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1997년04월27일 제 154호

시각중복장애아들의 보금자리 ‘서울 라파엘의 집’

(사진/사회적 편견은 장애아들을 가족으로부터 버림받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다. 중복장애아 수용교육기관인 `라파엘의 집'에서 자원봉사자들이 빨래를 거들고 있다.)

“이혜미, 이혜미 어디 있어요?” 선생님은 있는 힘을 다해 목소리를 높 인다. 아이 앞에 앉아 있던 다른 선생님이 다시 한번 소리를 치자 겨우 자기를 부른다는 것을 알아차린 아이가 오른손을 수줍게 든다. 그리고 선 생님이 주먹으로 탁자를 계속치자 소리나는 쪽으로 발을 옮긴다. 선생님 은 아이의 손을 잡고 이름을 쓴 점자에 손가락을 갖다댄다. 선생님의 고 함이 이어진다. “10일 목요일이에요, 혜미 목 어디 있지?” 날짜와 요일 을 가르치려고 발음이 같은 목에 손을 갖다 대고 소리치지만 아이는 아는 지 모르는지 배시시 웃기만 한다. 선생님은 다시 아이의 손을 잡고 출석 부를 들게 해 통에 억지로 넣는다.

인내를 갖고 친구가 돼주세요

출석 확인은 항상 이런 식이다. 보통 아이들 같으면 이름 한번 부르는 것 으로 끝날 출석 확인이 혜미(13·가명)에게는 2분 이상 걸리는 고역이다. 한쪽 벽에 적혀있는 아이들의 소개 글은 혜미를 이렇게 설명한다. “이혜 미(84년 9월10일생)- 대부분의 시간을 주로 앉아서 보내요. 혜미에게 필 요한 것은 스스로 걷는 거예요. 손을 잡고 노래를 부르며 인내를 갖고 산 책과 걷기운동을 시켜주세요. 물론 즐거운 얘기 하는 것도 잊지 마세요. ”

혜미는 시각장애로 보지 못하는 데다 정신지체와 지체장애를 함께 지닌 채 태어난 시각중복장애아다. 이곳에 온 지 몇년이 지났지만 혜미가 알아 듣는 말이라곤 ‘밥먹자, 일어나, 누워’뿐이다. 물리적으로 비교하기는 힘들지만, 혜미는 헬렌 켈러와 같은 장애를 겪고 있는 셈이다.

서울 인사동에 있는 시각중복장애아 전문교육기관인 ‘서울 라파엘의 집 ’(02-739-7020)에는 혜미와 같은 아이들 20여명이 모여산다. 2세부터 13 세까지인 아이들은 시각장애에다 정신지체(정신박약), 뇌성마비, 자폐, 지체장애 등 보통 3~5가지의 장애를 동시에 겪고 있다. ‘이중고’(二重苦)가 아니라 ‘사중고’(四重苦), ‘오중고’(五重苦)를 걸머진 셈이다. 이들의 지능지수(IQ)는 보통 20~40으로 정신연령으로 치면 1세에서 2세 정도다.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매일 훈련을 시켜도 6세 정도가 돼야 똥 오줌을 가리고 몇 마디 말을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나마 장애가 심하면 이 정도도 기대하기 어렵다. 죽을 때까지 가정이나 사회의 영구적인 보육 이 필요한 것이다. 최소한의 생존방식을 가르치는 이곳은, 그러나 대한민 국 유일의 중복장애아 교육시설이다.

행동 하나 가르치는 데 몇달 걸리기도

지난 86년에 세워진 이곳에는 특수교육, 아동학 전공 교사 10여명과 종교 단체, 직장인으로 이뤄진 자원봉사자들이 아이들을 돌보고 있다. 아이들 하나에 한명씩의 전담교사가 필요하지만 재정이 어려워 꿈도 꾸지 못한다 . 사회복지법인 설립 허가를 받지 못한 임의기관이라 정부의 보조금은 한 푼도 없다. 2천여만원의 한달 예산은 대부분 개인이나 단체가 내는 후원 금으로 채워진다.

중복장애아에 대한 전문적인 교육체계가 없는 상황에서 이곳은 하나의 실 험이 이뤄지는 곳이다. 교통사고로 시각장애자가 된 최명삼(54) 원장은 “확립된 커리큘럼이 없는 점과, 특수교육 전공자이긴 하지만 중복장애에 대한 이해 부족 등이 겹쳐 전문적인 교육을 어렵게 한다”고 말한다. 특 수교육을 전공한 교사들이 중복장애아 교육을 꺼리는 것도 이들의 고민이 다. 한 교사는 “한 가지 행동을 몇달 동안 가르쳐도 효과를 못보는 상황 이 교사들을 지치게 만든다”고 귀띔한다. 가르친다기보다는 씨름을 한다 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육체적으로 고달픈 점도 교사들의 초지를 흔들 리게 만드는 요인이다.

