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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 |
1997년05월01일 제 15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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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박성희씨의 거실에서 함께 찍은 사진. 왼쪽부터 도종화. 류세홍. 박성희씨와 딸 초롱이, 최정민씨.)
독일 베를린시 라이네스트라세 48번지. 범청학련(조국통일범민족청년학생 연합) 공동사무국이 위치한 곳이다. 터키인 집단거주지역으로 비교적 땅 값이 싼 이곳을 찾은 날은 아침부터 눈이 내려 꽤 쌀쌀했다. 지하철에서 내려 우리식 연립주택과 비슷한 형태의 4층건물이 죽 이어진 거리를 10분 정도 걸으니 48번지 팻말이 나타났다. 주택가 한복판의 그저 평범한 집이 었다. 전화로 약속한 박성희(28)씨의 집을 찾았다. 범청학련 사무실은 박 씨와 같은 아파트 뒤쪽 별채 2층에 위치하고 있었다. 마음 한켠에선 이제 어느 누구도 돌아보지 않는 ‘통일의 꽃’에 대한 스산함이 불현듯 스쳤 다.
남-북 잇는 팩스교환이 ‘핵심임무’
“누구세요”라는 목소리와 함께 집안 일을 하던 박씨가 마치 오랜 옛 친 구를 대하듯 반갑게 맞아주었다. 이제 애기엄마가 된 그지만 아직도 앳된 모습 그대로였다. 거실 겸 안방, 침실, 애기방 등으로 구성된 18평 정도 크기의 낡은 독일식 주택이었다. 방 한편 책꽂이에는 사회과학 서적이 진 을 치고 있었으나 한글로 된 유아교육 도서, 한국영화 비디오 등도 적지 않았다.
박씨가 차를 끓이는 동안 뒷집(범청학련 사무실)에 있던 최정남(28·서울 대 원예과 88학번), 류세홍(27·조선대 치의학과 89학번), 도종화(23·연 세대 기계공학 93학번)씨가 한꺼번에 들어왔다. 그저 평범한 우리네 대학 생들의 모습 그대로였다.
이들은 현재 범청학련 공동사무국을 지키고 있다. 한때 남북 학생들이 공 동사무국에서 함께 지냈으나 북쪽 학생들이 비자문제 등으로 독일입국이 어려워져 2년 전 사무국을 떠나 요즘은 두달에 한번 꼴로, 회의가 있을 때만 찾아온다고 했다. 사무국장을 역임한 박씨(92~93)와 최씨(94~96)는 이제 공식직책도, 책무도 벗은 몸이지만 아직도 많은 부분에서 큰 힘이 되고 있다. 지금은 류씨가 사무국장, 도씨가 사무국원이다.
범청학련은 91년 8월15일 평양에서 열린 ‘청년학생 통일회담’에 당시 전대협 대표로 방북한 박성희, 성용승씨가 북한쪽과 결성에 합의함으로써 태동했고, 그해 11월 베를린에 ‘범청학련 공동사무국’이 설치됐다. 현 재 범청학련은 남쪽본부(한총련·1백80여개대 가입), 북쪽본부(조선학생 위원회·1백20여개대 가입), 해외동포학생위원회(미국, 유럽, 일본지부) 등 3개 조직으로 구성돼 있으며 남쪽의 한총련 의장, 북쪽의 조선학생위 원회 위원장, 해외동포청년학생대표 등 3명이 공동의장을 맡고 있다. 서 울과 평양을 잇는 중간기지 구실을 하고 있는 공동사무국의 핵심임무는 팩스교환(이를 ‘자주교류투쟁’이라고 불렀다)이다. 팩스로 남·북·해 외 청년학생들의 회의를 성사시키고, 남북 대학들의 자매결연도 주선하고 있는 것이다.
