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편지	1997년05월01일 제 155호

한국인으로 산다는 것

요즘 들어 소극적이고 근시안적으로 돼 가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주변에 서 이웃들과 벌이는 현실이 아니고 신문이나 방송을 통해 들리는, 어딘가 멀리 떨어진 세계인 듯 싶은, 그러나 실은 어디까지나 이웃의 삶과 맞붙 어 있는, 이 나라 지도계층에서 벌인, 흑막이 뒤섞인 더러운 일들에 대한 보도들로 인해서다. 권력의 핵심에서 벌인 부정한 일과 부패된 오물과 같 은 사건은 십수년을 두고 우리의 생활 언저리를 싸고 돌았다. 수십메가톤 의 핵폭발에 비교될만한 사건들에 단련받은 우리에게 새삼스럽고 놀랄 만 한 일도 아니다.

날치기 정국에 이은 한보사태, 김현철씨 파동 등의 사건은 한국민의 정체 성을 다시 한번 부정한 사건이라는 데 또다른 의미가 있다. 문민정부는 개혁과 부패 사정, 경제정의 실현, 역사바로세우기 등을 앞세우고 뒤에서 는 권력의 핵심이 썩어들어가는 모순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문민정부 초 기의 국민적 성원과 국제적 갈채는 이제 천일야화가 된 지 오래다. 우리 의 자랑이던 문민정부의 더러운 치부가 백일하에 드러난 가운데 정체성을 부정하게 되는 위기에 봉착한 것이다.

지금 자라나는 세대는 어떨까. 그들은 한국인으로 산다는 것이 자랑스러 운 세대일까, 아니면 한국인이라는 것에 콤플렉스를 가지고 선진국에 대 한 경외심으로 가득 찬 세대일까. 최근 초등학교에서 결혼 상대자로 백인 을 택하겠다는 어린이들이 많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제껏 한국인으로 자부심을 갖고 살기 위해 개발독재를 견디며 경제발전에 매달려왔건만 후 세들은 그런 노력마저 인정하지 않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문민정부에 조기를 게양하게 된 오늘의 현실은, 그리고 그 정부가 단죄했 던 5, 6공의 죄인들에게 “뒤틀린 국운을 걸머졌던 영웅”이라는 항변과 역설을 제공했다. 이런 현실은 자라나는 세대들을 주체성에 관한 콤플렉 스에서 결코 구원할 수 없다. 독재정권 아래서 가질 수 없었던 주체성을 문민정부에서마저 제대로 유지할 수 없는 게 바로 정체성 위기의 현실이 다.

한국인으로 산다는 게 무엇인지 모를 일이다.

최기영/ 경기도 양주군 광적면 우고리 5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