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하는 재벌
1997년05월01일 제 155호 한겨레21

왕회장! 철강의 꿈이 익는다

(사진/"실패한 재벌을 또다른 재벌이 인수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우리 경제의 비극이자 현실이다. 한보 당진제철소.)

 “왕 회장의 20년 제철소 건설 꿈이 실현될 것인가.”

고로방식의 일관제철소를 짓는 것은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20년 숙 원사업이다. 현대그룹의 대권을 승계한 정몽구 회장도 지난해 1월 취임사 에서 제철소 건설 의지를 분명히 했다. 그러나 현대는 지난해 정부의 반 대로 큰 좌절을 겪어야 했다. 현대는 올해 신규 사업계획에 일관제철소 건설사업을 포함시키면서 계속 칼을 갈아 왔지만 “현정권 아래서는 어려 울 것”이라는 것이 주변의 대체적인 시각이었다.


7조원 육박하는 자금능력 있어야

그러나 연초부터 터진 한보사태가 새로운 변수로 떠올랐다. 정부가 최근 한보철강의 3자인수 조기추진을 공식화하고 나서면서 현대가 유력한 인수 후보로 거론되고 있기 때문이다. 손근석 한보철강 사장은 지난 4월3일 국 회 한보특위에 한보철강에 대한 종합평가 결과를 보고하면서 “조속히 제 3자 인수를 추진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밝혔다. 강경식 부총리도 4월11 일 “한보철강이 완공되기 전이라도 서둘러 임자를 찾아주겠다”며 3자인 수 조기추진 방침을 공식화했다. 강 부총리는 4월16일 “제철소 건설은 자금력만 있다고 가능한 것은 아니고 정부나 금융기관의 지원이 불가피하 다”며 일견 현대의 일관제철소 건설에 제동을 거는 듯한 말을 했다. 그 러나 일관제철소를 지으려면 한보철강을 인수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현대 에 보낸 것이라는 분석도 나왔다. 이런 와중에 제일은행 등 채권은행단이 한보철강 인수업체에 일관제철소 추가건설을 허용해 주자는 내용의 `한보 철강 ‘제3자인수 추진안’을 최근 정부에 제출한 사실이 드러났다. 정부 안에서는 한보철강의 새주인 찾기가 빨리 진행돼 5월 이전에 윤곽을 드러 낼 것이라는 예상까지 나오고 있다. 일련의 흐름을 보면 정부와 채권은행 단, 한보철강 재산보전관리인단이 현대의 한보인수 성사를 위해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는 듯한 느낌마저 준다.

철강업계나 금융계에서는 한보철강을 인수할 여력이 있는 곳은 현실적으 로 재벌그룹밖에 없다는 점에 이의가 없다. 한보철강이 지고 있는 빚이 천문학적 규모이기 때문이다. 검찰은 한보사건 수사결과를 발표하면서 한 보철강의 총부채가 5조5백99억원이라고 밝혔다. 또 한보철강 재산보전관 리인단은 당진제철소 B지구의 열연·냉연공장 건설 등을 위해서는 앞으로 도 1조5천8백85억원의 추가투자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인수업체는 부채 와 추가투자비를 합해 7조원에 육박하는 자금부담을 져야 한다. “실패한 재벌을 또다른 재벌이 인수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우리 경제의 비극이 자 현실이기 때문이다. 채권은행단도 3자인수안에서 인수자 자격을 현금 동원 능력이나 자기자본이 1조원 이상인 재벌그룹으로 제한했다. 철강 전 문생산업체의 컨소시엄이 인수하는 방안도 포함돼 있지만 회의적 시각이 많다. 지배주주가 경영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컨소시엄을 구성할 경우 군 소 주주업체들이 참여를 꺼릴 공산이 크다. 그렇다고 주식을 골고루 분산 시키면 참여업체들 사이에 경영권 분쟁이 생길 소지가 많다. 주인이 여럿 일 경우 효율적 경영이 가능할지도 미지수이다. 포철이 한보를 인수하는 방안도 생각할 수는 있지만 어렵다는 것이 중론이다. 무엇보다 포철 자신 이 인수에 부정적이다. 또 포철의 한보인수는 미국 등 외국과의 통상마찰 을 일으킬 수 있다. 포철 관계자는 “미국은 한보를 한국 정부에 예속된 금융기관의 금융지원(보조금)을 받은 기업으로 보고 있어 포철이 한보를 인수하면 통상마찰에 휘말릴 공산이 크다”고 말했다.