그러나 가르치기 힘든만큼 아이들의 조그마한 변화도 교사들에게는 큰 기 쁨이다. 한 교사는 “아이가 오줌을 가리기 시작한 날이면 밤잠을 설친다 ”고 고백한다.

교사들이 쏟는 정성과는 달리 이 아이들은 부모에게조차 부담스러운 존재 다. 많은 부모들은 맡겨놓고는 아이들을 외면한다. 아이들 때문에 재산을 탕진하거나 이혼한 부모들은 아이들은 아예 찾지도 않는다. 심지어 한 부 모는 “의사가 3개월밖에 못 산다고 했는데 왜 살려놓았냐”며 따지기도 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한 교사는 “부모의 개인적 윤리를 탓하기에 앞 서 그들을 책임지지 못하고 있는 우리 사회가 더 큰 문제”라고 말했다. 부모들의 외면은 장애를 대하는 우리 사회의 한계와 맞물려 있다는 것이 다.

그러나 이들이 가장 견디기 힘들어 하는 것은 무엇보다 주위의 곱지 않은 시선이다. 화랑과 전통찻집 등 고풍스러운 분위기로 유명한 인사동에서 이 한옥집은 천덕꾸러기 취급을 당한다. 봄부터 가을까지 하루 한번씩 있 는 오후 산책 때면 따뜻하게 반기는 주민은 거의 없다고 한다. 그 대신 땅값이 떨어진다며 종로구청에 이전을 요구하는 진정서가 제출된다.

이렇게 어렵게 꾸려나가는 시설이지만 이곳에 오기를 원하는 아이들은 많 다. 우리나라에는 이 시각중복장애아를 위한 교육시설이 전혀 없기 때문 이다. 항상 수십명씩의 대기자가 밀려 있다. 이곳에서 효과적인 교육을 받은 아이들은 맹아학교로 간다. 지금까지 40여명이 진학했다. 그러나 전 혀 진전이 없을 때는 영구적인 수용시설로 옮겨진다. 지금까지 1백여명의 아이들이 경기도 여주의 중복장애인 수용시설로 옮겨갔다.

숫자조차 파악 안돼 정부도 대책 못세워

라파엘의 집에 있는 아이들과 같은 중증중복장애아에 대해서는 정부에서 도 뚜렷한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있다. 조사가 이뤄지지 않아 전체적인 숫자도 모르는 실정이다. 정부의 공식통계에 따르면, 3세~17세의 장애아 는 모두 25만5천여명이고 이들 가운데 장애 정도가 심한 중증장애아는 4 만5천여명이다. 또 이들 중증장애아 가운데 절반 정도는 특수학교를 다닌 다. 특수학교를 다닐 정도의 장애아동은 그래도 장애가 한 가지인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다행이다. 나머지 2만여명 정도는 장애 정도가 심해 병원이 나 수용시설에서 지내든가, 아니면 집에서 보호를 받고 있다는 게 정부의 추산이다. 이들 2만여명 가운데 절반 정도는 라파엘의 집에 있는 아이들 과 같이 중증중복장애아다. 그러니까 1만여명의 중복아들은 별다른 대책 없이 방치되어 있는 것이다.

정부는 이런 중증장애아들에 대한 대책으로 지난해부터 ‘순회교사제’를 도입했다. 순회교사가 특수학교에 가지 못하고 집에 있거나 수용시설에 있는 중증장애아를 직접 찾아다닌다는 것이다. 시행 첫해인 지난해에는 1 백21명의 교사가 7백35명을 가르쳤고, 올해는 교사수를 1백85명으로 늘려 9백여명의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정부 대책은 현재 중복장애아의 10%에도 못미치는 아이들만을 대 상으로 하고 있고, 또 중증중복장애아의 교육은 순회식의 부분적인 방식 으로는 효과를 보기 힘들다는 점에서 그 효율성에 문제가 있다.

중복장애아, 1대1 교육 절실

헬렌 켈러를 키워낸 설리반 선생님의 ‘1 대 1식 교육방법’이 아니고서 는 중복장애아들의 교육에 효과를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의 박옥순(35) 간사는 “전체 장애아동의 교육률이 50% 정도라 사실 중복중증장애아의 교육은 현재 논의의 대상도 되지 못하 는 실정이다. 중복장애아에 대한 전반적인 조사가 먼저 이뤄져야 하고 장 애 정도에 따른 개별화교육 프로그램이 시급히 만들어져야 한다”고 밝혔 다.

선천성 장애아, 그 가운데서도 중복장애아의 교육이 어떻게 이뤄지느냐는 앞으로 우리 사회의 ‘삶의 질’ 수준을 가늠해볼 수 있는 중요한 잣대가 될 것이다.

김창석 기자 한겨레21