사무국 운영비로 매월 남·북·해외 등 세 지부에서 각 1천마르크씩 3천 마르크(약 1백56만원)를 보내기로 했으나 최근엔 남쪽에서 보내는 것이 거의 전부다. 이들은 재정뿐 아니라 신분도 불안정하다. 여권만료기간이 1년인 류씨와 도씨는 망명신청을 해놓은 상태이고, 최씨는 독일이 3개월 간 무비자라는 점을 이용해 3개월에 한번씩 독일 밖으로 나갔다가 들어오 는 방식으로 체류기간을 연장하고 있다. 91년 방북 뒤 베를린에 눌러앉은 박씨는 한국 국적을 포기하진 않았지만 95년 1월 독일정부로부터 망명을 허용받아 그나마 낫다.
가슴 속에 묻어둔 이야기들
박씨는 93년 유학생 김정수(32·월간 <말> 독일 통신원)씨와 결혼, 딸 초 롱이(3)를 두고 있다. 남편 김씨는 87년 6월 한양대 반독재특위위원장 출 신으로 전대협 결성에도 기여한 바 있는 운동권 출신이다. 88년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으로 이민가 재미한청련에서 윤한봉씨와 함께 활동하다 90 년 황석영씨의 소개로 베를린에 왔다. 박씨와 김씨는 유럽민족민주운동협 의회의 교민모임에서 만나 결혼하게 됐다. 김씨는 현재 훔볼트대학 한국 학과에 재학중이며, 노인들을 돌봐주는 아르바이트로 생활비를 벌고 있다 .
박씨와 함께 방북했던 성용승씨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자신이 부정입학 생이라는 사실이 국내언론에 의해 밝혀지고, 현지 교민들과 마찰을 빚는 등 개인적 어려움을 심하게 겪으면서 지금은 통일운동에서 멀어진 상태다 . 박씨는 성씨에 대해 “연락이 끊긴 지 오래됐다. 베를린에 있는 것으로 안다”고만 말했다.
이들을 더욱 괴롭히는 건 가끔씩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몰려드는 외로움 과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불투명한 개인적 미래다. 하지만 현지교민 들이 자주 이들을 찾아 반찬도 가져다주고, 가끔씩 한국에서 온 낯선 이 들이 자신들을 찾아줘 향수를 달랜다. 한반도 통일처럼 분명한 게 아무 것도 없는 이들이었지만 관심은 역시 그 불투명한 ‘통일’이었다. 박성 희, 최정민, 류세홍, 도종화씨가 번갈아가며 들려준 통일이야기.
“서로 알아야 됩니다. 어떻게 살고 있는지. 그래서 자주교류와 편지교환 이 중요한 겁니다.” “한쪽의 제도나 통일방식을 강요해선 안 됩니다. 경제적, 생활조건 차이를 인정해 범청학련은 1민족 1국가 2체제 2정부를 통일방안으로 주장하는 겁니다. 정부가 이를 북한 연방제를 그대로 받아 들인 거라 하지만 정부의 통일방안과도 별 차이가 없습니다.” “정부영 역과 민간영역에서 다같이 통일준비를 해야 합니다. 지금처럼 민간교류를 막는 정부의 통일논의 독점은 통일의 큰 장애입니다. 저희들은 민간차원 교류의 단초라도 마련해야 된다는 심정에서 방북한 것입니다. 아무 준비 없이 독일식 흡수통일이 이뤄질 경우 심각한 사회문화적 차이로 내전상황 이 벌어질지도 모릅니다.”
이들은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할 땐 쑥스러워했지만 통일 이야기가 나오 자 봇물 터지듯 마구 토해냈다. 북한식량 사정에 대해 가장 최근에 북한 을 방문한 도씨와 류씨는 “지난해 방북 당시 대접을 잘 받았는데 그때 잘 먹었던 일이 죄스럽게 느껴진다”고 말하기까지 했다(이들과 만난 뒤 인 3.31~4.2일 남북·해외간 팩스회의에서 해외쪽 제안으로 ‘범청학련 북한돕기’가 논의됐다. 그 자리에서 북쪽은 ‘도움을 받는 입장이기에 논의에서 빠지겠다’고 이야기했고 남과 해외쪽의 논의로 북한 돕기가 결 정됐다고 전해왔다).
