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리재에서
1997년05월01일 제 155호 한겨레21

황장엽, 윤이상… 4·19

황장엽씨를 맞는 우리의 감회는 남다르다. 북한 유일체제의 이념적 토대 를 정초하고 김일성-김정일 세습을 정당화하는 등 남북의 이념 및 체제대 결의 원형질 구실을 했던 장본인의 망명이기에 그를 둘러싼 어떤 의문이 나 아쉬움도 당장 이 감회를 가릴 수는 없다. 때문에 비록 그가 오자마자 뜬금없는 전쟁위기설을 풀어놓아 한보사태 앞에서 죽은 듯 침묵하던 위정 자들을 벌떡벌떡 세우고 있다 해도 우리는 그 흔한 우려나 불만 한마디 던질 생각은 없다.

그러나 한가지 치밀어 오르는 회한이 있다. 열광하는 당국자들에게 던지 고 싶은 원망이 있다. 왜 황장엽은 되고 윤이상은 아니되었는가. 윤이상 의 등단을 두고 세계 음악계가 ‘세계음악사의 행운’이라고 찬사했으니 더이상 그의 음악적 성공을 거론할 필요는 없다. 다만 그가 끝끝내 돌아 오려 했다는 점만은 적시하려 한다. 베를린 자택 앞마당에 한반도 모양의 연못을 만들어 놓고 조국을 그리워하던 그였다. 말년 일본을 방문할 때면 고향인 통영(지금의 충무) 앞바다를 먼 발치에서나마 보기 위해 남해안 근처까지 접근하기도 했다. 삶과 음악의 고향인 통영은 보석처럼 빛나는 그리움의 결정이었다. “아버지와 저녁 산책길에 들은 ‘남도창’, 어머 니가 주위 이웃들과 우물가에서 부르던 민요, 미륵산의 사월초파일 행사, 승려들의 예불소리와 범종소리, 한밤중 그물을 끌어올리며 부르는 어부들 의 노래, 가면극 통영오광대 그리고 포구의 투명한 잔 파도에 부서지는 달빛….”(루이제 린저와의 대담에서) 그는 이렇게 기원하곤 했다. “내 가 귀국하면 흙에 입을 가까이 대고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나는 당신을 사 랑합니다. 당신에 대한 나의 충성은 변함이 없습니다.” 간첩 누명을 씌 워 중앙정보부의 지하실에서 수개월 동안 고문했고, 견디다 못해 쇠창살 에 머리를 짓찧어 자살을 기도하게 했던 조국인데도 말이다.

그 조국은 끝끝내 그의 귀국을 불허했다. 대신 반성과 사과를 그리고 서 약을 강요했다. 적반하장의 이 요구를 거부해 마지막 기대를 걸었던 ‘윤 이상음악축제’ 참가가 무산되자 95년 9월 이 ‘상처받은 용’은 결국 허 물어졌다.

정부의 고위당국자는 황 비서를 구한말 항일위정척사운동과 무력투쟁을 주도하다 대마도에서 분사한 면암 최익현 선생에 비교했다. 지하의 면암 이 까무라칠 노릇이다. 그들의 논리에 따를 때 주체사상으로 북한을 망치 고 남쪽 또한 ‘주사파’의 혼란 속에 빠뜨린 황씨였다. 그와 윤이상의 공과를 비교하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다. 다시 묻고 싶다. 왜 윤이 상은 아니되었는가. 정권의 이용가치 때문인가.

자유의 종을 난타하다 “그날 스러져간/ 젊음 같은/ 꽃사태”를 지켜본 지 올해로 27번째. 그동안 정권은 네번씩이나 바뀌었고 김영삼 대통령은 이 정부가 4·19 정신을 계승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무엇이 바뀌었나. 공 과를 농단하고 인도적 고려조차 짓밟는 정략과 독재의 망령만이 홀로 우 뚝한데….

한겨레21 편집장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05월0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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