, 돈 잘 버는 등 잘 나가는 남자다. 윤미례는 그와 격의없이 지내는 말괄량이 여동생처럼 보인다. 몸무게가 좀 나가서 투정도 하고 고민도 하는 귀여운 여동생. 어쨌든 윤미례의 이국적이고 육감적인 춤과 노래 솜씨, 특히 당 당해 보이는 래핑이 돋보이는 `다시 만나줘'가 실린 그들의 데뷔 앨범이 듀스 이후 오랜만에 듣는 ‘제대로 된’ 힙합 음반인 것만은 분명하다. 반면 양파는 ‘잘 노는 여자’가 능사가 아님을 의식한 기획처럼 보인다. 그는 ‘청순한 소녀’같은 이미지에 걸맞게 리듬 앤 블루스풍의 발라드 ` 애송이의 사랑'으로 승부수를 띄웠고, 남자의 센티멘털리즘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신승훈, 솔리드, 김정민, 녹색지대, 조관우 등이 잘 노는 남자애들 틈에 끼어서 애절하게 노래를 했지만, 변진섭 이후 거의 10년 이상을 남자가 ‘질질 짜는’ 모습을 줄기차게 보는 일은 지겹다. 반면 이선희와 주현미를 TV에서 본 지는 꽤 오래되었으므로 여자가 우는 듯이 노래부르는 모습은 덜 지겹고 때로는 신선하다.

(사진/청순한 소녀 같은 이미지와 리듬 앤 블루스풍의 발라드로 가요계를 평정한 양파에겐 신선함이 있다.)

그런데 외국 팝의 동향에 관심있는 사람은 1996년이 앨러니스 모리셋(ALa nis Morissette)이 머라이어 캐리(Mariah Carey)에게 한판승을 거둔 해라 는 것을 기억할 것이다. 즉, 질질 짜고 배배 꼬면서 사랑과 이별의 센티 멘털리즘을 노래한 관록의 여가수 머라이어 캐리가 직설적이고 자기고백 적으로 폭폭 찔러대는 마돈나의 신예 여가수를 당해내지 못했다(소니라는 다국적 재벌의 지체 높으신 사모님이 캐나다 촌구석에서 댄스음악이나 하 다가 어쩌다 마돈나의 눈에 들어 발탁돼 갑자기 록음악으로 변신한 피라 미한테 당하다니…).

리아는 앨러니스 모리셋의 한국적 등가물로 보인다. 음악 스타일 면에서 라기보다는 문화적 의미에서. `개성'이라는 곡의 가사와 창법에 담긴 ‘ 여자의 직설적 표현’의 미학은 ‘잘 노는 말괄량이’ 이상의 의미를 던 져주는 듯하다. 본인에게는 실례일지 모르지만 ‘입시교육 부적응자’, ‘사춘기 불량소녀’ 등의 용어까지 떠오른다. 또한 그는 이윤정이나 주 다인과는 달리 ‘생각있어 보인다’는 이미지를 던진다는 점이다. 앨범을 구입한 사람은 그의 가사쓰는 재주가 범상치 않음을 느낄 것이다. 물론 시인 아저씨들처럼 담배 피워물고 인상쓰면서 쓴 것과는 거리가 있지만 붓(아니 펜, 아니 자판?) 가는 대로 갈겨 쓴 솔직하고 일상적인 가사는 정말 ‘잘 쓴’ 것 같다. 아, 참 앨범 제목이 `다이어리'란다. 역시 남의 일기를 훔쳐 보는 건 재미 만점이다.

무엇으로 정상을 유지할까

‘음악평론이 왜 음악 얘기는 별로 없고 딴 얘기만 하지’라고 누군가 힐 난할 듯하다. 반문하자면 나는 어느덧 가요를 들으면서 음악에는 신경쓰 지 않게 ‘되었다’. 그보다는 가수의 신상이 어떤지, 소속 기획사는 어 딘지, 작곡자와 편곡자는 누군지가 더 중요한 궁금증으로 다가온다. 이는 ‘잘못된’ 것일까.

하지만 오늘 소개한 소녀가수들에 대한 음악외적 궁금증은 이들 여린 심 성의 소유자들이 ‘친구들의 환호 뒤에서 오빠들과 아저씨들이 지배하는 가요계’를 잘 헤쳐 나갈까에 대한 우려다. 리아는 대부분의 가사를 썼지 만, 그걸 빼고는 작사도 작곡도 프로듀스도 홍보도 다 오빠들과 아저씨들 이 하는 세상. 이런 말이 들려 온다. “흥 그런 말 하는 당신은 아저씨 아녜요?” 아저씨 왈 “그래 맞아 그런 세상이니까 정신 차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