이야기를 끝낸 뒤 범청학련 사무실을 잠시 들렀다. 그저 평범한 대학가 자취방 같은 분위기였다. 방 2개, 부엌, 그리고 남과 북을 잇는 문제의 팩스, 남북한과 해외에서 온 통일관련 서적들.
자리를 근처 식당으로 옮겼다. 좀더 깊은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였다. 그 제야 이들은 가슴 속 깊이 묻어뒀던 이야기들을 털어놓았다. 한몸을 온전 히 통일 밑거름으로 헌신한 이들을 절망케하는 건 사소한(?) 개인문제가 아니었다. 이들은 통일논의 의사결정 구조에서 자신들이 남과 북 양쪽으 로부터 배제된다는 점에서 서운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박성희씨는 “우릴 이곳으로 보낸 사람들은 지금은 다 취직하거나 국회 비서관 등으로 각자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린 예전 모습 그대 로입니다. 방북을 결심하는 그 순간부터 우리 인생은 완전히 뒤바뀌었습 니다. 물론 제 행동에 대한 후회는 전혀 없지만, 남과 북 모두가 우릴 통 일전문가로 인정해 주지 않는 게 답답합니다. 이젠 얼굴도 본 적 없는 후 배들과 사업을 논의해야 하는데, 지도부가 바뀔 때마다 그간의 경과를 설 명하느라 몇개월이 지나가곤 합니다. 때론 한쪽 주장이 현실성을 간과한 것 같아 제 생각을 말하면 ‘저쪽 이야기(반응)만 전해달라’는 식으로 말을 끊을 땐 맥이 풀립니다. 우린 단순히 메신저 노릇만 하려고 조국을 떠난 건 아닌데 말입니다. 우릴 1회용 소모품처럼 한번 쓰고 버린다면, 우리 자신의 인생이야 각자 알아서 개척해 나가겠지만 통일운동에서 그건 너무 큰 낭비 아닌가요?”
“북쪽에도 섭섭하기는 마찬가지”
잠자코 듣고만 있던 최씨도 “북쪽에 대해 섭섭하기도 마찬가지”라고 말 했다. 최씨는 중국에서 열린 범청학련 회의에서 중국 심양으로의 사무국 이전을 주장하는 북한 대표의 주장에 대해 “중국의 사회적 상황이 불안 정하다”는 이유로 반대입장을 표했다. 최씨는 “그러나 대세에 따르겠다 ”는 점도 밝혔다. 이는 나중에 “최정민이 재떨이를 집어던지며 화를 냈 다”는 이야기로 와전됐다.
지난해 연세대 사태(‘연대항쟁’이라고 표현했다)에 대해서도 이들은 “ 비판여지가 있다고 느꼈지만 제대로 된 논쟁을 벌이지는 못했다”며 많은 아쉬움을 표했다. 이들은 통일의 미약한 조짐이 채 싹도 피기 전에 꺾여 버리는 일들이 벌어질 때마다 “심장을 도려내는 아픔”을 겪는다며 한숨 을 내쉬었다. 이들은 “개인적인 입지나 여건은 점점 어려워지겠지만 우 리들은 어찌됐든 통일운동에 평생을 바칠 수밖에 없습니다. 앞으로 통일 문제를 더욱 공부할 예정입니다”라고 굳은 의지를 표하며 말을 맺었다.
박씨는 어른들의 이야기가 한없이 길어지자, 칭얼대기 시작하는 초롱이를 얼르며 “한창 말을 배워야 할 시기인데 독어와 한국어 사이에서 혼동스 러워하고 엄마 외에는 접하는 사람이 별로 없어 말이 늦되다”면서 엄마 의 안쓰런 마음을 내비쳤다.
늦은 밤, 졸린 눈을 비비며 엄마품에 안겨 낯선 한국인 아저씨에게 “안 녕”이라는 한국말로 작은 손을 흔드는 초롱이는 남도 북도 아닌 한민족 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초롱이의 맑은 눈망울에 객쩍은 방문객의 가슴이 쿡 메었다.
베를린=글·사진 권태호 기자
© 한겨레신문사 1997년05월0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