인수 검토 공식부인… 물밑검토 흔적은 무성

4월16일 당진제철소 현장에서 열린 한보철강 기업설명회는 63개 업체 1백 60여명이 참석하는 성황을 이뤘다. 그러나 취재진의 관심은 현대그룹의 특사격인 인천제철 관계자에게 집중됐다. 현대가 한보철강 인수 후보업체 중 1순위에 올라 있는 것이다. 철강업계의 한 관계자는 “한보철강의 인 수에서 자금력이 필요충분조건은 아니다”면서 “제철업에 대한 강한 욕 망과 경륜을 함께 가진 업체라야 한다”고 말한다. 현대는 20년 동안 정 부의 반대 속에서도 제철소 건설의 욕망을 버리지 않았다. 또 계열사인 인천제철을 통해 포철을 뺀 그 어느 기업보다 제철업에 많은 경험을 쌓아 왔다. 현대는 엄밀히 말해 철강업에 신규진출한다고 볼 수도 없다.

그러나 현대는 한보철강 인수 검토를 공식부인하고 있다. 현대의 일관제 철소 사업에 깊숙이 관여해 온 한 임원은 “현대가 일관제철소 건설을 추 진하고 있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일이지만 지금까지 일관제철소 건설과 한보철강 인수를 연결시켜 검토한 적이 없다”면서 “정부와 한보철강 인 수 문제를 협의한 적도 없고 채권은행단이 제3자인수 추진안을 정부에 제 출한 것도 전혀 모르는 일”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현대가 최근 들어 물 밑에서 일관제철소 사업 재추진과 한보인수 문제를 놓고 물밑으로 여론동 향을 탐지해 온 흔적은 여러 곳에서 감지되고 있다. 최근에는 “3자매각 이 예상되는 한보철강의 최저가 인수를 위해서도 현시점에서 일관제철업 신규진출을 공식화하는 게 유리하다”는 내용의 내부 보고서가 흘러나오 기도 했다. 물론 현대는 보고서의 존재 자체를 부인했다.

정부 입장에서 보면 현대의 한보철강 인수는 일관제철소 건설을 둘러싼 현대와의 마찰을 해소하고 한보를 회생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될 수 있다. 정부는 그동안 법적으로 현대의 일관제철소 건설을 막을 명분이 없 으면서도 반대해 왔다. 제철업 진출은 정부에 신고하거나 허가를 받을 대 상이 아니다. 그렇지만 현대가 정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제철소 사업을 단 독으로 밀어붙이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정부의 눈 밖에 난 기업 이 살아남을 수 있느냐는 문제를 거론하기 이전에 제철소 부지 마련이나 항만이나 도로 등 사회간접자본시설 건설, 제철소를 짓는 데 꼭 필요한 환경영향평가, 외자도입 등에는 정부의 지원과 협조가 절대적으로 필요하 다. 통산부가 지난해 11월 공업발전심의회를 들러리 세워 현대 움직임에 쐐기를 박고 나왔을 때 현대가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던 것도 이 때문 이다.

정부가 한보철강 인수를 전제로 현대에 일관제철소 건설을 허용하는 데 부담이 전혀없는 것은 아니다. 당장 지금까지 내세웠던 각종 반대 논리를 뒤집어야 한다. 정부는 그동안 △경제력 집중 및 대기업의 문어발식 사업 확장 △철강재 공급과잉 △고로방식의 경쟁력 약화 △공해물질 배출 △기 존 철강업계의 인건비 상승 등을 반대이유로 내세웠다. 6개월도 안 돼 정 책이 왔다갔다한다는 비난이 예상된다. 삼성 승용차사업 허용 과정에서의 전과(前過)도 걸린다.


‘금융기관 부담’정부도 부담

물론 현대는 철강재의 공급과잉과 고로방식의 경제성 문제 등에 대해 전 혀 다른 주장을 해왔다. 예를 들어 통산부는 오는 2000년에는 생산능력( 조강기준)이 전체수요에 비해 5백50만t이 부족하지만 필수수입량을 감안 하면 문제가 전혀 없다는 전망이다. 그러나 현대는 필수수입량을 빼고도 1천만t 이상이 모자란다고 보고 있다. 현대는 일관제철소를 건설할 경우 현재의 독과점적 공급체제가 경쟁체제로 전환돼 기존 공급업체의 구조조 정을 촉진시키고 국내 철강산업 전체의 효율성을 높일 것이라고 말한다. 현대의 한 임원은 “포철은 독점체제와 정부의 간접지원에 힘입어 연간 8 조원의 매출과 1조원의 순이익을 올리면서도 가격인하에는 신경을 안쓴다 ”고 지적했다. 또 대규모 투자를 통해 침체된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고 고용확대 효과도 크다는 설명이다. 일관제철소 건설에 따른 경제력집중 문제에 대해서도 기우라는 입장이다. 현대는 2005년까지 연산 3백만t 규 모의 고로 2기를 총 4조8천억원의 투자비를 들여 건설해 연간 1조8천억원 정도의 매출을 올린다는 계획이다. 현대의 한 임원은 “제철소의 매출 규 모는 올해 현대그룹 전체 매출액 목표 80조원의 2.3% 수준에 불과하다” 고 말한다. 그는 또 투자액도 올해 그룹 총투자비 9조원의 절반 수준에 불과하고 그나마 몇년에 걸쳐 나눠 하는 것이기 때문에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는 설명이다.

그 어느 재벌이 한보철강의 새 주인이 되더라도 인수조건을 둘러싸고 특 혜시비가 일 수 있다는 점도 큰 부담이다. 한보철강이 금융기관에 진 부 채 5조여원 가운데 설비투자비를 뺀 나머지 금융이자 및 운영자금, 정태 수 총회장 일가의 유용액 1조4천6백여억원은 최소한 탕감 대상이다. 이미 투자된 설비도 제 품질을 갖춘 제품을 계획된 수량만큼 생산할 수 있느냐 는 경제성 평가에 따라 추가지원이 불가피할 수 있다. 현대의 한 임원은 “국내외 어느 기업이 당진제철소를 건설하더라도 최소 4조8천억원의 투 자비가 든다는 것이 한보철강 재산보전관리인단의 주장이지만 믿을 수 없 다”면서 “2001년 흑자를 기록하고 2007년에 누적적자 완전 해소, 2010 년에 채무상환 완료가 가능할 것이라는 전망도 장밋빛 그림에 불과하다” 고 말한다. 달리 말하면 인수업체에 바가지를 씌우려 한다는 것이다.

부채탕감이나 이자상환 유예, 저리의 종잣돈 제공 등 그 방법이 무엇이든 인수업체에 대한 금융지원은 금융기관의 부담으로 돌아온다. 채권은행단 은 3자인수 추진안에서 산업합리화 업체 지정을 통한 세제지원까지 포함 시켰다. 세금 감면은 바로 국민의 몫이다. 그렇다면 특정기업에 이런 막 대한 규모의 지원을 하면서까지 한보철강의 3자인수를 추진할 필요가 있 느냐는 의문이 들 수 있다. 그러나 한보철강의 새 주인을 찾지 않으면 5 조원 이상의 돈을 빌려준 금융기관은 연쇄도산이 불가피하다는 데 정부의 고민이 있다. 또 웬만한 지원으로는 인수업체가 하나도 나서지 않을 가능 성이 높아 고민은 더욱 커진다.


어떤 ‘수습의 묘’찾아낼까

물론 현대로서는 한보철강을 인수하지 않고 일관제철소를 짓는 것이 최선 이다. 현대의 한 임원은 “한보의 코렉스 방식만으로는 기술적, 경제적으 로 안 된다는 것이 우리 엔지니어들의 판단”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판단에는 일관제철소 건설이 허용되고 금융·세제상 지원과 사회간접자본 시설 지원 등이 한보철강 인수에 따른 부담을 상당 부분 해소시켜 줄 수 있는 수준으로 이루어진다면 한보철강 인수문제를 생각해 볼 수있다는 뜻 이 내포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경제계에서는 현대의 일관제철소 건설과 한보철강 인수 문제는 국민경제 라는 좀더 큰 틀에서 바라봐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국익을 위해서는 새 인수자가 어떻게든 한보철강을 조기 정상화시켜 은행 빚을 다 갚도록 하 는 것이 급선무이다. 현대로서도 당진제철소 시설을 이용할 경우 신규투 자비를 줄일 수 있는 이점이 있다. 고로 방식과 코렉스 방식의 상호보완 효과도 기대된다. 정부와 국내 재벌순위 1위인 현대가 어떤 `‘수습의 묘 ’를 찾아낼지 주목된다.

곽정수 기자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05월0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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